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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힘

by euuna








‘존버’라는 말이 한창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다. ‘될 때까지 버틴다’라는 의미다. 이곳에서 그 단어의 참 의미에 대해 배웠는데, 사실 이건 ‘될 때까지 한다’라는 말이라는 거다. 될 때까지 마냥 손 놓고 기다린다는 말이 아니라는 거. 믿어 의심치 않는 것. 무모할지언정 끝까지 가 보는 것.


각자가 원하는 조건에 맞춰 넷이서 사는 집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방향을 틀어, 기왕 이렇게 된 거 렌트 경험이 있는 나와 서진이 지예와 은선이 렌트할 수 있도록 돕기로 했다. 그렇게 3주가량 매일 인스펙션을 다녔다. 일을 하지 않는 나와 은선은, 서진과 지예를 대신해 인스펙션을 다녀오고 사진과 영상을 남겨 메모장에 정리를 했다. 그리고 단체 톡방에 공유하고 함께 장단점을 따져 보았다. 확실히 하나보단 둘이, 둘보단 셋이, 셋보단 넷이 나았다. 서로의 눈을 통해 더 냉철하고 꼼꼼하게 볼 수 있었다.


집을 보면 볼수록 집을 볼 줄 아는 눈이 생겼다. 동네에서, 건물에서, 엘리베이터에서, 복도에서, 현관에서 눈과 코, 귀로부터 걸러지고 얻어졌다. 흥미로운 일이었다. 부동산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스스럼이 없어졌다. 처음에는 어떤 말을 물어야 할지 몰라, 메모장에 잔뜩 준비해 갔는데 이제는 그런 것 없이도 필요한 이야기만 할 수 있게 됐다. 하나를 묻더라도 또 다른 하나를 알 수 있는 질문들로만 간추려졌다.


- 인스펙션 다녀오고 기록해 둔 메모들



인스펙션의 축복은 끝이 없었다. 하루에 세 곳 이상 예약한 날은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땀을 뻘뻘 내며 돌아다녔다. 커다란 도시 안에서 발품 파는 일은 마냥 쉽지만 않았다, 아직 거리의 이름과 주소에 익숙하지 않아 실수가 잦았다. 예약 시간에 늦기도 하고 끝끝내 길을 찾지 못해 결국 못 본 집도 있었다. 시티 끝과 끝에서 뒤기도 했고, 시티가 아닐 때는3~40분가량 하염없이 트램을 타고 가기도 했다. 어떤 날은 너무 귀찮아 하루빨리 이 생활이 끝나길 바라기도 했다.


마음에 드는 집에 신청서를 보내는 일은 이제 식은 죽 먹기가 되었다. 그 무렵 지예와 은선에게 한 부동산으로부터 연락받았다. 그렇게 지예와 은선은 시티 한중간에 있는 27층 아파트를 구했다. 이들이 원하는 조건에 맞는 곳이었다. 제 일마냥 기뻤다.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 꼭 물어보고 싶은 것만 적어둔 메모



각자 본 집만 해도 스무 곳이 넘었고 헷갈려서 봤던 집을 또 보는 일도 있었다. 몇 번의 의견 충돌에도 목표한 바가 같았으니, 결국엔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지예와 은선의 집이었다. 서진과 나는 여전히 계속해야만 했다. 이제 이전 집 계약 해지 일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정리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 같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계약 해지’였다. 잘 해야만 했다. 렌트는 기록에 남는 일이라, 현재 부동산과 완만히 해결되어야 다음 부동산과의 계약도 수월히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오랜 시간 고민 끝에 편지를 적었고 그동안 우리에게 신경을 많이 써준 부동산 담당자, 산토스에게 감사를 표했다.


