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든 끝은 있다.
내 성화에 못 이긴 서진은 마지막 인스펙션에 따라나섰다. 깨끗한 거리, 윌리엄 스트리트에 있는 커다란 아파트였다. 호텔과 연결된 아파트라 입구는 호텔 리셉션과 같았다. 이중 보안에다 오고 나가는 걸 찍는 카메라 모니터는 우리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어 안전해 보였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풍겨오는 좋은 향이 한결 편안한 상태로 이끌었다. 아직 부동산 직원은 도착하지 않은 듯해, 소파로 가 앉았다. 서진은 이리저리 둘러보다 자리에 앉았다.
“여기 뭐야…?”
“그러게…”
곧이어 도착한 부동산 직원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지, 어떤 시설이 갖춰져 있는지 알려주었다. 우리가 보게 될 집은5층이었다. 이미 가구는 전부 세팅된 상태였고 테라스로 나가 내려다본 아래는 생각했던 것보다 꽤 높았다. 주변에 식당 하나 없으니 이전 집과는 같은 5층이래도 전제가 달랐다.
정말 여기서 살 수 있을까 싶었다. 이렇게나 좋은 금액에, 좋은 조건이라니. 말도 안 되지 싶었다.
"나 그냥 여기서 살고 싶다." 서진은 멍한 눈으로 말했다.
"나도..."
무리라는 걸 알면서도 말은 다르게 튀어나왔다. 투룸에, 깨끗한 가구, 커다란 헬스장과 수영장, 도서관. 여기가 이케아인 건지, 모델하우스인지. 이중창이라 추울 일도 없겠다. 생각하던 그때, ‘덤벼보지 않으면 또 모르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우리가 저기 살 수 있을까?
- 테라스에서 보이던 건물들
우리는 처음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지친 마음은 깔끔히 정리해 버리고, 다시 첫 집을 구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프로필부터 꼼꼼히 수정하기 시작해, 인적 사항과 함께 보내는 레터를 다시 썼다. 최대 3,000자까지 적을 수 있었는데, 마치 자기소개서를 적는 것처럼, 서론과 본론 그리고 결론을 나눠 이 집에 사는 게 왜 우리여야만 하는지, 가진 돈이 얼마 없으며, 아직 제대로 된 일자리도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얼마나 가능성이 충만한 사람인지 당당히 써 내려갔다. 무모함이 낳은 대담함은 생각보다 컸다.
일과는 부동산 사이트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매일 아파트 이름을 검색하고, 금액과 조건이 맞는 매물에는 모두 신청서를 넣었다.
열리는 인스펙션마다 따라다니니, 어느 날 서진은 ‘이러다 윌리엄 지박령이나 되고 말겠어.’라며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소리도 냈다. 우린 인스펙션이 끝나면 마지막까지 남아, 부동산 담당자에게 어필 아닌 어필을 해댔다.
"우리는 이 아파트가 정말 마음에 들어요. 어떤 아파트도 여기만 한 곳이 없는 거 같아요."
"깨끗하고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지낼 수 있어요."
오버스러울 수 있을법한 미소를 장착하고 두 손을 모으는 액션까지 취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정말 부동산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우리는 너희를 다음 입주자 후보로 두고 있어. 여전히 이 집에 관해 관심 있어?"
이렇게나 심장이 콩콩 뛰는 메일은 처음 받아보는 듯했다.
오브콜스지! 흥분을 감출 수 없던 우리는 필요한 거나,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으면 언제는 연락을 주라며 회신했고 곧바로 이케아로 향했다. 다 된 거나 마찬가지 아니겠냐며 말이다. (대체로 이런 연락을 받으면 정말 다 된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카트기 안은 청소용품과 몇 가지 식기로 채워져 갔다. 귀여운 인형도 하나 담았다. 그리고 부동산으로부터 긴 메일이 한 통 왔다.
"안녕, 몇 가지 궁금한 게 있어."
"너희 이전에 살던 집에서 렌트비가 연체된 적이 있던데 그것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어?"
...연체?
- 오랜만인 침대
일났다. 이케아 한중간에 서서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유심 사기로 한바탕 난리였던 그날. 우리는 집세가 이틀간 연차 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었다. 어떤 이유로 돈이 빠지지 않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었다. 하지만, 당장 부동산이 문제 삼고 있으니 어떻게라도 빠져나가야만 했다.
“망했다. 어떻게 설명해?” 메시지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침착하자. 일단 우리가 그때, 호주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은행 앱을 쓰는 게 서툴러서 그랬다고 말하자.”
“그걸 믿을까…?”
몇 분이 흘렀을까. 답장이 왔다.
“그렇구나. 하나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대부분 집 계약은 1년 단위로 해. 너희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던데, 비자를 더 연장할 계획이 있어?
“6개월 계약은 어려울까?”
