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롬크리스틴
어학원에서 가장 기대했던 수업은 ‘커피 클래스’였다. 커피로 유명한 도시, 멜버른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카페들이 즐비해 있다. 처음 벨버른에 도착했을 때, 이렇게나 멋진 카페들이 많은 것에 감탄했다. 맛도 인테리어도 장소도 모든 게 다 개성 있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바리스타를 꿈꿀 만한 도시였다.
카페 경력이라고는 한국에서 1년 남짓의 아르바이트가 다인 나는, 멜버른으로 갈 당시만 해도 ‘열심히 배워, 바리스타 해야지.’하는 막연한 꿈도 있었다. 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학원을 몇 개월간 등록한 사람은 마지막 달쯤에야 커피 클래스를 수강할 수 있었다. 또한 몇 번의 시험을 거쳐 레벨이 어느 수준에 이르러야만 커피 클래스를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어학원을 4개월 등록한 나와 서진은 드디어 세 번째 클래스에서 같은 반이 되었다. 이번 달 시험을 잘 통과해야만, 커피 클래스를 들을 수 있었다. 시험까지 며칠 남지 않아, 문제집만 뒤적이던 때였다. 커피 클래스가 간절하면서도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았다. 당시엔 지예와 은선의 집에 얹혀살고 있을 때라 점심시간에도 집을 보러 다녀와야 했다. 무엇보다 노력해야 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영어도 배우면서, 카페에서 일까지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냐며 꿈에 부푼 이야기를 함께 나눈 서진은 나보다 더 바쁜 일상에 치여 살았다. 원하는 잡을 구하기 전까지는 한인 식당에서 키친 핸드 일을 하겠다며, 매일 늦은 시간에 퇴근했다. 매일 녹초가 돼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좋지 못했다.
집세를 내야 했던 날, 내가 신청한 해외 송금이 늦어져 서진의 돈으로 잠시 메꿨던 날이 있었다. 그날은 정말이지 마음이 무거웠다. 돈이 떨어지니,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과 한 번 들어가면 쉽게 나오지 못할 거란 생각에, 이도 저도 못한 채 신세만 지는 꼴이 되었다.
학원이 끝날 때까지만 괴로운 마음을 버텨보기로 했다. 처음 어학원을 등록했을 때도, 4개월이나 어학원을 다니면 분명, 다른 사람들의 워홀 상황과는 조금 다를 거라 생각했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배우는 것에, 노는 것에, 듣고 말하는 것에 집중하자 싶었다. 일을 시작하면 하기 어려워지는 일을 소중히 하기로 했다.
시험날, 리스닝과 라이팅은 배운 대로였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거라면, 세 번째 반이 점수 올리기 깐깐한 반이라는 거다. 여덟 레벨 중에 높은 레벨의 클래스 전 단계 클래스는 아주 작은 점수 차로 레벨을 오르지 못한 경우가 많아, 이 클래스만 4~5번째 듣고 있는 친구들도 많았다. 불안했지만, 다음 달이 어학원을 다니는 마지막 달이라 원하는 클래스를 한 번은 듣게 해 줄 거란 알량한 믿음이 있었다. 스피킹은 무작위로 뽑은 번호로 진행됐다. 선생님과 단둘이 이야기를 가지는 시간이라고 했다. 내 차례가 됐다.
"헤이즐. 다음 달이 마지막이구나!"
"네. 너무 아쉬워요."
"나도 너무 아쉬워. 다음 클래스는 서진과 커피 클래스에 가고 싶은 거지?" 서진과 가까운 사이인 걸 아는 크리스틴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희망한 수업과 함께 그 수업을 왜 듣고 싶은지 이야기해야 했다. '어...', '음...' 섞어가며 두서없이 이야기를 건넸다. 가만히 듣던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좋아. 마지막 질문이야.'라며 질문이 있는 종이를 들었다.
'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며, 그 사람이 네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려주세요.'
이런 건 준비도 못 한 질문이었다. 시간은 충분하니까 천천히 생각하고 말하란 이야기에, 머릿속으로 소중한 여러 사람이 지나갔다. 누구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지 생각하던 차, 동생이 떠올랐다.
"소중한 사람은 많이 있지만,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은 제 사촌 동생이에요."
우리는 이종 사촌지간으로 아주 어릴 적부터 함께 살았다. 부모님이 이혼하기 전부터 가까이 살았고, 이모네도 이혼하면서부터 같이 살게 됐다. 한 달에 한두 번씩 꼭 이모부를 만났는데, 자주 보기 어려운 아빠를 대신해, 이모부는 동생을 만날 때면, 나를 늘 함께 불렀다. 장난감을 사줘도, 옷을 사줘도, 신발을 사줘도 꼭 같이 사줬다.
