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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에서 벗어나기

긴 여정의 시작

by euuna








우여곡절 끝에 들어간 커피 클래스. 일주일 동안은 이론에 대해 배웠다. 카페에서 사용하는 약자에 대해 배우고 메뉴에 따라 다르게 들어가는 우유와 커피에 대해서, 그리고 밀크 폼을 만드는 법을 알게 되었다. 카페에서 사용하는 것들에 대한 용어와 커피 머신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서도 익혔다. 본격적으로 실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 수업 담임 선생님, 안드레아는 조를 만들었다. 국적이 겹치지 않는 4명이서 하나의 조가 되었다. 여러 역할을 수행하며, 커피를 판매하기까지 하는 게 커피 클래스의 주된 수업이었다.

건물의 3개의 층을 쓰고 있는 우리 학원은 한 층에만 10반 이상이 있었다. 여러 반을 방문해, 정중히 우리를 소개르하고 커피 주문을 받는 일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이다. 카드나 현금으로 결제를 마치고 수첩에 학생이나 선생님의 이름, 반, 커피 약자, 요청 사항을 적은 뒤 다시 카페로 향한다. 팀별로 샷 추출, 우유 스팀, 세팅까지 완료한 후 서빙까지 마쳐야 한 조의 미션이 끝난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 과정에서는 모두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제 할 일에 임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귀엽다는 생각도 든다. 불시에 검사하는 선생님의 통과까지 마치면 드디어 앞치마를 벗을 수 있었다.


- 아마 학원다니며 그림까지 그려가며 필기한 건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다.



커피 클래스 반 친구들과 특히, 조원들과는 굉장히 돈독해지는 시간이었다. 안드레아가 가장 많이 강요한 것은 ‘소통’이었는데 할 일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끊임없이 대화해야 했다. 예를 들면,

“우유가 많이 뜨거우니까 조심해 줘.”

“샷 먼저 내렸으니까 롱 블랙부터 부탁해!”

“차이 라테 나갈 거니까 샷 하나만 더 내려줘.”

자신의 할 일만이 아닌, 제 할 일이 끝나면 이어받을 친구에게, 그다음 친구에게 계속해서 상황을 공유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정말 카페에서 일하듯 말이다. 더러워진 옷을 정리하고 손까지 씻고 나면 조별로 모여 앉았다. 그리고 부족했던 부분을 공유하고 조언을 구하는 시간을 가졌다.



- 잔도 꾸며서 나가는 커피



매주의 마지막 날은 팀별로 경쟁하는 날이었는데, 요청받은 커피를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테스트하는 거였다. 시간 내 커피를 만들고 모두가 시음하고 난 뒤, 점수를 매겼다. 온도나 우유의 양, 밀크 폼이 얼마나 잘 올려졌는지 테스트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승 덕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날도 있었고 매일같이 때려 넣는 카페인 탓으로 잠 못 이루던 나날들도 있었다.

어느덧 커피 클래스의 막바지 날이 찾아왔다. 마지막 주쯤에는 하루빨리 바리스타가 되고 싶었다. 라테아트는 못 해도 배운 스킬을 써먹고 싶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바리스타가 된다는 건 한 달짜리 수료증으로는 턱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 나는 친구들의 얼굴을 그려줬다.



호주에서 일자리를 얻는 방법 가운데 한국과 크게 다른 부분은, 발품을 판다는 거다. 아르바이트나 직장을 구하는 사이트도 잘 되어 있지만, 정작 공고를 낸 가게에서 확인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직접 만나서 이력서와 같이 자신을 어필해 얻는 기회가 많았다. 매니저와 만나 인사를 나누고 나면 바로 제 실력을 평가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를‘트라이얼’이라고 부른다. 그 기회를 얻고 나면, 수습 기간을 거쳐 일자리를 얻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은 사람마다, 일마다, 가게마다 너무나 다르고 빨리 구하기도 하는 반면, 생각보다 굉장히 오래 걸리기도 한다.






