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비행기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내렸지만 현지 시간에 생체 리듬을 맞춰야 하니 두 번째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마치 종로에서 걷다 보면 광화문 광장을 만나는 것처럼 저녁식사를 하러 가는 길에 무심한 듯 히포드롬 광장이 나타났다.
술탄 아흐메트 광장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3세기 초에 건설된 원형 경기장 터다. 영화 ‘벤허’에서 전차 경주 장면의 배경이 된 곳이다. 정작 나는 TV 영화채널에서도 수없이 방영해 주는 그 영화를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여러 차례 아픈 역사를 겪어내며 유적의 대부분이 파괴된 비운의 광장이기도 하다.
히포드롬 광장을 가운데 두고 비잔틴 제국의 기독교 문명의 상징 아야 소피아 성당과 오스만 제국의 위상을 대변하는 블루 모스크(술탄 아흐메트 사원)가 마주 보고 있어 매우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언뜻 봤을 때는 어디가 성당이고 어디가 이슬람 사원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둘 다 돔 모양의 천장과 첨탑을 가지고 있고 둘 다 상상 이상으로 아름답다. 특히 해가 지면서 주변이 어두워지고, 은은한 조명이 점점 밝아질수록 이곳의 신비로운 분위기는 한층 고조된다.
19세기말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압둘 하미드에게 선사했다는 독일 분수 앞에 서서 히포드롬 광장과 거기 우뚝 솟은 오벨리스크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15분가량 주어진 자유시간 동안 기원전 15세기경 이집트의 신전에서 가져왔다는 오벨리스크와 목이 없는 뱀 두 마리가 똬리를 틀고 올라가는 형태의 청동 뱀기둥, 그리고 그 뒤에 또 다른 오벨리스크를 구경했다.
오벨리스크 상단부에는 상형문자들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상형문자는 유프라테스강을 점령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몇 개 되지 않는 문자가 그렇게 엄청난 역사를 담고 있다는 사실도 신비로움을 한층 배가시켜 주었다. 오벨리스크 뒤로 캄캄한 파란 하늘에 마치 타투로 새긴 것 같은 초승달이 박혀 있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짙어지는 파란색이, 까마득한 우주에서 내려다보는 이 광장의 모습은 어떨지 궁금증을 일게 했다.
조명이 들어와 오렌지와 핑크가 오묘하게 섞인 듯한 빛을 발하는 블루모스크는 밤에 보는 롯데월드 매직 아일랜드 같다며 농담처럼 얘기했다. 떠올릴 수 있는 레퍼런스가 그것밖에 없는 내 얕고 좁은 경험이 안타까웠다. 어떻게 사진을 찍어도 내 눈에 들어오는 그 신비스러운 빛과 스마트폰 갤러리에 저장되는 빛이 달라서 다시 한번 안타까웠다.
오벨리스크와 블루모스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다시 일행에게 합류했다. 히포드롬 광장을 뒤로하고 왼쪽으로 꺾어 좁은 내리막길을 한 줄 서기로 걸어갔다. 다채로운 불빛을 내뿜는 한 번쯤 들어가 보고 싶은 가게들을 지나고 한적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한글이 적힌 식당과 기념품 가게 몇 개를 지나고 나니 우리가 저녁 식사를 할 식당이 나왔다. 튀르키예식 피자인 피데가 튀르키예에서 먹게 된 첫 현지식이었다. 피자라니 아이들도 우리도 큰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미리 예약해 둔 곳이라 자리에 앉자마자 샐러드와 수프, 식전빵이 착착 세팅되기 시작했다. 녹두를 갈아놓은 듯한 식감에 살짝 시큼함이 느껴지는 수프는 쌀쌀한 바깥 기온에 굳어있던 속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식전빵이 너무 촉촉하고 부드럽고 맛있어서 그냥도 먹고 수프에 찍어서도 먹었는데, 이런 빵을 튀르키예에서 식사할 때마다 매번 먹을 수 있었다. 특별한 맛은 없는 그 빵은 마치 우리가 주식으로 먹는 쌀밥과도 같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매번 당연한 듯 세팅되던 그 빵이 조금 그립다.
빵과 수프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나자 피데가 나왔다. 튀르키예식 피자라고 했지만 일반 피자와는 생김새도 맛도 많이 다르다. 동그란 피자와 달리 피데는 둥글 길쭉한 타원형에 치즈피자 같은 모양새였다. 아마도 고기나 야채가 전혀 토핑 되어 있지 않은 걸로 봐서는 기본 피데였을텐데 당시엔 그런 사실도 몰랐고, 알았다 한들 메뉴를 선택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주는 대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당 한 덩이씩 서빙된 피데를 깔끔하게 해치운 우리 가족과는 달리 다 먹지 못하고 남긴 테이블도 제법 있었다.
우리 옆 테이블은 부모님과 20대의 딸 가족이 앉았다. 셋의 대화가 우연히 들렸으나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외국어이긴 한데 영어는 아닌듯했고, 억양이나 자주 들리는 발음이 러시아어인가 해서 남편에게 입모양으로 ‘러시아?’라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대학 때 러시아어를 전공한 남편이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식사 후 남편과 아이들이 화장실에 간 사이 옆 가족의 대화가 계속해서 들려와서 호기심을 참지 못한 나는 결국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혹시 어느 나라 말이에요?”
“아, 러시아 말이에요.”
식사를 마친 후 다시 버스가 있는 곳으로 한 줄 서기로 걸어갔다. 1년 전 자유여행으로 갔던 오사카에서는 밤에 숙소로 돌아갈 때마다 전철을 타는 그 시간이 피곤하고 막막했었다. 어디에 있든 전철역을 찾아가야 했고, 전철역에서 내리면 또다시 숙소로 걸어가야 했었다. 패키지여행은 이런 점이 정말 편하구나. 우리가 어디에 있든 버스가 기다리고 있고, 숙소가 어디에 예약되어 있든 버스가 그 앞에 내려준다. 전철 노선도를 공부할 필요도 우버를 켤 필요도 없다는 것이 이렇게 편리한 일인 줄은 패키지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몰랐겠지.
이 경험 때문에 이후에 자유여행을 하게 되면 오히려 불편하고 번거롭게 느껴지려나. 모르겠다. 다만 그냥 지금의 편함과 미친 듯이 몰려오는 졸음과 피곤함을 잠시 떨쳐낼 수 있는 버스 이동 시간을 누리기로 했다. 여행하는 동안 묵게 될 숙소에 대한 기대치를 끌어올린 첫날의 호텔까지도 모든 게 적당하게 만족스러운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