지예와 은선의 이삿날. 아침부터 분주했다. 우리 집 거실에는 그동안 조금씩 옮겨둔 지예와 은선의 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작은 집에서 커다란 친구네로 밤낮 없이 움직여가며, 부지런히 짐을 옮겼다. 오늘 다 끝낼 수 있을까 싶었던 여러 박스와 캐리어들이 전부 옮겨졌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출근해야 하는 서진과 지예를 대신해, 은선과 나는 청소를 시작했다. 창틀과 문틀을 닦고 손이 닿는 곳은 수월하게, 닿지 않는 곳은 둘이 힘을 합쳐 치워 나갔다. 곧이어 돌아온 서진과도 합류해 계속해 쓸고 닦았다.



- 마지막 이사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 날 아침. 바닥이 카펫이라 청소가 어렵다는 말에 눈 뜨자마자 청소기를 들고 나섰다. 청소는 신기한 힘이 있다. 청소하고 있다 보면, 왠지 모르게 더 애정이 가게 된다. 공간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청소하는 과정과 같았다. 어딘가를 닦고 치우다 보면, 그렇게 공을 들이다 보면 이제 내 것이 되는 듯했다.


“축하한다! 드디어 홈리스 생활 끝이네!” 내가 말했다.

“고맙다. 너넨 이제 홈리스 생활 시작이네. 좋은 집 찾을 때까지 편하게 있다가 가.” 지예가 말했다.

“잘 부탁한다…” 이제 우리의 차례였다.


계약 해지가 멀지 않은 우리는 이 집의 객식구가 됐다. 갈 곳이 없던 지예에게 집이 생겼고 갈 곳이 있던 나와 서진에겐 집이 사라졌다. 집은 참. 있다가도 없는 것, 없다가도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이럴 때 쓰는 말일까? 흔쾌히 집을 내어준 지예와 은선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 이삿날은 짜장면이지!



넷이서 함께한 2주간의 생활은 무척 재미있었다. 나와 서진은 거실에서 생활했다. 소파에 자리를 펼쳐 두고 지냈는데, 키가 큰 서진은 아래에 매트와 이불을 깔아두고 잤고 나는 소파 위에서 이불을 덮고 생활했다. 전에 살던 집에서 크게 아프고 난 후 마련한 이불은 두꺼워서 들고 오기 가장 힘들었던 물건 중 하나였지만, 그 무렵까진 물건 중 가장 소중한 것 1위에 올라와 있던 것이기도 했다.


“뭐 필요한 거 없어?” 지예의 물음에,

“이미 충분해.” 이불을 목 끝까지 덮은 나와 서진은 만족스러운 듯 대답했다.

누울 곳과 덮을 것이 있다는 것. 충분함도 이렇게나 충분함은 없었다.

"뭐 필요한 거 없어?" 지예의 물음에

"이미 충분해." 이불을 목 끝까지 덮은 나와 서진이 대답했다.

누울 곳과 덮을 것이 있다는 것. 충분하다 못해, 넘쳐났다.


필요한 옷을 몇 벌 꺼내두고 지내며 학원이 마치면, 부지런히 인스펙션을 다녔다. 쉬는 날이면, 친구들과 둘러앉아 밥을 해 먹었고 자기 전까지 보드게임을 즐기다 잠들었다. 맥주를 마시고 서진과 지예가 가져온 스텝밀 (일하는 곳에서 식사로 준비해 준 음식)을 가져와 데우고는 안주 삼아 먹었다. 그 시간이 무척 즐거웠다. 방 하나 없는 생활이 이렇게나 재미있을 줄이야.


가진 게 없어서 갖추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 어디서든 잘 자고 잘 먹고 잘사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아 좋았다.



- 거실에 쌓아둔 우리의 짐



그러나, 그런 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얹혀사는 사람이었다. 2주만 신세 지겠다고 약속했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재미있는 생활과는 반대로 한 치 앞도 모르는, 일어날 일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다른 거였다.

서진과 대화를 나눌 때면 어딘가 모르게 날이 섰다. 꼭 나만 발을 동동 구르는 거 같았다. 애타는 마음은 애석하게도 다른 곳을 향해 날아갔다. 서진은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함께 인스펙션을 보러 다닐 수 없었다. 서진과 집을 함께 볼 수 있는 날은 일주일에 딱 두 번 뿐이었다. 그날은 서진이 쉬는 날이었다. 꼭 보고 싶었던 두 집이 하필이면 같은 시간에 열렸다.