“글쎄. 그건 집주인과 상의해 봐야 할 거 같아. ”
이미 이전 집에서 두 달을 보낸 우리는, 1년 계약 조건에 맞지 않았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1년 간 살 수 있는 비자이기 때문에, 연장하지 않는 이상 남은 건 10개월뿐이었다.
렌트가 여러모로 발목을 잡는 듯했다. 섣부르고 무모한 결정이었을까. 아무런 생각 없이 한 일이라 이렇게 허점이 드러난다는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창피해졌다. 계획 없는 티가 너무 나서. 끌고 다니던 카트를 세우고 근처 아기방으로 꾸며진 곳으로 들어가 어린이용 의자에 엉덩이를 밀어 넣었다. 우스꽝스러운 꼴로 큰 결정을 앞두고 있었다.
렌트를 계속해서 고집하는 게 맞을까. 반년 정도라도 계약할 집을 찾아야 할까. 다른 사람 집에 셰어생으로 들어가야 할까.
"너 호주에 더 살 계획이 있어?" 서진에게 물었다.
"아니? 넌?" 놀란 듯 서진은 내가 되물었다.
"나도 없어."
그러고 보니 1년 이상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1년이면 충분할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운명에 걸어보자 싶었다. 모를 일이다. 6개월 계약이 될지도 모를 일이고, 또 다른 부동산으로부터 연락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진과 나는, 이 모든 게 다 틀렸음을 알게 되었을 때 렌트에 발 들이지 않기로 약속했다.
카트에 담아둔 물건을 제자리에 가져다주었다. 물건을 하나둘 내려둘 때마다 얼마나 부질없는 것에 목을 매고 있었는지, 그런 마음들도 하나씩 내려두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 하늘엔 비가 오려는 듯 먹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서진과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일찍 일어나, 학원에도 여유 있게 도착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 오는데?”
“받지 마.” 필기하던 손을 멈추고는 서진을 향해 말했다.
“부동산이면…?”
“아, 받자. 받아 얼른” 혹여나 싶은 마음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영어로만 대화하도록 해.” 기어코 선생님의 경고도 한 번 들었다.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가, 헐레벌떡 전화받았다. 윌리엄 아파트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런데, 어제 연락했던 부동산이 아니었다. 게다가 인스펙션도 본 적 없던 곳이었다. 아파트 이름과 집세만 본 채 넣은 곳 중으로부터 온 연락인 듯했다. 오늘 집을 보러 올 수 있냐는 말에, 당장 갈 수 있다며 곧바로 대답했다.
쉬는시간이 되자마자 선생님께 가, 싹싹 빌어가며 사정을 설명했다.
“우리는 지금 머물 곳이 없어서, 친구네 집에 얹혀 지내고 있어요. 방금 부동산으로부터 연락받아서 집을 한 번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놓치고 싶지 않아요. 내일부터 정말 열심히 할게요!”
선생님은 다급한 우리에게 진정하라며 웃어 보이더니 손을 잡았다.
“얼른 가 봐. 너희가 마음에 드는 좋은 집이었으면 좋겠다.”
열심히 달렸다. 트램 세 정류장 정도의 거리를 걷고 뛰기를 반복했다. 서진과 나는 서로를 보다 깔깔 웃었다.
“잠시만, 헉헉”
“그래. 우리 너무 김칫국 마시지 말자.”
“우리 그동안 너무 많이 마셨어.”
- 윌리엄아 기다려 !
차오르는 숨을 깊게 들이켜 내쉬고 저 멀리 손을 흔드는 직원을 향해 갔다. 사진이나 영상을 찍어도 좋다는 말에, 동영상 녹화를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부터, 현관문, 안으로 들어가 방마다 꼼꼼하게 말이다.
이곳은 가구가 전부 갖춰진 곳은 아니었다. 냉장고와 세탁기 그리고 침대 한 개가 있었다. 서진은 보자마자,
“난 침대에서 안 자도 돼. 알지?”라며 눈에 힘을 잔뜩 준 채 말했고
“나도 물론이야.” 질 수 없다는 듯 나도 이글거렸다.
지난번에 본 곳과 같은 5층이었고 금액도 똑같았다. 어떻냐는 직원의 물음에 궁금한 것들을 이것저것 물어봤다. 전부 예상해 둔 대답과 같았고 가장 긴장되었던 입주일에 관한 질문만 남아 있었다.
“입주는 집주인이 너희에 관한 확인만 끝나면 당장도 가능해.”
와! 제발 지난번과 같은 이유로 걸러지지 않는다면, 우린 당장도 이사를 들어올 수 있었다. 소중한 이부자리만 들고 오면 드디어 끝난다. 영원할 것만 같던 몸 누일 곳 찾던 일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날 밤 우리는 둘만의 상상력을 총동원에 불확실성과 싸웠다. 윌리엄에 있을 우리를 생생하게 상상하고 구체적으로 그려갔다.
그렇게 우리는 최종 확정 연락을 받았다.
- 친구네 집, 아늑했던 거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