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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해져 가는 중입니다

윌리엄 이발소

by euuna








<윌리엄 이발소>


시급도 높고 물가도 비싼 나라. 호주에서 돈의 무게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여러 낭비를 꽤 하고 난 후였다. 고작 1년 살겠다고 온 나라에, 왜 그렇게나 갖춰가며 살려고 한 건지. 지금 생각해 보면, 아쉬운 게 많지만, 그 당시에는 한국에서 지내던 것처럼 지내는 게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다. 그러니, 통장이 텅텅 비어버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서히 날이 풀리고 금세 더워졌다. 길어있는 머리를 보고는 잘라야겠다 싶어, 어디 미용실에 가야 하나 생각하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가까운 다이소로 가, 3천 원 하는 헤어용 가위와 숱가위를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거실에 쌓여 있는 종이봉투를 잘라 이어 붙이고 바닥에 깔았다. 셀프 머리 자르는 법을 검색해 몇 번을 돌려보고는 거울 앞에 앉았다. 그러고 보니 대학생 때 야매로 친구들 머리를 종종 잘라주긴 했는데, 셀프컷은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수월했다. 뒤에는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겠지만 앞모습은 나쁘지 않았다. 때마침 서진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길래, 현관 앞으로 가서는 한 바퀴 빙- 돌아보았다.


"어때? 내 머리?"

"미용실 다녀왔어?!"


하하. 성공이었다. 설마 기분 좋아지라고 한 말은 아니겠지…? 내가 잘랐단 말에, 자신도 좀 잘라 주겠냐고 부탁하는 서진에게 그래! 하고서는, 뒤돌아 '남의 머리 자르는 법'을 검색했다. 오랜만에 다른 사람 머리카락을 자르는 거라 긴장이 됐다. 아무래도 해 본 걸로 하는 게 더 나을 듯해, 다시 셀프 머리 자르는 법을 검색하고는 말했다.


"근데, 레이어드 컷 밖에 할 줄 몰라. 따라 할 만한 게 그거뿐이더라고."

"괜찮아. 그게 어디야. “


흔쾌히 수락해 준 덕에 나는 서진의 등에 올라타기도 하고 '숙여 봐', '고개 들어봐' 하며 마치 인형 머리를 자르듯 턱턱 잘라냈다. 다듬기까지 마치고 나서야 울퉁불퉁한 내 뒷머리가 신경이 쓰였는지 서진은 정리해 주겠다며 가위를 받아 갔다. 이제 머리는 서로 잘라주면 되겠다고 말하는 서진에게 좋은 생각이라며 끄덕였다.


말끝으로 일반 가위를 받아 간 서진은 숱가위처럼 휘둘렀다. 그렇게 나의 뒤통수 머리카락 한 부분을 동강 잘라냈다. 긴 정적이 흐르고 툭 떨어진 내 머리카락을 보고서는


"나는 그냥 내가 자를게..." 라고 대답했다. 너무 놀라 입이 쩍 벌어졌다.



- 머리카락은 또 금방 기니까.


다음날 나는 뒤통수의 실수를 어찌저찌 숨기고 우리는 새로운 머리 스타일을 한 채 학원에 갔다. 반 친구들은 달라져 온 머리 스타일에 어느 미용실에 갔냐고 물었고 (진심으로 말이다.) 셀프로 잘랐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너 나 할 것 없이 자신 머리도 잘라달라며 겁도 없이 부탁했다.


'나 믿을 수 있겠어? 정말?' 하며 왼쪽 머리카락을 한 움큼 들고는 어제 잘렸던 부분을 보여줬다. 어색하게 웃는 친구들만 남았다. 그 뒤로 얄궂게 가위손을 하고 선 '머리 커트 필요한 사람?', '너 머리가 좀 길어 보이는데 내가 잘라줄까?' 같은 장난을 쳤다. 도망가는 친구들 사이로 남자인 한 친구가 다가와 말했다.


"나 좀 잘라줘..."

"진심이야?"

"응. 나는 아무래도 좋아."


남자 머리는 처음인 내가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겁이 없는 친구는 볼 때마다, 자기 머리를 잘라달라며 요구했다. 결국 기다려봐 하고 선 뒤돌아 검색했다. '남자 머리 가위로 자르는 법' 그러고 보니 이 친구는 일본인인데. 일본 스타일로 해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 '일본 남자 머리 스타일로 자르는 법' 따위도 검색했다.


"남자 머리는 처음인데... 나 믿을 수 있어?" 제발 못 믿겠다고 말해줬으면 했다.

"(한껏 긴장한 표정으로) 괜찮아."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그냥 미용실 가는 게 어때..."