결국 서진과 나는 갈라서서 각자 다른 집을 보기로 했다. 어떤 것들을 물어봐야 하는지, 가구는 포함되어 있는지, 가장 중요한 집세는 어떻게 계산되는지 등 물어봐야 하는 것들을 정리해 서진에게 보냈다. 각자 맡은 집을 보면서 집의 상황이나 질문에 대한 답을 공유하기로 했는데, 문자 속 서진의 답장은 ‘잘 모르겠다’라는 대답뿐이었다. 내가 보던 집은 생각했던 것과 달라, 금방 포기하고서 돌아 나왔다. 서진이 보고 있는 집에 당장 출발한대도 머지않아 인스펙션이 끝날 거 같았다.



- 지예와 은선네



어려운 질문이 아님에도 답을 구해오지 못하는 게 답답했다. 그러다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갔더라면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모르겠다는 문자만 여러 차례 받은 후 서진과 만났다. 그리고 결국 터져버렸다. 급한 마음에 싸우는 시간도 아깝다고 여긴 나는, 추궁하기 시작했고 서로 예민한 말들이 오갔다. 그러다, 서진이 갔던 집에 문제가 생겼었다는 걸 알게 됐다.

원래, 집을 보여주기로 했었던 부동산 담당자가 사정이 생겨나지 못하게 되어, 다른 사람이 대신해 보여줬다고 한다. 담당자가 아니니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없었던 거였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순간 내가 가장 고생하고 있다고 여겼던 마음이 너무 부끄러워졌다.

서진은 자신 나름대로 답답했을 터였다. 묻는 것마다, ‘잘 모르겠으니, 다음에 다시 일정을 잡거나 메일을 통해 물어보라’라는 대답만 돌아왔다고 한다. 늦은 시간까지 일하고 돌아와, 날 서 있는 나를 보며 몇 번이나 눈치를 봤을지. 속이 좁은 나는 세어 보기도 어려웠다. 조용히 미안하다고 말하는 서진을 보다 눈가가 뜨거워졌다. 집이 뭐라고. 그 욕심이 도대체 뭐길래.



- 보고 온 집을 정리해 둔 메모



얼마나 미안했을까. 자신이 살 집을 영상으로, 사진으로 때우며 얼마나 답답했을까. 내가 하고 있던 게 가장 값지다고 여겼던, 그 발품 파는 시간이 제일 의미 있다고 여겼던 모든 게 부질없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려고 뛰어다닌 시간이 아니었다. 결국, 내가 얼마나 모자라고 이기적이었는지를 적나라하게 알려주기 위한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한없이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마지막으로 늦은 시간 열리는 인스펙션이 하나 남아있었다.

“하나 남은 인스펙션 같이 보러가자.”

“…나는 저층에는 살고 싶지 않아.” 서진이 대답했다.

“생각보다 괜찮을지도 모르잖아. 그냥 보고만 오자.”

이전에 살던 아파트가 저층이라 음식 냄새가 자주 올라왔다. 벌레도 얼마나 나왔는지. 서진은 6층 이상만 가겠노라 선언해 둔 상태였다. 충분히 이해가 갔지만, 왜인지 그 집은 보지 않고 놓치기 아까웠다. 5층이라는 점만 뺀다면 모든 게 완벽했다. 무엇보다, 서진이 일하는 식당과 걸어서 5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라 밤거리를 크게 걱정할 일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보다도 그냥 ‘같이’ 하고 싶어 그랬을 수도 있다. 서로가 그동안 묵혀둔 말을 걸어가는 길목에서 함께 풀어내고 싶었다. 다시 잘 버텨내 자보자고 말하고 싶었다.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더 솔직히 고백하고 싶었다.


그렇게 우리는 운명의 집을 만났다.



- 여기서 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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