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꿈이 다이어리 3 - 출생신고 편
우리 어머니는 유난히도 아이들을 좋아하는 분이다. 어떤 장소에서든 어린아이만 보면 항상 먼저 말을 거시곤 했다. 그리고 아이들 쪽에서도 어머니를 곧잘 따르는 편이었다. 애들은 자신을 예뻐해주는 사람을 용하게 알아보는 법이니까.
"애를 너무 좋아하면, 손주가 늦는다는데…."
친구 분들로부터 자주 들으셨다는 그 말씀처럼, 어머니는 유독 손주복이 없으셨다.
큰누나는 일과 결혼한 골드미스인데다 장남이자 막내인 나도 마흔이 넘도록 싱글이었고, 우리 삼남매 중 유일하게 적령기에 결혼한 작은 누나마저도 결혼한 지 4년이 지나서야 딸 하나를 얻었으니 말이다.
환갑을 1년 앞둔 2004년에야 처음으로 외손녀를 품에 안아보신 어머니는, 2016년에 첫 친손녀가 태어나기 전까진 유일한 손주인 서연이에게 전폭적인 사랑과 정성을 쏟아부으셨더랬다.
그 덕분에 조카 서연이는 무려 12년 동안이나 우리 집안의 유일한 후손으로서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었지만, 그에 따른 부담감과 외로움 또한 없지 않았을 것이다. (외가 쪽 유일한 사촌인 채연이가 태어났을 때, 서연이는 누구보다 기뻐한 바 있다.)
"나는 네 새끼가 어떨지 참 궁금하다!"
마흔이 넘도록 혼자였던 아들에게도 결혼 독촉을 별로 안 하시는 편이었던 어머니도 가끔씩은 그렇게 친손주 욕심을 내비치기도 하셨다.
그러다 정말 우리 부부가 임신 소식을 전했을 때,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첫 친손주였던 만큼, 어머니는 해꿈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무던히도 공을 많이 들이셨다.
해꿈이가 예정일보다 50일 정도 빨리 태어나는 바람에 모두가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어머니는 대구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작명가를 찾아가 해꿈이 이름 짓기를 의뢰하셨다.
그 작명가는 사주도 보는 분이라, 해꿈이의 사주 풀이도 들을 수 있었다.
해꿈이가 좀 일찍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날 좋은 시를 골라 태어나서 사주가 아주 좋다고 했다.
오행이 다 들어있고 관도 세개나 들어있는, 한마디로 앞이 훤한 사주라고 한다.
그 의미를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우리 딸이 좋은 사주를 타고났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엄마·아빠의 사주와 아기 사주를 두루 고려하고, 일주일 간의 기도까지 하고나서 짓느라, 이름이 나오기까지 열흘이나 걸렸다고 했다.
그렇게 엄정한 과정을 거쳐 최종 후보에 이름은 총 다섯 개였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그중 3개가 모두 사촌들 이름(서연-고종사촌/다은-외사촌/지유-이종사촌)과 같아서 탈락시킬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 2개인 시은과 채연 중에서, 전 가족 만장일치로 ‘채연’이란 이름이 최종 선택되었다.
采(풍채:채) 姸(고울:연)
사실 처음 이 이름을 들었을 땐, 좀 흔한 이름이 아닌가 싶었는데, 부를수록 잘 지은 것 같다.
특히 피겨퀸 김연아 님의 ‘연’과 같은 연(姸)자가 들어가 있어서 더 마음에 들었다. 혹시 애 아빠가 승냥이 출신이라는 정보가 그 작명가 분 귀에 흘러들어간 게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도 없지 않았지만, 확인된 바는 없다.
여하간에 같은 연(姸)자를 쓰는 만큼 해꿈이, 아니 채연이가 연느님처럼 아름답고 강한 여성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조카 서연이의 연(燕)자와는 한자가 다르긴 하지만,
음으로는 돌림자 같아서 더 맘에 든다.
이름이 결정되자마자, 나는 바로 그날 점심 시간을 이용해 부리나케 동사무소로 가서 출생 신고를 했다.
그런데 갓 업데이트 된 주민등록등본을 받아든 나는 그만 복잡미묘한 감정에 휩싸이고 만다.
내 밑으로 한줄이 더 생긴 걸 보니 마냥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내 가슴팍에 묵직한 묵직한 돌덩이 하나가 올려진 듯 자못 비장해진 나였다.
그 어디에도 속하거나 얶매이지 않은 채 거침없는 절대 자유를 누리며 살아온 나에게 '처'와 '자'라는 관계를 단 부양가족이 생긴 것이었다.
홀가분한 1번으로 살아온 내게, 책임져야 할 2번과 3번이 생겼음을 증명하는 문서를 마주한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어야 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더 신실해지고, 더 치열해지자!'
그렇게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은 후에야, 나는 좀 더 씩씩해진 발걸음으로 진료실로 복귀했다.
[커버 이미지 by Yuganov Konstantin]
http://www.yes24.com/Product/Goods/89479041?scode=032&OzSrank=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