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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도시와의 작별

안녕 퍼스 !

by euuna








퍼스를 떠나기 전 그동안의 추억 묻은 곳들을 다녀오기로 했다. 반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여기에도 많은 정이 들었다. 어딘가에서 머문다는 건 꼭 마음을 주고 오는 일 같다. 그리고 나는 떠나도 내가 준 마음은 그곳에 내내 머무는 듯하다.


멜버른에 돌아간다니. 돌아간다는 표현도 신기했다. 이 커다란 땅에서 돌아갈 곳이라는 게 있다니. 그런 표현을 할 수 있는 게 새로웠다. 친구들과의 작별은 역시나 아쉬웠다. 아쉬운 것 뿐이었다. 마지막을 기념하자며 비아와 팀 리더 친구는 기념으로 남길 만한 것을 만들자고 나와 히로를 위해 원데이 클레스를 예약해두었다. 만들기에 얼마나 집중했던지. 배가 고팠다. 점심을 먹고 아이스크림 가게로 가,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었다.


“우리 가게가 훨씬 맛있다!”비아가 말하고서 깔깔 웃었다.


이런 추억을 나눌 수 잇는 워커가 있다는 게 기뻤다. 농장에서 일할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고마운 마음을 잔뜩 받고서 그렇게 우리는 멜버른으로 갔다.





눈도 덜 뜬 채 로비에 앉아 꾸벅거리며 기다리는 서진을 발견했다.


“이게 얼마만이야.”하고서는 부둥켜 안고 빙빙 돌았다. 새벽에 도착한 비행기라 집으로 들어가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일어나서 서진과 짧은 대화를 나눴다. 떨어져 있는 동안 겪었던 그 날들을 다 이야기 하기엔, 짧아도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히로를 불러 짐 정리를 함께 했고, 우리 셋은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듯 장난치고 떠들었다.


세컨드 비자를 만들겠다고 호기롭게 나서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나 시간이 지났다.


“나는 지예네에서 살기로 했어.”서진에게 말했다.

“진짜? 잘 됐다. 지예 셰어생으로?”

“아니. 내가 지예한테 렌트를 받기로 했어. 이제 지예도 돌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지예는 두 달 뒤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호주에서 조금 더 지낼까 하는 마음도 있는 듯 싶었지만 이내 마음을 다 잡은 거 같았다. 서진은 브리즈번으로 돌아가 서드 비자를 따기 위해 일을 할 거라고 했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과 알 수 없는 일들이 정말 많았다. 호주에 1년만 살겠다던 우리가,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고른 멜버른에서 시작해 서로 다른 곳에서 여정을 펼쳐 나가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너는 더 있을 생각 없어?” 서진이 물었다.

“아니. 나는 이제 마지막이야.” 서진은 아깝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 마지막이다. 이정도면 호주는 내게 충분했다. 이미 긴 시간이었다. 호주에 더 남아 있고 싶다는 서진이 부럽고, 한국으로 돌아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지예도 부러웠다. 나는 여기서 남은 삶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 돌아가서는 또 어떻게 살 건지 생각해야 했다.


호주에서의 정처 없이 떠돌던 생활도 이제는 마지막이라며 마음을 다 잡았다. 히로는 옆에서 제멋대로 맞장구 쳤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멜버른에서 후회없는 시간 보내고 남은 시간은 여행하자.”

“좋은 생각이다!”


작은 목표라면, 앞으로는 하기 어려울 영어도 실컷하고, 이런 저런 경험도 잔뜩 쌓고, 돈도 열심히 모아서 한 달 동안은 가보지 못한 다른 지역을 여행하기로 했다. 아쉬움이 없을 정도로 놀기로 마음 먹었다. 그럼에도 남아있을 아쉬움은 남아있어서 좋은 아쉬움으로 기억하기로 했다.




아빠는 가끔 ‘약간 아쉬워야지, 약간 부족해야 좋은 거다.’라고 말하곤 했는데, 지나보니 그 말이 이해가 된다. 완벽한 것들은 없고, 완벽해질 수도 없다. 부족한 듯, 아쉬운 듯 해야 더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었다. 약간의 아쉽고 부족한 맛이 이곳을 더 행복하게 기억할 수 있게 할거라 믿었다. 그러니까 너무 애쓸 필요 없고,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살 수 없고 알 수 없는 미묘한 중간을 잘 지키며 살고 싶었다.






멜버른에서의 구직 생활이 시작됐다. 다양한 곳으로부터 면접을 봤다. 발품을 팔며 다니면서 트라이얼 기회도 얻었다. 이렇게나 가게들이 다양한데, 왜 내가 일할 곳은 없단 말인가.


