보통의 미라클 모닝은 자기 계발을 위한 시간을 갖는 것이겠지만, 우리 가족의 미라클 모닝은 도로 정체를 피하기 위한 그야말로 기적적인 새벽 기상을 의미한다.
작년 추석 연휴에는 친정에 가기 위해 새벽 5시에 출발했음에도 이미 거북이걸음으로 기어가고 있는 차들의 행렬에 충격을 받았었다. 하여 올해 설 연휴에는 이왕 새벽에 가는 거 한 시간 더 일찍 출발하는 게 뭐 대수랴, 일찍 출발하고 일찍 도착해서 쉬자,라는 생각으로 새벽 4시에 출발했다. 그런데 도로 사정은 추석연휴와 다르지 않았고, 우리와 비슷하게 어쩌면 더 일찍 일어나서 출발했을 이들과 심심한 위로의 마음을 텔레파시로 주고받으며(분명히 받았다고 믿는다) 정체길 위를 함께 기어갔다.
해서 나는 도로 정체를 정말 정말 너무너무 싫어한다.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 이상한 취향의 변태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스탄불 공항은 정체라는 걸 상상할 수도 없이 크고 넓고 뻥뻥 뚫린 대로 같았다. 가도 가도 출입국 심사대는 보이지 않고, 수화물을 찾는 곳은 1박 2일은 가야 나올 것만 같았다. 조금 걸어가니 내국인 전용 출입국 심사대가 보였다. 외국인을 위한 출입국 심사대도 곧 나타나겠지 했는데, 생각보다 그 바로가 조금 멀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여행은 그런 것이라 생각하기로 했으니까. 조금 서럽고 낯설고 고생스럽고 그래야 여행 온 기분도 나는 것이다. 앞으로 9박 10일간의 패키지여행에선 좀처럼 느끼기 어려운 감정일지도 모른다. 내 뒤에서 한국 아주머니 몇 분이 흥분을 감추지 못한 높은 음의 목소리로 출입국 심사대가 어딘지 물어보셨다. "저도 잘 모르지만 이 길로 쭉 가면 되는 것 같아요." 처음 보는 나를 열심히 따라오시며 "호호호 왜 이렇게 먼 거야?"라며 웃으며 투정 부리시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캐리어를 찾아 입국장 밖으로 나오니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 이름을 부르며 친근하게 맞아주니 낯선 도시에서도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런데 대충 봐도 가이드 패션이 예사롭지 않았다. 편한 복장에 크로스백을 둘러멘 복장이 아니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세팅된 모습이었는데, 그는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단 하루도 대충 나타난 적이 없었다. 여행 내내 가이드의 세련된 패션을 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재미였다.
우리 일행들이 모인 곳에 가서 잠시 기다리며 일행들을 아주 빠른 시선으로 스캔했다. 아래위를 훑어보았다기보다 어떤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하게 될지, 혹시 우리 아이들 또래 친구들은 있는지 확인 차원에서의 스캔이었다. 뚫어져라 쳐다볼 수는 없으니까.
우리 일행은 모두 22명이었다. 아이들 또래 친구들은 없었다. 대신 연령대의 분포도가 그리 넓은 듯하진 않았다. 가이드의 안내를 듣고 22명이 줄지어 공항 밖으로 이동했다. 마치 말 잘 듣는 유치원생들처럼 가이드의 뒤를 따라 걸었다. 공항을 빠져나가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니 바로 하얀색 벤츠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가 벤츠라니.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또 벤츠에 타보겠는가.
이동 수단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고,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대신해 의사소통을 담당해 줄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하고 마음이 놓였다. 한편으론 설레고 기대하는 마음이 조금은 덜했다. 스스로 헤쳐나가야 할 난관 따위는 애초부터 제거된 채로 여행하는 기분은 이미 한 번 본 적 있는 매우 감동적인 영화를 보기 전 기분 같은 것이었다. 너무나도 감동적일 것이지만 예고 없이 들이닥친 감동이 아닌, 타이밍 딱딱 맞추어서 당도하는 예견된 감동 같은 것 말이다.