하루는 안드레아가 내일까지 이력서를 준비해 올 수 있냐며 우리에게 물었다. 스페인에서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로 와서 몇 년간의 생활 후, 선생님이 된 안드레아는 일자리를 구하는 과정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호주에서 사용하는 이력서는 한국과 같이 양식이 뚜렷하게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력서도 잘 만드는 스킬이 필요하다. 보기 좋은 테마를 사용했는지, 글씨체나 색상은 이력서의 분위기와 어울리게 사용했는지, 자신의 개성이 돋보이는 키워드를 사용해 소개와 함께 경력을 작성해야 했다. 지나치게 보기. 좋기만 해서도 안 됐고 무난하기만 해서도 안 됐다. 특색 있고 개성 있는 자신만의 이력서를 준비하는 것도 중요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이력서를 나눠보고 안드레아의 첨삭을 거쳐 완성해 나갔다.


가끔 이력서와 함께 커버레터를 준비하기도 한다. ‘커버레터’란 자기소개서와 비슷한데, 관심 있는 이유와 자신의 강점을 적어 자신을 소개하는 편지이다. 꼭 필요한 사항이 아니긴 요구하는 곳이 있기도 했다. 간절해서 작성하는 때도 있었고 온라인을 통해 지원할 때면 같이 준비해, 지원을 했다. 이력서는 기본 100장은 돌려야 한 통의 연락을 받을까 말까라는 말도 들은 적이 있었다.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력서를 직접 돌려도 온라인 지원서를 통해 넣어도 연락 한 번 받는 일이 쉽지가 않았다. 여러 SNS와 사이트를 매일 같이 들락거리며 수도 없이 이력서를 넣었다.



- 여러 버전의 나의 레주메



처음에는 마음에 드는 곳이나 일하는 내 모습이 상상이 되는 곳에만 이력서를 넣었는데 일을 구하지 못한 시간이 길어지니까 조급해지는 탓에 여기저기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또한 나만의 일은 아니었다. 주변 친구들 모두 첫 일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혼자서, 여럿이서 매일 일을 찾으러 다녔지만, 수확 없는 날들이 대부분이었다. 친구들과 같이 일을 찾다 보면, 오늘은 이만하자며 놀아버리는 날들도 많았다. 공원으로 가 드러누워 있기도 하고 언제쯤 일을 구할 수 있을까 매일 스스로에게, 서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렇게나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커피 클래스의 졸업과 함께, 생긴 돈독한 친구들 그리고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정말이지 열심히 놀았다. 아침 일찍 브런치를 먹으러 근교에도 다녀오고 저녁엔 여자 축구 경기도 보러 다녔다. 그간 시간이 없어서 가기 어려웠던 주변 여행들도 다니며, 친구들을 집에 불러 한식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그리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야 하는 친구들도 여러 배웅 했다. 매주 금요일은 커피 클래스 반 친구들과 모여 스포츠 펍으로 가, 다트와 탁구를 즐겼다. 그렇게 멜버른 곳곳을 누비며 지냈다.



- 커피 클래스 친구들과 함께 하는 금요일 !



그렇게 3주 정도 지났을 무렵 이 도시가 익숙하게 느껴졌다. 웃기게도 말이다. 매일 같이 길을 잃어버리는가 하면, 자신의 이름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던 게 어제 일 같은데. 호주로 온 이후로 처음, 여기서 더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생각은 가지치기를 해가며 무성해져만 갔다. 멜버른 밖이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일을 구하게 되면 제약이 생기는 자유로움이 걱정됐고 1년 안에 모든 아쉬움을 뒤로한 채 갈 수 있을지 의문이 생겼다. 적당하지 않을 거 같았다.

이제야 막 익숙해지는 것들이 용기를 내, 자꾸만 또 다른 마음을 심었다.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는 더 머물고자 한다면, 할 수 있었다. 부푸는 마음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영어가 많이 늘지 않았는데, 아직 일도 못 구했는데, 적응한 게 아까운데, 아직 모르는 게 잔뜩인데, 그런 생각들이 자꾸만 더, 더 있어 보자는 마음을 일으켰다.


- 멜버른의 구석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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