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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연 Apr 11. 2023

나의 애완 카메라


길을 가다가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고 싶다면 좋은 팁이 있다. 종류가 무엇이든 이목을 끄는 무언가를 밖으로 내놓고 다니면 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애완동물이겠다. 미국에서는 고전으로, 새로운 이성을 만나려면 센트럴파크에서 강아지 산책을 시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길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지는 않은 무언가, 그게 귀엽다면 더 성공적일 테고. 자그마한 털뭉치같은 강아지들이 폴짝폴짝 뛰어다니거나 쫄랑쫄랑 걸으면 멀리서부터 시선 집중이다. 

애석하게도 나는 강아지를 키우지 않지만, 그만큼 사람들이 한번씩 눈길을 주는 것이 있다. 내 카메라다. 흔히 대포카메라로 불리는 초망원렌즈까진 아니지만, 광각부터 망원까지 가능해 겉으로 봤을 땐 꽤 많이 툭 튀어나와있는 줌렌즈가 시선 집중에 한 몫을 한다. 흡사 화보 촬영에서나 들릴 법한 프로페셔널하고 경쾌한 '철컥철컥' 셔터음까지. 

100장을 찍으면 5장 건질까 말까하는 나의 비루한 사진 실력은 아무도 모르겠지만, 카메라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저 사람 사진 찍는 사람인가?' 오해하는 것 같다. 골똘히 카메라를 보다가 한 쪽 눈은 찡그린 채로 눈을 뷰파인더에 갖다대고 왼손으로 길다란 렌즈를 돌리다보면 나조차도 내가 사진 작가, 때론 파파라치가 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나의 이 애완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 종종 먼저 말을 거시는 분들이 있다.


이름도 예쁜 라일락을 찍고 있을 때다. 보라빛 물감 한방울 톡 떨어트린듯한 연보라색 라일락을 찍고 있었다. "꽃 찍어요? 예쁜 꽃 찍으시네~" 하늘색 조끼에 밀짚모자를 쓴 아저씨가 말을 거셨다. 작은 로터리에 지나다니는 차량이 별로 없어 잠시 여유를 즐기고 계시는 교통 정리 요원이셨다. 걷다가 너무 예뻐서 잠깐 멈췄다고 대답했다. "근데 그 꽃은 뭐예요?" 비슷하게 생긴 꽃들이 워낙 많으니 괜히 아저씨에게 잘못 알려드릴까봐 잘 모르겠는데 라일락 같다고 말씀드렸다. "네이버 어플로 이거 찍어보면 알 수 있다던데. 내가 이따 한번 해봐야겠다." 빙긋 웃으며 인사드리고 다시 가던 길을 갔다. 

어른들은 참 말을 자연스럽게도 잘 거신단 말이지, 생각하며 몇 보를 걸었을까, 뒤에서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의 덩어리처럼 웅웅 뭉쳐진 소리를 잘 뜯어 들어보니 "꽃 이름 라일락이래요!!" 나에게 하는 소리였다. 얼른 뒤를 도니 아저씨가 빨간 봉을 흔들며 "지나가는 분이 알려줬어 라일락이래요!" 외치고 계셨다. 목에 힘을 주고 아저씨의 데시벨에 맞춰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외쳤다. 

친절하셔라, 생각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카메라를 손에 쥔 채 한바퀴를 빙 둘러보고 다시 그 로터리로 가니 조금 전보다 차량이 더 많아져 아저씨는 빨간봉을 현란하게 휘두르고 있었다.



한번은 친구와 전시를 보고 주변 골목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근처에 회현시민아파트라고 '스위트홈' 등 가끔 영화촬영지로 쓰일 정도로 아주 오래된 아파트가 있으니 가보자는 친구의 말에 구불구불한 언덕을 올랐다.

작은 야외 주차장 너머로 보이는 아파트가 한 눈에 봐도 이곳이구나, 할 정도로 이질적이게 낡았다. 주차장 난간에 서서 카메라로 낡은 벽돌과 배관을 훑었다. 

"사진 작가예유?"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주차장 안으로 걸어들어올 때부터 우릴 유심히 보시던 아저씨다. 사진 작가라는 말이 너무 거대해 괜히 부끄러워져 황급히 아니라고 대답했다. 취미예요 취미. "카메라 엄청 좋아보이는데? 비싸보여" 장비만 좋아요, 부끄럽게 웃었다.

아저씨는 주차장 옆 작은 건물의 주인이신지 회현시민아파트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를 읊어주시더니 건물 안으로 들어오라며 여기서도 한번 찍어보라고 손수 촬영 스팟까지 추천해주셨다. 이제 막 완공된듯해 문도 제대로 없는 건물 안에서 바라본 아파트 풍경은 사실 그닥 좋지 않았지만 아저씨의 성의가 감사해 연신 "오" 하며 몇 컷 찍었다. 

아저씨는 카메라 가격에 놀란 표정을 짓다가도 열심히 대답하는 나를 딸 보는 듯한 눈빛으로 보며 흐뭇한 웃음을 보이시기도 했다. 무섭게 생기셨는데 눈빛이 참 따뜻하다, 생각하며 더 열심히 대답해드렸다. 바로 옆에 공원은 이 동네에서 제일 예쁜 곳이니 꼭 가보라는 아저씨에게 꾸벅 인사를 드리고 왔다.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 아주 가끔 나에게 길을 물어보는 사람이 다가올 때 외에는 길에서 스치는 사람들과 대화할 일이 거의 없다. 대게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혼자 나가면 자연스럽게 묵언수행을 하는 날들이 다반사다. 

그래서 카메라를 통해 거리에서 낯선 사람들과 종종 나누게 되는 이런 스몰톡들이 반갑다. 구태여 서로의 인적사항까지 밝히지 않는 대화들. 그저 '이거 뭐예요' '사진 찍기 딱 좋은 날씨네요' '저기 내려가면 길 예뻐요', 등등 서로 뉘신지 모르고 또 곧 잊혀지겠지만 잠시 나누는 대화들. 부먹처럼 흥건하게 젖어드는 대화가 아니라 가볍게 찍먹하고 마는 대화들. '얘 몇살이에요?' '종이 뭐예요?' '너무 귀여워요' 의 대화를 할 수 있는 강아지도 있으면 더 좋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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