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 넘어 청소
오래도 걸렸다. 그리고 드디어 끝났다! 마지막 이사. 그토록 원했던 윌리엄 아파트에 살게 되었다. 기적 같은 일처럼 여겨졌다. 호주에 2개월 산 우리가, 이걸 해냈다고? 싶었다. 손과 발, 집요했던 끈질김 모두 제 몫을 했을 테지만, 무엇보다 큰 역할은 렌트를 한 번 해보았던 ‘경험’이 있는 거였다.
처음 집을 구했을 때, 감격스러워 행복에 겨웠으면서 살다 보니 처음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변질된 마음만 남아있었다. 기어코 빠져나와야 할 집으로 기억하게끔 만들었다. 하지만, 그 집이 있었기에 이 순간이 찾아온 거였다. 모든 게, 하나같이, 빠짐없이 지난날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듯 했다.
그러다 문득, 이 집도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곧장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을 떠올렸다.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었다. 이곳은 딱 필요한 가구만 있었다. 커다란 거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게 결코 불행은 가져다주지 않을 거란 확신은 금방 생겼다. 그냥 이 모든 게 기적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서 있는 우리가 이미 말이 안 되는 거라 생각하고 나니 어떤 것이든 그다지 큰일은 아닐 거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 세인트 킬다 비치 앞 부동산
- 윌리엄 아파트 키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들의 안부에 집을 찾고 있다는 말을 매일 같이 해서인지, SNS에 이사 사진을 올렸을 때, 드디어 집을 찾았냐며 많은 이들이 축하의 연락이 왔다. 이전의 하우스 메이트, 지예와 은선도 제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진짜 드디어 끝이네 홈리스 생활!"
"축하해. 너무 고생 많았다."
이건 전부 이 친구들의 덕분이었다. 바닥에 나앉을 뻔했던 걸 구해준 이들이었다. 호주에서 얻은 가장 값진 것이었다. 친구들이 두둑이 채워준 시간들 덕에 새 길 앞에서 망설이지 않을 수 있었다. 지예와 은선은 제 일 마냥 나서 이사를 도왔다. 언젠가 우리가 그랬듯.
- 이사 이사 이사
이사 날.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비가 대수냐며 열심히 짐을 옮겼다. 결국 플라스틱 서랍 모서리를 날려 먹고 택시를 탔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타고 온, 첫째 날을 제외하고는 처음이었다. 택시비가 굉장히 비싸기 때문이다… 드디어 기다리던 청소 시작. 믿을 건 젊은 몸뿐. 곰팡이여, 묵은 때여 전부 와라. 이날을 위해 모아둔 청소용품을 하나 둘 꺼내 들고 서진과 밤새 청소를 했다.
- 차곡차곡 모아 온 청소도구
상상 이상으로 더러웠고 더러운 게 깨끗해질 때의 희열을 이미 잘 아는 우리는, 비포, 애프터 사진을 찍고는 야식을 먹으며 (비위가 상하지도 않는지…) 사진을 구경했다. 우리는 더러웠고 즐거웠다. 곳곳을 건드려가며 씻겨냈고 비워냈다. 누가 먼저 더러운 곳을 발견할 세라 형사처럼 꼼꼼히도 둘러봤다. 우스꽝스럽지만, 잘 정착하고픈 광기라고 해두자. 밤새 우린 집과 화합을 이뤄갔다.
필요한 청소용품과 텅 빈 냉장고를 채울 음식을 사러 마트로 가고 있었다. 아파트에 나와 신호등으로 향하는 길에 바닥에서 무지개를 봤다. 고개를 올려, 하늘을 보니까 빌딩 사이로 진한 무지개가 떠 있었다. 행복하지 않을 수 없을 거 같았다.
- 빌딩 사이 무지개
하루가 멀다 하고 집을 치웠다. 거의 마무리가 됐을 즘, 서진이 일을 간 사이 이불 빨래를 해야겠다 싶어, 핸드카트와 가방에 챙겨 담은 뒤, 나머지는 몸에 두르고 출발했다. 무거운 이불을 끌고 걸어가는데, 웬 무리들이 커다란 매트릭스를 옮기고 있었다. 매트릭스와 이불은 일행처럼 보이기 쉬워 살짝 거리를 두고 걸었다.
며칠이 지나고, 서진과 나는 친구네 집에서 미처 다 챙기지 못한 몇 개의 짐을 나눠 가지고 오고 있었다. 신호에 걸려서 서있는데, 맞은편 거리 여성 둘이서 열심히 행거를 옮기고 있는 걸 보았다. 나와 서진은 누가 먼저라 할 거 없이 ‘저기 봐.’라고 말했다. 우린 빵 터졌다. 데칼코마니도 아니고 맞은편에서 우리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게 너무 웃겼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정말 이 모든 게 우리만의 일이 아니라는 거다. 어딘가에서 모두가 저들의 삶을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다.
- 거리의 우리들
모든 청소를 마치고, 이케아로 향했다. 모든 걸 다 원위치로 시켜두고 온 걸 다시 담으러 갈 차례였다. 이번에는 진짜다. 지난번과 다른 게 있다면, 정말 필요한 것만 샀다는 거다.
- 쇼핑도 늘 캐리어와 함께
지나치게 과정에 빠져 있다 보면, 판단력이 흐려질 때가 온다. ‘왜 이렇게 애쓰고 있지?’, ‘안 되면 어쩌지’ 그런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과정이라는 건, 꿈꾸었던 게 꼭 손에 쥐어져야 만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하나에만 깊이 빠져 애걸복걸한다고 마법처럼, 기적처럼 일어나는 게 아니었단 걸 깨달었다. 충분히 했다 싶어, 이제 그만하자며 마음을 내려놓고 비로소 홀가분해지고 나니, 새로운 게 찾아왔다. 드디어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의 여건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건 참고 견뎌라, 한 우물만 파라, 기어코 해내라고 격려하는 글이 아니다. 될 때까지 할 거라며, 버텨낼 거라고 방금 전만 해도 떵떵거리며 떠들었던 글도 있지만, 이건 그 방법이 진짜 방법이 아니었다는 걸 알아 버리고 난 후에 쓰는 글이다. 그러니까,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온 마음으로 정성을 다 한 건 어떤 결과로든 찾아온다.
아파트를 얻고 기쁨에 취해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집을 얻으려는 과정에만 집착하다 보니, 구해지지 않을 상황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내가 보였다. 그저, 해보는 것에 의의를 두고 그곳에 정성을 다했다면 그걸로 된 거다. 과정 속의 기쁨을 알아낼 줄 알아야 했다. 억지로 해내는 게 아니었다.
과정들 속에서 배워가는 게 있다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생각으로 행하는지에 따라 결과는 계속해서 바뀌어 간다. 우여곡절이 많았어도, 순간순간 과정에 집착하는 마음을 쉽사리 뿌리치기 어려웠어도 부지런히, 움직이면 결국 마주하는 날이 오게 되어 있다. 그러면 또 이곳에서 비롯된 새로운 것에 온 마음을 다 들일 기회가 찾아온다.
- 어느새 가구 조립쯤은 껌이 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