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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현 Jul 16. 2024

11. 피에로티 언덕에서의 티타임


알람이 울린다.

4시 30분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인지하기까지 몇 초간의 시간이 걸린다.




아, 튀르키예지.

낯선 잠자리, 낯선 공기.

어제의 기억을 잠시 더듬어본다.




6시 30분에 식사를 하고 7시 30분에 버스에 탑승하는 일정이라고 했다.

그 일정을 위해 나는 식사 시간 두 시간 전에 일어나려고 알람을 맞춰둔 것이다.

책을 읽고 필사를 해야 하는 이 눈물 나게 성실한 루틴.




집에서 가져온 믹스커피가 동행하니 어디서나 집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는 거짓말이고

불을 다 켤 수가 없어서 어둠 속에서 한 글자 한 글자 힘들게 짚어가며 읽고 썼다.




둘째는 피곤했는지 작게 코를 골았다. 문득 낯선 곳에서 잘도 자는 아이가 사랑스러워 보였다.

5시 30분이 되자 호텔 전화기로 알람이 왔다. 아이가 깰 까봐 얼른 받아서 끊었는데 마치 안 자고 있었던 것처럼 둘째 아이가 벌떡 일어났다.




몸단장부터 마친 후,

짐정리를 하기 시작하자 후회가 밀려왔다. 널브러진 짐들을 한데 모아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파우치 하나는 지퍼가 고장 나 버려서 씨름을 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어제 정리를 좀 해두고 잤어야 했나 보다.

내가 짐과 싸우느라 시간이 지체되니 이미 준비가 끝난 아이가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6시 20분이야"

"응. 금방 할 거야."

"아, 6시 30분이잖아."

"이제 가면 돼."

"아니, 끝났잖아."

“뭐가?”     



식사 시간을 착각한 아이가 아침을 못 먹게 되었다며 엄마를 들들 볶아댄 것이다. 일정을 다시 알려주면서도 웃음이 났다. 아이도 단체 여행이라 시간을 지키는 것에 신경이 곤두서있었나 보다.     




6시 30분에 아침 식사라니.

집에서는 상상도 못 할 시간이다.




익숙한 음식은 삶은 계란 하나뿐. 빵과 이름도 모르는 각종 치즈, 다양한 쨈들이 이름표도 달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들이지만 오늘 하루 일정을 위해 든든히 먹어두었다.

커피를 내려 마시고 마무리를 한 뒤 방에 올라가 짐을 들고 다시 내려왔다.      









첫 번째 일정은 피에로티 언덕.

버스는 러시아워에 동참했다.

서울 시내 출근길을 경험한 지 오래되어서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스탄불의 출근길 막힘이 서울보다 덜할 것 같지는 않았다.




도심 한복판을 지나면서 보이는 성벽과 이슬람 사원의 첨탑, 언덕 위로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풍경이 낯설었다.

피에로티 언덕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이른 시간에 가지 않으면 관광객이 많아져서 오랫동안 줄을 서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새벽부터 일어나 서둘러 갔건만 우리 앞에 이미 인도네시아 패키지 여행객들을 태운 버스가 먼저 도착해서 주차 중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케이블카 타는 곳으로 걸어가는 동안 찬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바람이 많이 불기 때문에 체감온도가 낮다고 했던 여행 후기 글이 떠올랐다.

어제 더워했던 둘째한테 얇은 옷을 입힌 것이 살짝 후회되었지만, 어쩌랴. 이미 캐리어는 버스 짐칸에 들어가 버렸고, 오늘 하루는 이대로 버텨야 한다. 다행히 아이들의 높은 텐션이 체감온도를 이기는 듯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묘지가 보였다. 튀르키예는 화장문화가 없고 매장 문화라는데 땅덩이가 넓고 남아도는 땅이 많으니 가능한 장례문화라고 한다. 돌로 침대 모양 테두리를 쌓은 무덤은 마치 싱글 침대와 더블 침대들이 누워있는 모양새다. 사이사이 요람처럼 작은 사이즈의 무덤도 보였다. 나이를 불문하고 찾아오는 죽음은 이국의 땅에서도 피해 갈 수 없는 숙명인가 보다.







언덕에 오르니 이스탄불과 그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흑해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진과 영상으로 볼 때는 이국적인 전경 그 자체였는데, 날씨가 흐려서인지 내가 그곳에 있어서인지 사원의 첨탑이 아니었더라면 이국의 낯선 도시라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래도 내가 낯선 땅을 밟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기에 열심히 사진을 찍어댔다.







