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생기다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다짐하고 가장 먼저 유학원 투어를 했다. 고등학생 때 이후로는 영어 공부를 해본 적이 없어, 이런 실력으로도 소통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사실 워킹홀리데이는 어학연수가 꼭 필수인 건 아니다. 오히려 어학연수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도 나에겐 안 하는 것보단 하는 게 더 나을 듯했다. 학원은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최대 4개월까지 다닐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지내는 건 8개월 정도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 그땐 어학원을 다니면서 일을 구하면 되지 않을까? 정도로만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렇게 고른 학원은 멜버른 시티 한 가운데 위치한 꽤 좋은 학원이었다. 기왕 다니는 거, 배울 수 있는 것들이 많은 곳이었으면 했다. 여러 커리큘럼 사이로, ‘커피 클래스’가 특히 재미있어 보였다. 커피로 유명한 도시, 멜버른이니 바리스타도 잠깐 꿈꾸기도 했다.
- 어학원에서의 오리엔테이션
학원은 주 5일 가는데, 삼 일은 메인 코어 클래스를 듣고 나머지 이틀은 일렉티브 클래스를 듣는다. 코어 클래스는 자신의 레벨에 맞춰 자동으로 배정되는 반이고 일렉티브는 원하는 수업을 선택해 듣는 거였다.
나의 첫 코어 클래스는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같은 반 친구들은 유쾌하고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담임 선생님, 피오나가 정말 재미난 사람이었다.
호주에서 나고 자란 피오나는 몸에 정말 많은 타투가 새겨져 있었다. 심지어 얼굴에도 많았다. ‘나는 몸에 매우. 많은 타투를 가지고 있고 몇 개인지는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몸에 새긴 타투들을 어디에서 새긴 건지 정도는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피오나는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타투는 여행을 다니면서 새긴 것들이라고 했다. 가끔 타투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가 있는데, 어떤 날은 옷소매를 걷으며, 허리춤을 조금 내려 보이며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몸에 그려진 그림들을 하나하나 짚으며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곤 했다. 질릴 틈이 없었다.
피오나를 보고 있자면, 디즈니 영화 <모아나>가 떠올랐다. 마우이라는 몸집 커다란 반인반신 영웅이 있는데 그는 영웅적인 행위를 할 때마다 자동으로 자신의 몸에 문신이 새겨졌다. 영화를 재미있게 봐서 찾다 보니 안 사실이지만, <모아나>의 바탕이 된 신화, 폴리네시아에서는 타투가 신과 자신을 연결하는 수단이자 업적을 기록하는 용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항해자들이 얼마나 많은 곳을 여행했는지 그들의 몸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어떤 항해자들보다도 많은 문신을 가진 마우이는 신나는 노래와 함께 몸에 새겨진 그림들을 소개하며 등장한다.. 피오나는 꼭 마우이처럼, 삶이 몸에 잔뜩 새겨진 사람처럼 보였다.
출처 : 네이버 모아나 포토
이 밖에도 피오나는 매력이 많은 사람이었다. 집시 스타일의 옷을 입으며 레게머리를 고수하고 매일 명상을 하고 향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자주 안아주던 피오나에겐 숲의 향이 났고 어쩐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느껴졌다. 가끔은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에게 배운 춤을 춰주기도 했는데, 정말 애니메이션 어느 부분에서 툭- 튀어나온 사람처럼 느껴졌다.
피오나와의 한 달간의 코어 클래스가 끝나고 두 번째 클래스를 선택하는 시간이 되었다. 서진과 나는 일렉티브. 클래스를 맞춰 듣기로 했다. 새로 개설됐다는 ‘아트 클래스’ 평소에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서진과 나는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일렉티브 클래스 첫 OT 날 뒤에서 걸어 들어오는 선생님에게 익숙한 향이 났다. 바로 피오나였다. 새로 만든 클래스의 담임이 피오나였던 거다. 그녀는 몇몇 익숙한 이들에게 윙크를 날리며 제 소개를 했다.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서진과 나는 어릴 적부터 동네 미술학원을 다녔다. 호주에서도 같이 미술 사업을 듣게 되는 날이 오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는 매주 마주 앉아 피오나와 이야기를 나눴고 그림을 그리고 세계의 예술가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호주의 문화와 원주민 예술에 대해 배웠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참 빠르게도 흘렀다. 마지막 수업은 작은 전시회를 여는 거였는데, 그동안 만든 작품을 공용 라운지에 전시해야 했다. 자기 작품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고 다 같이 모여 앉아 감상을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피오나는 리액션이 정말 풍부한 사람이었는데, 발표가 끝날 때마다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Lovely!’, ‘Awesome!’을 외쳤다. 특유의 호주 발음과 그녀의 목소리는 어디서 들어도 ‘피오나다!’ 싶을 정도로 개성을 지녔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가, 발음이, 향기가 몇몇 타투들이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길 바랐다.