"너는 공짜잖아..."


호주 세상 물정을 빨리 깨달은 어린 일본인 친구, 히로는 답답할 정도로 길어진 자기 머리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던 때였다. 때마침 친구들 사이로 '무료로 잘라줄게!'라며 외치고 다니는 나를 발견했고 비싼 미용실 대신에 무료인 나를 쓰겠다고 온 거였다. 설마 그렇게까지 망가지지는 않을 거라 믿으면서. 마음에 들면 아이스크림 사주겠다는 거래까지 마치고 집으로 데려갔다.




- 바리깡도 쓸 줄 알게 됐다.



"괜찮겠지? 할 수 있지?" 히로는 걱정스레 물었다.

"몰라. 일단 영상은 한 20번 본 거 같아."

"그거면 충분해?" 히로의 커다란 눈알이 미덥지 않아 죽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젠 무를 수도 없어.”


히로의 머리를 두 시간가량 잘랐다. 막 자르지 못해서 두 시간이 걸렸다. 조금 자르고는 괜찮은지 예술 작품을 보듯 저 멀리 떨어져 봤다가 또 조금 자르고 거울을 보게끔 하곤 했다. 어느덧 해가 졌고 지켜보던 서진과 제 머리를 내어준 히로는 잠들어 있었다.


"다했어!"

손가락에는 가위 자국이 빨갛게 남아 있었다.


"오! 마음에 드는데?" 히로는 거울 앞에서 자신을 살폈다.

"고생했다 진짜..." 수고를 알아주는 서진도 있었다.


이날을 뒤로, 호주 생활 2년간 나를 비롯해, 여러 친구의 머리를 몇 번이고 만지며 지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처음으로 집이 생기고 서진과 나는 향이 좋은 값비싼 바디워시를 샀다. (2화 참고) 그때는 씻고 나오면 그 바디워시 향을 폴폴 풍기며 다니는 우리가 좋았다. 서로를 킁킁거리며 깔깔 웃다, ‘우리의 성공'이라는 향기에 취해있었다.


하지만 둘이서 두 달도 안 돼, 500ml 바디워시를 다 써 버렸다. 그건 실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마트로 가 각자 장을 보다, 비누 코너에서 만났다. 머쓱해진 우리는 단 2불짜리 (4불 비누가 세일 중이었던) 비누를 집었다. 석 달은 거뜬하게 쓰고도 남을 거 같은 크기의 비누였다. 조용히 카트에 담았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분수에 맞지 않았다는걸. 매우 많은 곳에 돈을 버리고 있었다는걸.


"근데 비누 쓰면 비누 받침도 필요한 거 아니야?" 내가 물었다.


비누 받침은 6불이었다.


"장난해? 비누보다 세 배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 서진은 자신 있는 듯 말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서진은 재활용 가방을 뒤졌다. 그러고는 페트병 하나를 꺼내 칼로 쓱쓱 잘랐다. 가스불을 켜 몇 번 달구더니 ‘짠- ‘ 하는 거다.


멋진 비누 받침이었다. 그런 비누 받침은 학창 시절, 재활용품을 활용한 만들기 활동 같은 데서도 본 적 없었다. 우유갑으로 만드는 연필꽂이, 수납함 같은 건 많이 봤는데 페트병 밑을 잘라서 비누 받침 만드는 건 처음 봤다.


"너 설마 자취할 때도 그렇게 사용했어?"

"아니... 그냥 집에 와서 보니까 저거로 만들면 되겠다 싶어서..."


서진은 내가 비누 받침을 살까 봐 우선 큰소리부터 쳤다고 한다. 재활용품 모아둔 가방에 뭔가 있지 않을까 싶어 어슬렁거리다 발견한 페트병으로 얼렁뚱땅 만들어 버린 거다. 이 기발하고도 민첩한 생각이 존경스러웠다. 그때부터 한낱 쓰레기가 될 뻔한 걸 요리조리 굴려 잘 사용하게 됐다. 말린 페트병에 쌀을 보관하고, 과일을 사고 남은 플라스틱 케이스들에는 공구를 넣거나, 수세미, 행주 등을 넣어가며 요긴하게 사용했다. 절약하는 것처럼 보이는 외국인인 게 즐거웠다



- 짜잔



<어떻게든 살아진다>

해외에서 살다 보면 생각보다 당황스러운 일이 자연스럽게 생길 때가 있다. 갑자기 세면대에서 똥물이 나온다거나, 난데없이 정전되는 그런 흔한 일 말이다. 첫 정전 때는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지예와 은선의 집에 얹혀살 때였다.


"얘들아. 집에 불이 안 들어오는데?"