독사진과 가족사진 아이들 사진까지 찍고 난 후 카페 아래에 자리 잡은 야외 테이블에서 홍차와 애플티, 커피를 주문했다.  아침의 쌀쌀함을 녹여주는 따뜻함이었다.

가이드가 대신해서 주문을 받고 금액까지 계산해 주었다.




패키지여행에서는 여기서는 뭘 먹어야 하는지 이 순간에 무슨 말로 주문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메뉴 추천부터 주문까지 알아서 해주니 편안한 맘으로 즐기면 된다. 당황스러움을 즐기진 않지만 모든 게 수월한 여행의 과정이 편리한 한편 묘하게 아쉬운 마음도 든다.     






차를 마시며 이스탄불의 모닝뷰를 즐긴 후 화장실에 다녀오려고 카페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갔다. 그 옆으로 작은 기념품 가게가 있었는데 일행 한 분이 기념품을 사고 계셨다. 뭘 사고 있나 슬쩍 들여다보니 사장님이 선물이라며 터키 전통 문양인 악마의 눈 펜던트가 달린 옷핀 하나를 건네주었다.







마그넷부터 스카프까지 다양한 물건이 있었고, 그중 꽤 맘에 드는 것도 있었지만, 첫날부터 뭔가를 사기가 조심스러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좋은(질이나 가격면에서) 기념품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다른 일행이 산 스카프는 두고두고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다.




살까 말까 고민만 하다 내려가자 일행들은 모두 일어나 케이블카 타는 곳으로 이동 중이었다. 조금 더 앉아서 여유를 부리고 싶었다. 이동한 시간을 생각했을 때 언덕에서의 시간은 지나치게 짧게 느껴졌다. 하지만 자유여행이 아니지 않은가. 아쉬운 마음은 조금 내려놓고 짧게 누리고 단호하게 일어서는 결단력을 배우는 중이라 여기기로 했다.








언덕을 내려가는 케이블카에는 다른 일행이 동승했는데 까만 롱패딩에 까만 모자를 쓰고 까만 선글라스를 쓰신 멋쟁이셨다. 튀르키예를 열 번도 넘게 오셨는데 이번에 또 오게 되었다고 했다.

친구분과 함께 오신 거냐고 물었다. 사실 질문의 요지는 나이가 같은 친구와 왔냐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아닌 친한 지인과 온 것이냐는 뜻이었는데, 전달이 잘못되어 '같이 온 그 분과는 나이가 같은 친구세요?'라는 의미로 전달되고 말았다.




이미 다른 일행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며 나이 차이가 꽤 난다는 '그 언니'분은 졸지에 내 덕에 커피 스무 잔의 빚이 생겨버렸다. 좋은 얘기 들었으니 커피를 사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멋쟁이 일행분은 튀르키예 여행 선배로서의 느긋함으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하는 곳이 있냐고 물었다. 나는 카파도키아에서의 벌룬 투어가 가장 기대된다며, 한편으론 못 탈까 봐 걱정이 된다고 했다. 가이드는 카파도키아 벌룬투어보다 파묵칼레에서의 벌룬투어를 추천했는데, 여태껏 날씨 때문에 한 번도 카파도키아에서 벌룬을 탄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바람이 조금이라도 부는 날엔 벌룬이 뜨지 못한다. 벌룬이 뜰 수 있는지의 여부는 투어업체가 아닌 나라에서 결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벌룬 업체에서 띄우고 싶다고 해서 띄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결국 날씨 운이 무지하게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카파도키아에서 벌룬을 타려면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말도 있다.




대신 파묵칼레는 대부분 날씨가 좋아서 벌룬이 뜰 수 있는 날이 많단다. 물론 벌룬의 수는 카파도키아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한꺼번에 떴을 때 훨씬 더 예쁘지만 파묵칼레의 벌룬에서 보는 일출도 그에 못지않다며, 혹시라도 카파도키아에서 벌룬을 타지 못해 실망할 여행객들을 미리 위로했다.




하지만 열 번 도 넘게 튀르키예에 오신 분은 단 한 번도 벌룬이 뜨지 않은 적이 없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심지어 이번에는 안 떴으면 좋겠다 싶었던 날도 떴다면서. 그분을 날씨 요정이라 믿기로 했다. 우리의 벌룬은 뜰 것이다, 내 의지로 뜰 수 있는 게 아닐 테지만 자기 암시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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