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카페가 있다. 언덕을 오르면 가장 위에 있는 작은 카페. 특히 밤이 예쁜 곳인데, 어둑어둑한 공간을 테이블마다 있는 무드등들과 카운터 쪽 호롱불 하나로 밝혀 절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벽은 손이 빌래야 빌 수 없을 정도로 손 때 묻은 낡은 책들로 가득 차 있고 창 너머로 아득하게 한강이 보이는 곳. 이 날도 밤에 가야지, 하고 있다가 시간이 어찌저찌 틀어져 낮에 가게 되었다. '좋아하는 카페라면 무릇 모든 시간대에 가봐야지!'
쨍한 햇살에 쨍하게 빨간 5월의 장미가 더 탐스럽게 흔들리는 오후였다. 며칠간 낮에는 30도를 웃돌 정도로 덥다고 했는데, 낮에 집 밖을 제대로 나온 건 근래에 들어 처음이라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여름을 몸으로 느꼈다. 장미 넝쿨들이 늘어져 있는 언덕을 올라 도착한 카페에는 다행히 손님이 별로 없었다. 문을 열자마자 기분 좋게 느껴지는 약한 에어컨 바람. 이 정도면 가디건도 안 입어도 되겠다. 가장 안쪽 창밖이 잘 보이는 자리에 짐을 두고 주문을 하러 갔다.
"아이스 초코 하나 주세요."
"저희 아이스 초코 정말 맛 없는데.."
"네????"
"ㅎㅎ진짜 빼고 싶은 메뉴인데..맛 없어요 정말로ㅎㅎ"
"?????"
세상에 이렇게 솔직하실 수가. 사장님이 주문을 말리시는 곳은 처음인데. 잠시 귀를 의심했다가 눈이 동그래진 나를 보고 쾌활하게 웃으시는 사장님을 따라 같이 웃었다.
"그러면 혹시 추천해주실 메뉴 있나요?"
"저희 티가 괜찮아요. 블랜딩 티라. 이렇게 3개인데 이건 페퍼민트에 시럽, 꿀 살짝이고 이건 꽃차에 자몽 주스 살짝, 이건 딸기차에 자몽 주스 살짝이에요. '여름, 민트' 이게 요즘 제일 잘 나가요^^"
"음..저 그러면 '여름, 민트' 이거 주세요!"
'여름, 민트' 이름도 아주 딱이다. 마치 오늘에서야 여름을 온몸으로 맞은 나를 위한 맞춤 메뉴. 시원한 페퍼민트향에 뒷맛은 시럽과 꿀로 살짝 잡아 텁텁하지 않고 깔끔하게 달았다. 입을 벌려 선풍기 앞에 갖다댄 것 같은 맛. 정말 여름의 맛이었다. 카페에선 통기타를 퉁퉁 튕기면서 부르는 산뜻한 노래들이 잔잔하게 나왔다. 그 순간 공기를 가득 매운 여름이 나를 꽉 안으며 환영하는 것만 같았다. "어서와 이제 여름이야!" 올해 나의 여름은 오늘부터구나.
가져온 할 일들을 가방에서 꺼내놨지만 더 만끽하고 싶어서 한동안 턱을 괴고 가만히 멍을 때렸다. 계절의 시작을 느낀 순간에 잠시 멈춰 이 기분을 꼭꼭 씹고 가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왠지 올해 여름이 그 기운을 받아 더 멋져질 것 같았다. 여름에 대한 설렘이 뭉게구름처럼 둥실둥실 떠올랐다. 한모금 마시고 다시 멍. 살갗을 부드럽게 훑는 선선한 에어컨 바람. 언덕의 구비구비마다 있는 주택과 빌라들, 멀리 보이는 한강과 한강다리, 그리고 언덕 가장 위에 있는 이 자그마한 공간. 거짓말을 못하는 사장님의 탁월했던 추천 메뉴와 입 안 구석 구석을 맴도는 박하향까지. 초여름의 문턱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앞으로 매년 여름이 다가올 때쯤엔 이 날이 간혹 생각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