절망에도 자주 빠지고 다시 일어나길 반복했다. 트라이얼 이후 연락 온 곳도 시간이나 요구하는 조건을 들어보면 안 되겠다 싶은 곳이 많았다. 그러다가 어학원에서 보조업무를 하는 일을 구하게 됐다. 페이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잠시나마 영어 공부도 하고 친구도 사귈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머지 않아, 파트너 선생님께 집안 사정이 생겨 못 나오시게 되고 그렇게 내 일도 정리가 됐다.


며칠 방황하며 전에 배운 카페 스킬을 살려야 하나 싶어, 다시 바리스타 수업을 들으러 갔다. 커피 만드는 속도는 1등 했고 라떼 아트 시간에는 꼴지를 했다. 샷 추출하던 어제는 선생님이 나를 베스트 학생이라며 치켜 세워 주셨는데 부드러운 손목 스냅과 인내심을 요하는 라떼아트는 말짱꽝이었는지 오늘은 눈길만 피하셨다. 하지만 그럴 만도 했다.


- ^^


- 믿기 어렵겠지만 매일 맹연습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일을 구했다. 일식당의 홀스텝. 하지만 일본인은 단 한 명도 없는 곳. 신기하게도 호주에 있는 일식당은 한국인 스테프가 많다. 일식당 홀스텝 일은 생각한 거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나는 사람들과 일하는 게 좋다. 그리고 할 일이 많은 게 좋다. 한가해서 할 일이 없는 것보다 이것 저것 조금씩 할 일들이 있는 일이 좋았다. 가게가 엄청 바쁜 건 아니었는데 홀 전체를 담당하는 일이라 배우는 재미가 있었다. 같이 일하는 친구들도 또래라 마음이 잘 맞았다.


요치에서 배운 영어는 이곳에서 너무나도 쉽고 요긴하게 쓰였다. 자주 오는 단골들과는 스몰토크를 하는 게 어렵게만 느껴지지 않았고 짧은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보람을 느꼈다.


가게 주인은 따로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사람은 매니저님들이었다. 트라이얼을 할 적부터 일을 배우는 것까지 여자 매니저와 했다. 호랑이같은 스타일이지만, 당근과 채찍을 유연하게 줄 주 아는 사람이었다.

“잘 했어!”하고 시원하게 칭찬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다시 해. 네가 혼자 해.”하고서 매서워질 때도 있었다.


사람마다 상생, 상극이 있는데 나는 왜인지 약간 세고 확실하고 시원한 여자들과 잘 맞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FM같기도 하고 잡을 땐 확실히, 제대로 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런 사람에게 배우면 하나를 하더라도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방향으로 머리를 굴릴 수 있었다.


여자 매니저가 그런 역할을 적절하게 해 주셔서 간간히 받은 스트레서도 나쁜 기억으로만 남지 않았다.


반면 남자 매니저는 굉장히 서글한 사람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주변이들과의 관계도 늘 원만했다. 자신도 워커 출신이라 그런지 워커 신경을 많이 썼다. 가끔 키친에서 셰프와 워커가 부딪치는 일이 생길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에도 자신의 선에서 최대한 잘 해결할 수 있도록 조율했다. 덕분에 일하는 동안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이곳을 호주의 마지막 일터로 생각하기로 했다.


호주에서는 정말 다양한 한국 사람을 만났다. 신기할 정도로 비슷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놀라울 정도로 다른 사람도 많았다. 모든 사람의 삶이 다르고 그들이 인생에서 중요시 여겼던 것들이 다르니 잠깐 말을 섞는다고 잠시 생활을 같이 한다고 전부 이해받고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연유로 만난 인연들 속에 배운 것들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물론 여러 다른 나라 친구들과도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 속에서 세계가 커졌다.



- 여유 독서 사랑 댄스



내 스스로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하라고 한다면, 난 조금 편견도 있고 아마 고지식한 부분도 낭낭한 사람일 거같다. 호주에서 내가 모르던 그런 면모를 종종 보곤 했다. 하지만 돌아와서 지난 날의 나와 비교해보면 참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새로운 벽을 뚫고 나온 거 같았다. 어떤 면으로는 발전했을테고 어떤 면으로는 최악으로 달렸을지도 모른다.


옳다고 생각하던 믿음과 맞다고 여기던 것들이 제대로 틀리고 깨지고 이탈하면서 깨닫는 것들이 많았다. 근성이라 부르기 애매한 오기 같은 것들도 쌓이고 아는 게 많아 질수록, 경험이 쌓일 수록 고집도 생겼다. 어느 때나 화평하고도 평온함을 유지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될 때도 많았다. 다른 세상으로 나와서야 깊고도 깊이 나를 들여다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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