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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는 나이스 타이밍 !

by euuna








작년, 이 맘 때쯤 서진과 나는 멜버른에서 렌트를 했다. 이름도 귀여운 윌리엄 아파트. 이제 곧 아파트의 계약 만료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일전에 한 번 가서 짐을 정리한 적이 있어, 크게 할 일은 없었지만 멜버른에 한 번 가야 했다. 업체를 불러 퇴거 청소도 해야 하고 부동산과 연락해, 집을 검사 받은 후 키를 전달해 주어야 했다. 오랜만에 서진이 연락이 왔다.

“잘 지내? 우리 이제 곧 렌트 정리해야 하잖아.”

“너 멜버른 언제 갈 거야?”

오랜만에 서진을 볼 수 있었다. 히로도 같이 오냐는 물음에 결정되면 알려주겠다는 말을 끝으로 짧은 통화를 마쳤다.

그 무렵, 요치에 본사 직원이 온다고 했다. 그동안 규범에 살짝씩 어긋나 있던 것들이 꽤 있었는지, 제자리로 돌려 두느라 직원들이 바빴다. 그런 와중에도 제 날짜에 일을 못한다는 워커들은 빗발쳤고 스케줄 짜기가 고된 팀리더는 퇴근 후면 매일같이 우리집으로 와 늦은 새벽에 돌아갔다.

그 괴로움 호소 모임은 점점 판이 커져, 요치에서 일하는 비아와 비아의 언니까지 합세해, 우리집으로 함께 퇴근했다. 그리고 언젠가 함께 즐겼던 그 날처럼, 노래방 파티를 열었다. 어쩌다 한 번씩이라면 신나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출석체크 하는 마냥 집에 찾아와서 어쩌다 가끔 워커들 없는 저녁 시간을 보냈다.


- 비아와 나


방문 바로 앞에는 티비 스크린과 노래방 기계가 있었는데, 하필이면 방문이 없는 곳에서 지내는지라 문을 닫는다고 해도 커튼 치는 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시끄러운 나날이었다. 쉬고 싶은 날에도 좀처럼 쉴 수 없었다. 이 친구들의 유일무이하게 스트레스 푸는 시간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새벽 늦게까지 놀다 돌아가는 날이면, 미안하다는 메시지가 오는 날도 있었다. 귀마개를 끼고도 들리는 노래를 자장가 삼아 자는 바람에 제때 답장은 못 했다.

히로와 나는 피로 누적이 무엇인지 제대로 체감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졸고, 시간만 생기면 잠을 자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여기가 집인지, 일터인지 분간이 안 간다.” 히로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아니,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쉬어도 쉬는 기분이 아니었다.

몇 번의 대타 부탁에, 나가다 거절하는 날들이 생기기도 했다. 그리고 티아나와 대타 주제로 화두에 오른 어느 날이었다. 가끔은 쉬고 싶다는 말에, 그녀는 웃더니 말했다.

“돈 많이 벌고 싶은 거 아니야?”

“호주 십 대들은 너무 게으르지. 하지만 아시안 애들은 달라.”

“한국이나 일본 사람들을 생각해 봐. 열심히 일하지?”

“아시안 애들이 일을 잘해.”

이게 좋은 말인 건지, 아니면 그런 호주 십 대들이랑 일하는 걸 고려해서, 아시안 이십 대인 우리가 이해하라는 건지. 아무튼 티아나는 어깨를 두드리며, ‘벌 수 있을 때, 많이 벌면 좋잖아.’하고서는 자신이 백화점 점원으로 일을 하는데, 이런 식으로 해 달라고 하면 무조건, 어떤 일이 있어도 나간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가게가 백화점이 있는 동네처럼 가까웠더라면, 내 체력이 넉넉했더라면 나 또한 거절할 일이라고는 많이 없었겠지만 말이다.





티아나는 한 번 걸리면 아주 길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도움이 되는 듣기 평가다.’ 라고 생각했고, 나중에는 ‘또 같은 말이네.’ 싶었다. 티아나는 따뜻한 엄마 같은 사람이었지만, 정말로 우리 엄마는 아니었으므로 가끔은 선을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히로는 더는 안 되겠다며, 자신의 시간만큼은 지키겠다고 했다. 일본인 친구들에게 자신이 배운 방식으로 한국어를 가르쳐 주는 일을 하고 싶다고 작은 부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런 방식으로 제 시간을 확보할 때마다, 티아나는 못마땅히 여겼다. 우리가 그녀의 딸들이 일 할 수 없는 시간에 가서 일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많았으면 했다. 그래서 우리를 뽑았는데 말이다.

