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유럽여행을 하려고 샀던 배낭을 꺼내 든다. 언제라도 돌아가고 싶으면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해가 드는 창을 오진우가 올려다본다. 이제 곧 여름이 오겠지만 아직은 추웠다. 첫 번째 목적지만 생각해야지 그리고 그다음은 생각해야 할 때 고민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계획을 세우고 지키면서 유동성 있게 움직이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었지만 이번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계획을 세울 의지도 없었지만 의미도 찾지 못했다. 간단한 짐을 꾸리고 목적지를 향해서 자동차를 운전한다.
해변 끝에 편의점이 보였고 컵라면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스타그램에 본 숙소는 생각보다 좁았지만 알차다. 숙소 앞 주차장에 자동차는 오진우가 타고 온 차를 포함해 두 대 밖에 없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건물 앞에는 금색으로만든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주인은 데스크에 없는 듯했고 오진우는 잠시 외출 중이라는 안내판에 적힌 전화번호를 눌렀다. 벨소리와 주인이 함께 나온다.
혼자세요?
네
저희 집은 4층이 뷰가 좋아요. 4층으로 결정하시겠어요?
현금으로 결제하면 가격 차이가 있나요?
얼핏 현금으로 계산하면 더 싸게 해 준다는 게시물을 본 것이 기억나 현금을 편의점에 들어가 찾아왔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현금으로 결제한 덕에 사이트 가격보다 이만 원이나 절약했다. 어쨌든 오늘 손님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컵라면 물을 커피포트에 넣고 끓인다. 커피포트가 끓는 소리를 방금 듣고 있었던것 같은데 먹고 싶었던 라면이 식은 채로 창 앞에 있다. 먹고 싶었지만 따뜻한 곳에 들어와서 앉으니 생각에 잠겼고 오진우는 불은 라면과 바깥의 파도를 번갈아 보면서 이걸 버려야 할지 먹어야 할지를 고민한다.
지잉 문자가 온다. 숙소 사장님이 숙소에서 가까운 맛집 리스트를 보내주셨다. 햄버거, 육회, 칼국수 등 여러 가지 메뉴를 추천한다며 좋은 여행이 되었으면 한다는 인사말도 잊지 않고 적혀 있다. 강원도에 오래 있으라는 말인가. 스마트폰을 본 김에 밀린 톡을 확인한다. 친구와 가족 그리고 회사 사람들이 각자 위로의 말을 남겼다. 고생했다는 말이 제일 많다.
주인아저씨의 말이 맞았다. 뷰가 괜찮은 편이었다. 앞에 작은 건물 뒤로는 전부 바다였다. 하늘과 닿은 새파란 바다를 하염없이 본다. 낮에서 밤으로 갈수록 수평선의 경계는 선명해졌다. 바다는 차갑게 파랬고 하늘은 어쩐지 바다보다는 덜 파랬다. 가로등이 들어오는 시간에도 수평선 뒤의 하늘과 그 위의 하늘이 다른 레이어처럼 보였다. 순간 경계들이 사라졌다. 부단히 지속했던 일을 멈췄다. 아무것도 더 이상 중요하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밝은 것은 이제 가로등이다. 사람과 사람이 맞지 않아서 생기는 일 말고도 부당하고 불편한 일이 있었다. 불편함의 강도는 계속 수위를 높였고 계획되어 있는 것처럼 속도를 올려 밀어붙였다. 잘못되었다고 먼저 말하는 사람이 술래 될 것이 뻔했다. 영리하지 못하게 입 밖으로 그 말을 내놓고 말았다. 정해진 순서가 있는 것처럼 일을 멈추게 된 것이 순조로웠다.
언제부터인가 죽도해변을 시작으로 강원도로 와서 사람들이 서핑을 하기 시작했다. 주중에 지친 직장인이 주말에 양양으로 향하는 일이 문화처럼 이어졌다. 처음에는 서퍼 숍이 한 곳뿐이었겠지만 지금 강원도에는 서퍼 숍이 아주 많다. 서울-양양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조금 더 일반화된 현상이 아닌가 오진우는 생각한다.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 몇 퍼센트 정도가 주말에 서핑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할부금을 갚고 야근 스트레스를 잊고 양양으로 향할 마음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몇이나 될까. 그래서인지 서핑은 젊은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하는 듯 보였다. 빈 바다를 보면서 파도가 오길 기다리는 젊은 서퍼들을 잠깐 생각했다. 주중과 주말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오진우는 부러웠다. 현실로 돌아가는 피로감을 견디고 다시 일상에 충실할 자신이 없었다. 젊다는 것이 어떤 것이지도 헷갈린다. 생각이나 의지에 관한 것인지 살아온 시간에 관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젊음을 팔아서 최저임금 비슷하게 받는 것이 지켜야 하는 일인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물가가 오르는 것에 비해 급여가 오르지 않는 것은 미래에 대한 생각을 멈추게 했다. 제자리걸음 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뒷걸음이었다. 돌아오는 카드값이 언제나 있듯이 소비는 서핑 쪽으로 돌리면 될 일이었지만 지긋한 현실을 분리시킬 자신이 없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곳에 다시 가지 않기 위해서 그 진창에서 언제나 서 있었다. 막상 이 바다에 있으니 생각이 더 복잡해지는 것 같다. 파도가 일이 된다면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오진우는 상상할 수 없었다.
깊은 잠에 들었던 모양이다. 꿈도 꾸지 않았다. 여기까지 오도록 이끌었던 일은 꿈꾸는 시간 속에도 들어와 있었다. 일을 끝낸 것이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 건지 가지고 있었던 프로젝트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참. 나 퇴사했지. 오진우의 일이 아닌대도 가속도가 붙은 정보는 멈추질 않았다. 생각이 멈추는 제동거리가 어느 정도 일지는 지나고 보면 알게 될 일이었다.
동기들을 만나면 우리가 이 일을 얼마나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말했다. 내일 일을 그만둔다는 친구부터 그만두고 싶은데 당장 뭘 해야 할지 모른다는 동기 등 다양한 의견이 있었지만 오래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결론은 같았다. 업무량에 비해 급여가 너무 적고, 작은 회사들은 대부분 야근비는커녕 점심식대도 제공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한탄을 했다. 오진우는 이제 한탄을 이어갈 대상이 사라졌다.
억울하고 화가 났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멍하게 창 밖에 바다만 보고 있었다. 원래는 세상이 돌아가는 게 이런 식인데 몰랐던 건가 오진우는 생각한다. 처음 억울함을 이야기했던 선배들의 반응은 하나 같았다. ‘나도, 사실은 그런 적이 있어.' ‘이번만 버티면 또 지나가’였다. 오진우의 이야기를 듣고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놀란 기색이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오진우를 혼란스럽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