하루는 이모부가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내게, 공부는 좀 못해도 되니까 세상 여행은 많이 하란 말을 했다. 영어도 배우고 스페인어도 배우란 말과 함께 말이다. 그때는 여행 한 번 다니는 걸 본 적 없는 이모부가 왜 그런 이야기를 할까 싶었다.
고등학교 2학년, 이모부는 암 수술을 하셨다. 그해에는 주에 한 번씩 뵈러 갔는데, 우리 아빠와 달리 키가 아주 컸던 이모부가 작아 보이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이모부는 동생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근래에 한 번도 보이지 않던 미소 띤 얼굴을 하고서는 동생을 잘 부탁한다며 손을 꼭 잡았다.
얼마 뒤 이모부는 세상을 떠났다. 힘든 시간을 제 혼자 묵묵히 이겨나가며, 동생은 자라 갔다. 단단히, 건강히 잘 자랐다. 우리는 그날 이후로 더 가까워졌다. 어느 자매 부럽지 않을 정도로. 서로의 세상에 커다랗고 든든한 버팀목으로.
호주에 가겠다고 말했을 때, 섭섭한 내색 하나 없었다. 언니가 잘되는 게, 행복한 게 자신의 행복이기도 하단 동생의 말을 간직한 채 비행기에 올랐다. 누구보다도 제일 마음에 걸리는, 동생을 홀로 두고서 말이다.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많이 배우고 오라며 진심 어린 말들을 건넸다. 이렇게 떨어지는 건 난 처음이었다.
그러나 호주에 도착해서 정작 제대로 연락 한번 해주지 못했다. 못난 모습들이 튀어나올 거 같았다. 한심한 모습이 보일까 봐, 아직 제대로 해낸 게 없어서, 무언가 배웠다 할만한 게 없어서, 당당하지 못해서… 그런 한심한 이유를 붙여가며 안부조차 제대로 묻지 못했다.
상황에 치이고 힘들어, 그 애가 심어둔 마음을 키우지 못했다. 언니다운 적도 별로 없었으면서 언니답지 못해 보이는 게 싫었다. 오히려 동생이 나를 계속 자라게 해 주었대도 거짓말이 아닌데 말이다.
- 떠나기 전 동생이 준비해 준 케이크
어눌하고 부족한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크리스틴은 조용히 몇 번이고 나의 어깨를 쓸어주었다. 눈물이 터질 거 같았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코를 먹어가며 머쓱히 죄송하단 말을 전했다.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왜 스피킹 테스트를 하다 말고 울려는 거며, 시험 질문이 왜 저런 건지.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말이다.
"고마워 헤이즐. 힘들었을 텐데 이야기 들려줘서 정말 고마워."
정말 고마운 사람은 나였다.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호주에서 할 수 있게 되었고 이 드넓은 땅에서 헤매는 걸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한심한 사실도 알게 되었으니. 내가 훨씬 고마운 일이었다. 막살아도 괜찮다고, 마음껏 방황하겠다고 와 놓고 서는 뜻대로 갖춰지지 않는다고 무너지는 꼴이라니.
커피라고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밖에 모르면서 정말 바리스타가 하고 싶은 건지. 왜 그렇게나 재고 따져가며 살고 있는 건지. 갑자기 모든 게 의문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꼭 해야 하는 일이 없었다. 다른 나라에 와 놓고서는 왜 한국에서 살듯 살고 있는지도 당최 이해가 안 됐다. 아무도 어떻게 보지 않는데 말이다. 그냥 경험 만들러 온 것 아니었던가? 처음 해보는 것들이 잔뜩 있을 거라고, 우물 안 개구리 싫다고 한번 뛰어들어 본 것 아니었던가.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신기하게도, 크리스틴은 꼭 내 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말했다.
"마음을 무겁게 가지지 마. 처음 살아보는 이 나라에서 많은 것들을 경험해 봐. 생각보다, 너한테 열려있는 길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되는 날이 올 거야." 하는 거다.
이건 스피킹 테스트를 가장한 심리치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후에 꺼낸 크리스틴의 말은 눈물이 쏙 들어가게 했다.
2023년 5월 4일
당신이 꿈을 이루는 여정을 계속 이어가길 바랍니다! 당신은 인생에서 최고의 것을 누릴 자격이 있어요.
- T. 크리스틴
"정말 안타깝지만, 서진과 같이 다음 클래스 가는 건 조금 어려울 듯해."