어쩔 수 없이, 반 자의 반 타의로 우리는 바깥에서 시간을 자주 보냈다. 집에서 쉬어도 쉬는 기분이 아니라 근처 바다에 자주 갔다. 집에서 20분 정도 버스 타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이곳은 정말, 정말 아름다운 바다다. 퍼스의 스카로보 비치. 단언컨대, 내가 봤던 호주에서의 바다 중 가장 예쁜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자주 바다로 가, 석양을 보고 집 앞의 큰 호수를 낀 공원으로 가, 산책했다. 나는 책도 읽고 그림도 그리고 히로는 노래를 듣다 낮잠을 잤다. 퍼스는 유독 날씨가 좋아서 언제 나가도 좋았고 그래서 바깥에서 흘려보내는 시간도 아깝지 않았다. 한적하고 여유 있는 시간. 하지만, 이 한적과 여유는 다르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루하고 심심하고 지나치게 고요한 정도로도 말이다.

- Jackadder Lake


- Scarborough Beach


집으로 돌아가서 티아나 가족들을 마주할 때면 어딘가 불편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들에게도 점차 우리가 너무 불편한 존재로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히로와 나는 시간 나면, 다른 일자리를 찾고는 했다. 이 가족들과 지내는 시간이 나쁜 건 아니었지만, 힘들어지고는 있었다. 집을 나오는 것도 일을 그만두는 것도 잘 해야만 했다. 둘 중 하나만 하는 것도 마음에 걸리는 이상한 일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예로부터 연락이 왔다.

“퍼스 생활 어때!”

“좋지! 좋긴한데...”

그날 밤, 지예와 나, 히로는 그동안 퍼스에서 있었던 수많은 이야기를 풀었다. 물론 현재 맞닥뜨린 문제도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 말에 가만히 듣던 지예는,

“야, 멜버른으로 다시 돌아와 그럼.”

곧바로 지예는 말을 이었다.

“우리 집 와서 살아.”

“또?” 나는 놀라 되물었다.

“아니, 우리 집 비어.”

지예의 집에 셰어생이 나가면서 빈방이 생겼고 괜찮다면, 거기서 같이 사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게다가 지예는 곧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라, 원한다면 이 아파트를 테이크 오버 받아도 좋다고 했다. 테이크 오버란 렌트 계약을 대신 이어받는 것을 말한다. 이 아파트의 장점은 부동산이 짧은 계약기간도 받아준다는 거였다. 다시 멜버른이라니.

사실 요즘 히로와 가장 많이 나누던 이야기가 멜버른이었다. 막연히 다시 돌아갈지 고민하기도 했었다. 퍼스도 물론 좋지만, 지겨워진 마음도 없진 않았다. 어차피 한 번은 멜버른에 가야 하는 일이었고 렌트 정리도 할겸 지예도 만나 다시 대화를 나누면 좋겠다 싶었다.


얼마 뒤, 티아나와 거실에 앉아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솔직했다. 우리를 처음 봤을 때일 구하기가 급해 보였고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할 거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국적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대타를 요구하는 워커들 사이에서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세레나에게 요치에서 일할 수 있도록 우리를 추천한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다는 거였다. 하지만 이렇게나 우리 시간이 없을 정도로 자주일 줄은 몰랐다는 내 말에, 티아나는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혹시 다른 계획 있어?”

다른 일이라던가, 이사에 대한 말일까 싶어, 나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멜버른에 렌트를 해둔 집이 있는데 계약 만료일이 곧이라 정리를 하러 잠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 그리고 친구가 렌트를 해 둔 집이 있는데 테이크오버 제안받아서 돌아갈까 싶기도 하다는 것.

티아나는 그것도 좋은 생각이라며 받아치더니,

“사실 애들 외삼촌이 올 계획이라 너희가 언제쯤 나갈 예정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어.”라고 말했다.

아이들의 외삼촌이 호주 퍼스에서 지내기 위해 말레이시아에서 올 계획이 있다는 거였다. 그래서 방이 필요한데 우리가 나갈 예정이라면 그 방에서 지낼 수 있게 하고 싶다는 거였다. 티아나가 둘러서 말하는 걸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좋은 타이밍인듯했다.

“지금 당장 정리해서 나가라는 거 아니야. 그냥 혹시 다른 계획이 있는 걸 알고 싶었을 뿐이야. 다른 가족들 집도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하고 덧붙였다.

이런 말까지도 그녀의 선 안에서 배려하는 듯 느껴졌다. 다행히, 얼굴 붉히며 맞는 마지막은 아니겠다 싶어 한시름 놓았다, 티아나가 원하는 만큼 우리가 따라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도 컸다. 재미있었던 요치 일도 4개월 조금 넘는 기간 동안, 긴 시간은 아니었어도 정말 많은 것들을 배웠다. 멜버른에 돌아가서는 배운 것들을 요긴하게 써먹으면서 지내고 싶었다.

지예는 내가 퍼스를 떠나기 전, 여행을 하고 싶다며 멜버른에서 날아왔다. 퍼스에서 짧은 여행 후 발리로 넘어가 남은 휴일을 잔뜩 즐겼다. 호주에서 다른 나라로 여행 간다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지예랑은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오래된 친구처럼 여러 깊은 대화를 나눴다. 여러모로 가득 충전해서, 돌아갈 멜버른에서도 건강히, 잘 지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 지예와 또 다녀온 로트네스트 !


- 발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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