그녀는 처음으로 알게 된 호주 사람인데, 피오나가 너무나 다정하고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라 왜인지 호주 사람들은 모두 그럴 것만 같다는 환상까지 키워주었다.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피오나. 많은 것들을 배웠어요.”
"나도 너희들 덕분에 정말 행복했어. 너희가 첫 아트 수업의 학생이라 정말 기뻐. 고마웠어." 그러고는 손 뽀뽀를 날렸다.
"괜찮다면, 부탁을 하나 하고 싶어요."
"그래. 뭐든 좋아."
난 아직 영어 이름이 없었다. 호주에서 만난 첫 영어 선생님이 만들어 주는 것도 좋을 거 같았다.
"전 영어 이름이 없어요. 괜찮다면 지어줄 수 있을까요?"
그녀는 입을 틀어막으며, "정말 내가 지어줘도 돼?" 하는 거다.
“딸이 태어난다면 꼭 주고 싶었던 이름이 있었거든. 결국 남편이 정한 이름이 된 바람에 줄 수 없었지만. 항상 마음속에 남아 있는 이름이 있어. 그 이름을 생각할 때면 마음이 따뜻해져. 코지한* 네임이야. 너에게 정말 잘 어울릴 거라 생각해. 네가 묻자마자 떠오른 이름인데,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어쩌지?”
*cosy : 아늑한, 친밀한
이런 이야기까지 들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헤이즐. 헤이즐이야. 네가 마음에 든다면 네 이름이 되었으면 좋겠어.’
그녀는 노트 위에 커다랗게 내 이름을 적었다.
“제가 정말 가져도 돼요?”
“물론이지! 그랬으면 좋겠어.”
그렇게 나는 헤이즐이 되었다. 그날 이후로 학원에서 피오나를 마주칠 때면 그녀는 저 멀리서부터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지나가는 선생님들에게 자신의 딸이라며 소개하기도 했다. 피오나는 우리 엄마와 정말 다른 이미지이지만, 엄마 같은, 따뜻한 피오나가 내게 이름을 준 선생님이란 사실에 기뻤다. 그녀 덕에 따뜻한 이름처럼 느껴졌다.
"너랑 정말 잘 어울린다."
하지만, 머지않아 아주 큰 난관에 빠졌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좋은 이름을 제대로 말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스타벅스에서 처음으로 이름을 말했던 날이다.
“어떻게 불러줄까?” 점원이 물었다.
“헤이즐!” 당당히 대답했다.
하지만 돌아온 컵에는, 생전 처음 보는 이름이 쓰여있었다. 그렇게 나는 스타벅스에 갈 때마다 몇 번이고 잘못 불렸다. 제이든, 헤이즌, 헤일리, 헤이스, 헤이슨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지독하게 Z발음을 못 하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됐다. 그 후 무언가 주문하기에 앞서 이름을 알려달라고 하면 겁부터 났다. 선생님이 준 고마운 이름은 써야 할 때마다 무거운 마음을 함께 달고 나왔다. 잘 쓰고 다니고 싶어 만든 이름인데 말이다.
마음에 드는 이름을 발음을 못 해서 잃는 것만큼 멋없는 일도 없을 거다, 부단히 노력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 이름을 읽어달라고 수도 없이 부탁했고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녹음하기도 했다. 번역 앱에 이름을 검색해 소리를 연습하던 날도 있었다. 어떻게든 말할 수 있도록. 제 이름이 되어주길 바랐다.
헤이즐- 하고 부르는 소리에 이름을 확인하고, 성공한 날이면 다시 읊조렸다. 피오나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평생 ‘Z’발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고마운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내 이름에 남아서까지도 몇 번이고 가르쳐주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름이 두렵지 않은 날이 오게 됐다. 여전히 나는 헤이즐로 살고 있다. 따뜻한 나라에서, 따뜻한 선생님에게 받은 이름을 기억하며.
- 모르는 이름들 사이로 몇 번씩 성공한 헤이즐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