버스에 올라타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이 멀미를 할지도 모르고 이왕이면 가이드 가까이 앉아야 설명도 좀 더 집중해서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족이 함께 여행 온 이상 엄마 모드를 끄고 오로지 여행객 모드만 켜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멀티플레이어가 되기로 했다. 아마추어 여행가이면서 가이드 말은 잘 듣는 학생, 엄마이면서 아이들의 여행 메이트라며 스스로를 세뇌시켰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온 후 사진과 영상을 넘겨보니 그저 여행지의 경외감에 입만 헤벌리며 다닌 여행객만 있었다.
공항을 유유히 빠져나간 버스는 이스탄불 시내를 향했다. 퇴근 시간과 맞물려 도로 정체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스탄불은 인구 1584만 명으로 (2021년 기준) 튀르키예 전체 인구의 약 1/3이 거주하고 있는 데다 여행객과 난민까지 거주하고 있어, 체감상으로는 우리나라 서울보다 인구밀도가 높다고 한다. 현대적인 건물들 사이로 동로마제국, 오스만제국의 문화유산까지 품고 있어 전통과 기술의 발달이 공존하는 서울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도시다.
버스 안에서 말로만 듣던 패키지여행의 풍경이 눈앞에서 재현되었다. 마이크를 든 가이드는 자기소개를 한 후 7박 9일간의 일정을 안내했다. 투어 때 사용할 수신기도 한 사람당 하나씩 나눠주었다. 여행에서 꼭 지켜야 할 것들, 안내 사항을 이야기한 후, 이스탄불의 역사에 대해서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모범생처럼 열심히 귀를 쫑긋 하고 들었지만 기억나는 건 테오도시우스 성벽밖에 없었다. 이것도 눈으로 봤기 때문에 기억이 나는 거지 안 그랬음 ‘소매치기 조심하세요!’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을 뻔했다.
이미 20시간 가까이 깨어있었기 때문일까? 육신이 간절히 잠을 필요로 하기 시작하자 정신은 이미 줄 끊어진 연처럼 꿈나라를 헤매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소매치기’라는 단어는 기억하는 걸 보면 꿈나라로 완전히 건너가진 않았나 보다. 한 시간가량 달린 버스가 이스탄불 구시가지로 진입했다. 버스에서 내려 가이드를 뒤따라 가는 내내 가방을 배에 바짝 갖다 붙이고 아이 손을 단단히 잡고 걸었다.
공기 중에 자욱한 담배 냄새를 피할 곳은 없었고, 시선이 향하는 곳마다 개와 고양이가 아무렇지 않게 등장했다. 5분쯤 걸어가자 그랜드 바자르 입구에 도착했다.
그랜드 바자르는 ‘지붕이 있는 시장’이라는 뜻으로 실제로 돔형태의 지붕이 있고, 통로의 양쪽으로 가게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구조다. 1400년대 오스만 제국 때부터 있었던 재래시장이며, 역사적으로도 규모로도 이곳 사람들에게 중요한 장소다. 시장 입구의 환전소에서 이미 한 번 환전해 온 유로화와 달러를 튀르키예 화폐인 리라로 환전했다. 여행안내 책자나 여행 후기에 보면 조금이라도 잘 쳐주는 환전소에서 하라는 충고가 있긴 했지만, 대충 따져보니 큰 차이가 나진 않는 것 같았다. 아직 현지 화폐단위에 익숙하지 않아 머릿속에서 바로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이 안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시장 입구에는 무장한 경찰이 마치 공항 검색대 같은 곳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매서운 눈초리로 검문하고 있었다. 몸에 지닌 것이라곤 환전한 돈과 셀카봉 등 여행객이 지녔음직 한 물건들 뿐인데도 괜스레 위축됐다. 한국인 가이드와 튀르키예 현지인 가이드가 앞장서고 우리 일행은 죽 늘어서 빠른 걸음으로 따라 걸었다.