"네?!"
이게 무슨. 내가 스피킹 테스트 질문을 잘못 이해하고 동문서답하고 있던 건가?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나?
"서진은 다음 클래스 가기 어려울 거 같아."
서진은 늦은 시간까지 일하는 날이 많아 결석이나 지각을 한 적이 꽤 있었다. 시험 준비도 전날 부랴부랴 하다 보니, 생각보다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레벨이었더라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수 있을 테지만, 서진은 학원에만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말도 안 돼. 우리는 커피 클래스 가려고 여길 등록 했는데?
"제발요. 크리스틴. 우리는 커피 클래스를 듣고 싶어서 이 학원을 등록했어요."
속상해할 서진의 모습이 그려졌다. 서진은 학교를 졸업하고 호주로 바로 넘어와, 모아둔 돈이 많이 없었다. 부모님께 손을 벌린 듯해 늘 미안해했고, 마음이 무거웠다. 그게 일을 시작한 이유이기도 했다. 예상치도 못한 말이라, 조금 전까지 있던 글썽이던 눈물이 쥐도 새도 모르게 들어갔다.
"성적 때문인가요?"
"물론 그것도 있지."
"서진은 지금 식당에서 매일 저녁까지 일을 하고 있어요.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수 없을까요?"
크리스틴은 정말 인심이 좋은 선생님이었다. 졸고 있는 서진의 등을 한 번씩 쓸어주고 이야기를 할 때면 따뜻한 눈으로 끝까지 쳐다봐 주었다. 밝은 에너지의 피오나가 있다면, 다정한 에너지의 크리스틴이 있었다. 쉬는 시간에 앉아 대화를 나눌 때면, 학원에서는 영어로만 대화할 수 있어, 규정을 지켜가며 이야기해야 했다. 매일이 집 이야기, 일 이야기뿐인 우리 이야기를 듣다가 어느 날, 집은 구했냐며 넌지시 묻기도 했다. 크리스틴은 우리의 작은 소리조차도 귀 기울이던 사람이었고 이력서를 봐준다든지, 인스펙션이 있는 날은 시간을 조정해 주기까지 하며 사정을 고려해 주던 사람이었다.
몇 가지 약속과 함께 크리스틴은 서진에게 재시험이라는 기회를 주겠다고 말했다. 역시나 크리스틴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서진은 그날 저녁 내내 넋이 나가 있었다.
"나 뭐 때문에 학원 다닌 거지."
"시간 없어. 다른 생각 말고 일단 공부만 생각해. 시험에 통과하는 것만 생각해."
"만약에 통과 못 하면 어떡해... 나 혼자 어떡해?"
서진은 불안한 마음 때문에 제대로 집중도 못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3개월 동안 커피 클래스에 들어갈 생각에, 기대에 차 있었고 식당 일도 커피 클래스를 졸업하면 그만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갈 수가 없다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일이었다. 마지막 달 정도라면 당연히 갈 수 있을 줄 알았던 거다.
그날 저녁, 서진은 첫 레벨테스트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오버를 좀 더 보태어 말하자면,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함께 다니며 이렇게나 책을 빤히 들여다본 걸 본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노력에 화답하듯, 시험은 다행히 통과했다.
여러모로 마음 써준 크리스틴에게 정말 고마웠다. 피오나처럼 그녀도 자주 안아줬는데, 시험에 통과한 날에도 우리 둘을 힘껏 안아주며, 다행이라며 고맙다고 말했다. 아니, 정말 우리가 더 고마운데 말이다.
"커피 클래스에 가게 되면 꼭 우리 반에 놀러 와."
수련받고 스승을 떠나가는 사람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크리스틴, 절대 당신을 잊지 않을게!' 하는 우리의 모습에 선생님은 호탕하게 웃었다.
크리스틴과 마지막 수업 날, 공원으로 가 파티를 했다. 캐치볼을 하다, 잠시 쉬려는데 옆에 클로버 무리가 있어,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한 번 네잎클로버를 찾았다. 그날도 하필이면 인스펙션이 있던 날이라, 일찍 가 봐야 했다. 친구들과 크리스틴에게 미안한 인사를 건넸다. 그토록 기다리던 마지막 날인데 아쉬운 마음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여정을 응원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어디에 있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주고받은 마음이 귀해서, 영원하지 않은 순간이 좋아서 멈춰 있을 수 없었다. 불확실함 속에 어떤 인연이 또 생길까 싶은 기대는 마음은 계속해서 힘을 줬다. 고마운 날들이었다.
- 크리스틴에게 전한 네잎클로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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