"뭐?"


출근하려는 지예의 연락이었다. 전기세가 많이 나와 끊겨버린 건지, 아파트에 문제가 생긴 건지 의심되는 것들이 있었다. 아파트가 문제였더라면 안내문이라도 붙어있었을 텐데 별다른 게 없었다. 확실한 게 낫겠다 싶어 엘리베이터에 함께 올라탄 이웃에게 물었다. 자신 집엔 잘만 나온다는 말에, 더 절망스러워졌다. 우리 집만의 문제 같았다.


하필 그날은 아주 추운 날이었다. 이 집은 통유리에 곳곳에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게다가 층이 높아 바람을 때려 맞는 건물이었다. 거실 생활 덕에 뼈 시린 바람은 익숙해졌고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마트에서 단돈 10불에 사 온 전기장판 덕이었다. 당연히 전기장판도 들어오지 않았다.


연락받고서는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폰으로 플래시를 켜고 곳곳을 둘러봤다. 두꺼비 집에는 딱히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냉장고 안은 미지근했고 전기 코드 식인 가스도 들어오지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온수가 나오지 않았다. 해는 이미 떨어졌고, 전기 회사와의 전화 연결도 되지 않아, 으슬으슬한 몸을 달래고자 옷을 껴입었다. 일을 하는 서진과 지예는 쉬는 시간마다 연락이 왔고, 대화는 한숨으로만 이어졌다. 식당 키친에서 일하는 둘은 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에 빠졌다.


"나는 씻어볼래." 서진이 말했다.

"야 너 죽어." 얼굴만 간신히 씻고 나온 은선이 말렸다.


난생처음으로 서진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화장실 부스 안에서 괴로움을 겪고 있었다. 서진은 물이 너무 차가우면 아프게 느껴지는 걸 처음 알았다며 몸서리를 치다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그날 새벽, 씻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잔 지예는 옷장 안에서 발견됐다. 지예의 방은 거실과 맞먹을 정도로 추웠는데, 더러운 몸으로 침대에 올라가는 일만큼은 하고 싶지 않은데 추위를 막을 방법이 없어 옷장에 들어가 자버린 것이었다. 호주의 옷장은 대체로 빌트인 옷장이라 사람 한두 명 정도는 거뜬히 들어가 잠을 자는 게 가능해 보이긴 하지만, 처음 보는 일이긴 했다.


출근도 해야 하고, 학원도 가야 하는 우리는 물티슈로 얼굴을 벅벅 닦고 화장실로 가 엉망이 된 머리를 보았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고데기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복도의 끝 코너에는 콘센트가 있었다. 그곳에서 숨죽여 삐죽 솟은 앞머리를 당겼고 아주 조금, 덜 꾀죄죄한 상태로 집을 나섰다.




찬물 샤워 여파인지 서진은 학원에 가지 못했다. 그냥 일어나지 못했다. 이미 학원을 졸업한 지예는 옷장에서 나와서, 은선과 나를 배웅하고는 혹시나 한 마음으로 전기 라디에이터를 연결해 보았다고 한다. 작동이 되는 라디에이터를 보고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서 서진에게 쐬어준 뒤 자신은 온수 샤워를 하러 갔단다. 선잠에 든 서진은 계속 자다 깨길 반복했는데, 어디선가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고 그 길로 달콤한 잠에 빠졌다고 한다. 여전히 서진은 지예를 자신의 은인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알고 보니 입주 후 전기를 신청할 때, 날짜를 잘못 선택해 생긴 해프닝이었다. 하루뿐이라 기억 속에서 재미있는 추억으로 생각할 수 있음에 다행스러웠다.


성장스토리가 재미있는 이유는 자꾸 처음을 이겨낸다는 것에 있는 거 같다. 계속해서 발전하는 거다. 그 순간은 명확히 보이지 않지만, 폭풍이 지나가고 새로운 미션을 하나 해내고 나면 그제야 나의 처음이 어디로 나를 데려왔는지 알게 된다.


익숙하지 않던 일들이 익숙한 일이 되고 별일들이 별일이 아니게 되는 순간이 수도 없이 많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는 게 많아질수록, 할 줄 아는 것들이 생겨날수록 처음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다.


잘하고 못 하고를 떠나 그 경험 하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주 큰 힘이 될 때가 있다. 오로지 내가 겪은 것들이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 어떠한 경험이 만들어지기 전 꼭 거쳐야 할, 처음은 사실 두려운 게 아니었다. 또 성장할 기회를 제안해 주는 값진 일인 거다. 한국으로 돌아와 어영부영 지낸 시간을 돌아보니, 전부 하나같이 즐거웠던 시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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