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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월애 Nov 10. 2020

홍길동전을 읽고...

주의 : 글을 읽고 뒷목을 잡을 수도 있음.

2학기가 시작될 즈음, 짱구가 학교에서 독서통장을 받아왔다. 책을 읽고 제목과 느낌을 간단하게 적으면 된다고 했었고, 앞부분에 나온 1학년 권장도서에  읽었던 책을 체크하더니 그동안 읽은 권장도서가 꽤 많다며 뿌듯해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짱구가 독서통장에서 쓴 책은 단 10권!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짱구가 큰일이나 난 듯이 말한다.

엄마! 우리 반 친구 중에 독서통장에 책을 100권 넘게 쓴 애가 있어. 오늘부터 나도 독서통장 써야겠어

그동안 독서통장 써야 하지 않냐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듣는 둥 마는둥하더니 급하긴 급했나 보다. 그리하여 짱구도 매일 밤 하루에 한 권씩 겨우겨우 책을 읽고 등교하는 아침 그렇게 급하고 정신없는 시간에 굳이 독서통장을 쓰겠다고 책상에 앉는다.


그리고 오늘 아침! 전날 홍길동전을 읽은 짱구가 오늘도 변함없이 눈을 비비며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독서통장을 펼친다. 그래도 잠이 안 깨는지 한참을 책과 독서통장을 만지작 거리더니...

엄마! 뭐라고 써야 할지 모르겠어.
네가 읽고 느낀 점을 쓰면 되지.
...

꽤나 긴 내용이라 정리가 안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조금 도와주기로 했다.

홍길동이 어떤 사람이야?
도둑.
(좀 불안하지만 대화를 계속 이어간다) 어떤 도둑?
좋은 도둑.
그럼 홍길동이 왜 도둑이 됐어?

여기까지 리드를 하자 홍길동이 서자이고 호형호제를 하지 못해서 집을 나와 도둑이 되었다는 내용을 기억해 낸다. 그래서....

그렇지. 그럼 책을 읽고 짱구가 느낀 점이 뭐야?

아직도 잘 모르겠는지 한참을 고민하다 생각이 났는지 얼굴을 밝히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도둑은 나쁘니까 좋은 도둑이든 나쁜 도둑이든 되지 말아야겠다.
  

순간 뒷목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홍길동전'이라 하면 조선 중기 허균의 작품으로 홍길동이 홍 판서의 서자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도술을 익히는 등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될 기상을 보였으나 천한 태생이라 하여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제를 형제라 부르지 못한다는 그 유명한 '호형호제'를 하지 못하는 한을 품게 되었고 가족들이 길동의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근이 될까 두려워 길동을 없애려 하자 집을 나서 방랑의 길을 떠나 도적의 두목이 되고 후에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치고 율도국으로 돌아가 나라를 다스린다는 내용으로 사회문제를 다루면서 지배 이념과 지배 질서를 공격하고 비판한 책이며 학교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출제빈도가 꽤 높은 소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유명한 이야기의 느낌을... '도둑이 되지 말자'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하다니...


내 모습을 본 짱구가

엄마! 지금 웃는 거야? 우는 거야?

통곡하는 거다.


우여곡절 끝에 짱구를 학교에 보내고 가만히 아침에 사건을 복기해본다. 그렇다. 문학은 답이 따로 없는데, 100명이 책을 읽으면 100명이 느낀 점이 다 다른 게 맞는 거라고 했는데 내가 너무 학교에서 주입식으로 배운 데로만 아이에게 강요한 것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예전 '소나기'의 저자이신 故 황순원 님이 국어 선생님의 연수에 참여하게 되셨고 마지막에 연수내용으로 시험을 보게 되었을 때 유명한 일화가 있다. 故 황순원 님의 '소나기'로 시험을 봤는데 다른 선생님들은 90점 이상의 높은 점수를 받았는데 정작 저자인 본인은 60점을 받으셨다고, 연수가 끝나고 마지막 연설에서 '내가 저자인데 나도 모르는 저자의 의도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계시냐? 정말 우리나라 국어 선생님들 대단하시다.'라는 웃픈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 국어교육의 문제점과 에세이의 필요성을 침을 튀겨가며 열변을 토했던 나였건만 세월이 흘러 내 아이에게 나도 똑같이 획일화된 답을 요구했던 것은 아닌가 하고 반성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홍길동전을 '도둑이 되지 말아야겠다'로 정의하는 것은 너무한 거 같다.

오늘도 엄마의 한숨은 늘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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