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장소에 가면 평소에는 의식도 못했던 예전 기억들이 어디서 튀어나오는지 모르게 갑자기 떠올라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을 때가 있다. 옛날에 만났던 남자친구 A와는 지하철에서 사소한 다툼으로 시작했다가 이름도 모르고 어딘지도 모르는 지하철 역에서 내려 서로 한참을 대치하다, 둘 다 울고 불고, 거의 둘이서 한 편의 드라마를 찍은 적이 있다. 눈가에 소금이 자글자글할 정도로 혼이 빠지게 울었던 것 같다. 그날 이후로 그날 그 역의 공기, 해가 저물어가면서 비추던 햇빛, 몇 개의 열차가 들어오고 나가고 그때마다 찾아오던 둘 사이의 적막함은 피부가 기억을 하고 있는지, 그 역을 지날 때면 그 잔상이 물 밀듯이 밀려온다. 처음에는 그곳을 지나가기만 해도 마음이 아리고 울적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점차 희미해져서 이제는 정말 미세한 느낌 정도만 난다. 기억에 촉감이 있다면 그 촉감이 살짝 팔을 스치고 가는 정도라고나 할까. 그 역 이름도 이젠 기억이 안 나는데, 예전에 잠시 열차가 정차할 때 나를 둘러싼 것들이 묘하게 기분을 이상하게 하길래 두리번거려 보니 그곳이었다. 인간의 뇌는 보고 듣고 겪은 모든 정보를 저장해 둬서, 우리가 그 기억을 잊을 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정말 맞았다. 그렇게 우리의 기억이 각인되어있는 장소가 있는데, 때론 그게 음악이, 물건이 될 때가 있다. 원곡자가 버젓이 있는데, 나에게만큼은 그 노래의 주인이 따로 있는 그런 노래들이 있고, 남들이 보기엔 그냥 샤프 한 자루일 뿐인데 나에겐 사연이 얽혀있어 아직까지도 고장 날까 봐 소중하게 다루는 것이 있다.
내가 만든 행복의 루틴은 이런 뇌의 탁월한 기억 저장 능력을 이용한 것이다. 도무지 내 힘으로는 내 기분을 띄워줄 수 없을 때, 날 저절로 기분 좋게 만들어줄 장소를 가거나, 노래를 듣거나, 물건을 사곤 한다. 마음이 따뜻해졌던 하루를 보내 일기장에 꾹꾹 적어내렸던 그날의 동네를 가거나, 오랜 비행 끝에 지구 반대편에 막 도착해서 본격적인 여행의 시작에 설레던 마음을 안고 런던 시내로 들어가던 차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를 듣거나 또 아무 사연도 이유도 없는데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들까지. 물론 백이면 백 그 루틴이 잘 먹히는 건 아니지만,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때의 행복이 저절로 몸 구석구석을 채우는 원리다.
행복의 원천이 너무 관계에 편향되어 있는 순간, 조그만 외부의 바람에도 크게 흔들리고 또다시 사람을 찾는 수렁에 빠진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이라는 성경의 구절처럼, 좋다가도 나빠지는 게 관계고 내 편이다 가도 적이 되는 게 사람이다. 한 때 나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그다음 날엔 평생 연락도 할 수 없는 남남이 되기도 한다. 그런 약한 인간인 우리를 우리는 서로 보듬어주어야 할 뿐, 내 마음과 같을 것이고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온전히 믿는 건 어리석다. 내 행복이 그렇게 가변적인 존재의 손에 쥐어져 있으면 행복은 있다가도 없는 신기루가 될게 뻔하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행복을 좀 더 변하지 않는 것에 걸어야 한다. 세월이 지나 조금씩 변하더라도 사라지지는 무언가에. 그런 행복의 원천은 대단한 성공과 성취감이 될 수도 있지만, 나는 좀 더 매일매일을 행복하게 해주는 작은 것들을 수집해가고 있다. 퇴근하고 따릉이를 타고 신나게 달리고 집에 와서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자기 전에 신중하게 고른 예쁜 컵에 신중하게 고른 티백을 우린 차를 마시면서 라디오를 듣는 것처럼 대단하지 않지만 나를 행복하게 해 줬던 순간들을 수집한다. 난 이걸 하면 행복한 사람이구나, 기억해 두면서, 울적한 순간이 오면 숨겨놓은 과자를 하나씩 까서 먹듯이 해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