우선 반대편 출구까지 쭉 걸어가면서 수신기를 통해 그랜드 바자르에 대한 소개를 들었다. 어떤 상품은 사지 않는 것이 좋고, 어떤 것은 품질이 별로고 등등... 많은 정보가 입력되긴 했는데, 지금까지도 내 뇌의 어느 부분에 저장했는지를 몰라 못 찾고 있다. 반대편 출구에 도착한 후 40분간 시간을 줄 테니 시장을 구경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시장이 너무 크니 골목 깊숙이 들어가면 못 돌아올 수도 있다는 경고에 우리 가족은 직진만 하기로 암묵적으로 합의를 했다.
천천히 방향을 틀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구경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가게를 구경하고 물건을 구경해야 하는데, 가게 종업원들이 우리를 구경하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가만히 서 있고 우리는 걸어가는데 어째 관찰당하고 평가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의 속내는 ‘저 한국인들 로쿰 사러 왔을 텐데, 왜 여기 안 들어오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런 시선들도 부담스럽고 첫 장소에서부터 짐을 늘리고 싶지 않아서 대충 쓱 둘러보기만 했다. 앞으로 앞으로 걷다 보니 처음에 들어왔던 입구까지 순식간에 와버렸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워 어떤 가게도 들어가 보질 않았으니 주어진 40분마저도 남아돌게 되었다. 시장 입구를 빠져 나오니 석류주스를 파는 가게가 보였다. 튀르키예에서는 석류주스를 꼭 마셔봐야 한다는 정보를 사전 입수해 둔 터였다.
보통은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곳이 맛집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줄까지 서서 마셔야 하나 안 먹고 말지 주의다. 똑같은 메뉴를 파는 곳이면 흔쾌히 다른 곳으로 간다. 그래서 줄이 긴 가게를 지나 기다릴 필요가 없는 옆가게로 향했다. 석류주스가 혹시 입에 안 맞을지도 모르니(그래봤자 석류맛 주스인데 참 겁도 많다) 딱 한 잔만 사서 나눠 마시기로 했다. 생각보다 더 새콤하고 상큼한 맛에 끝맛은 씁쓸한 주스였다. 맛있었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한 잔이면 충분했다.
석류주스를 마신 후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모이기로 한 장소로 가는 중에 터키식 커피포트인 체즈베를 파는 가게가 보였다. 점원은 인덕션에도 사용 가능하다며 가격대별로 다양한 디자인과 크기의 체즈베를 하나하나 꺼내서 보여줬다. 커피를 좋아하는 내게 맞춤 기념품인데다 너무 예뻐서 하나 사고 싶었으나 첫날부터 기념품을 산다는 게 부담스럽고 어딘가에서 또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돌아섰다.
이 순간이 나는 두고두고 후회되는데, 그 어딘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고민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남은 여행기간 동안 체즈베를 볼 수 있는 곳은 없을 테니 ‘그냥 사!’라고 말해주고 싶다. 혹시나 해서 쿠팡에서 검색해 보니 없는 게 없는 쿠팡에도 그곳에서 봤던 아름다운 체즈베는 찾을 수 없어 더더욱 아쉬운 마음이 컸다.
일행이 모인 곳에 도착하니 해가 지고 있었다. 이슬람 사원의 첨탑 위로 초승달이 떠오르고 아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지자 이국의 땅, 낯선 땅에 있다는 사실이 조금 실감이 났다. 여기가 튀르키예군하며 여행지의 낯선 질감을 느껴보려는 찰나에 왁자하게 한국어가 들렸다. 그리고 또렷하게 내 귀에 들린 목소리
"어머 사진 너무 근사하다. 저도 그렇게 한 장만 찍어줄래요?"
내가 찍은 사진을 본 한국인 아주머니께서 자기 휴대폰을 내미시며 부탁하셨다. 위의 사진과 똑같은 사진이 나 말고 다른 누군가의 휴대폰에도 담겼다.
굳이 우리 일행이 아니어도 한국인들이 꽤 있는 걸로 보면 튀르키예가 한국인들에게 인기 여행지인가 보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몰랐다. 그랜드 바자르에서 만난 다른 패키지 일행들을 또 다른 여행지, 생각지도 못한 다른 장소에서 여러 번 마주칠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