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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듯 꿈을 꾸듯

재미있게 살기 !

by euuna







시간이 얼마나 빨리 흐르는지. 지예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살면서도, 둘 다 쉬는 날을 맞추기가 어려워 같이 시간 보내는 게 마냥 쉽지 않았다. 지예는 첫 만남에서 인사를 나누고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친해졌다. 성향도, 성격도 심지어 생일과 태몽까지 비슷한 우리는 통하는 게 많았다. 한 번 이야기를 화두에 올리고서 아주 오랫동안 이어갔다. 우리는 어떤 주제로든 계속해 생각을 나눌 수 있었다. 그래서 지예랑 있으면 자꾸만 별소리를 다 하게 됐다. 그래서 지예는 내게 별 걸 다 줬다. 조언도 충고도 공감도 그 어떤 것도 아끼지 않았다.


지예와의 마지막은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공원에 가기로 했다. 온종일 걷고 해가 질 때까지 사람과 강아지를 구경했다. 커다란 골드 리트리버 한 마리가 우리 사이로 쏙 들어와 앉았다. 우리 팔에 번갈아 기대어 있었다. 주인이 부르는데도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이기에 이제 그만 돌아가라며 보냈다. 지예와 나 사이의 그 작은 틈으로 비집고 들어온 강아지들이 그 이후로도 두 마리나 더 있었다. 정말 웃기고 귀여운 일이었다.





“왜 너랑 있으면 이렇게 웃긴 일만 일어나는 거 같지?” 지예가 말했다.

“내가 방금 말하려 했던 거야.” 내가 대답했다.


지예랑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지예는 호주에 조금 더 남아 있을지, 한국으로 돌아갈지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그리고 얼마 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며 확신의 눈빛과 함께 이야기하는 지예가 어딘가 모르게 빛났다. 전부터 꿈꾸던 바텐더의 길에 더 가까워지기 위한 도전을 하겠단다.






얼마 전, 지예와 발리 여행을 갔을 때였다. 우붓에 있는 분위기 좋은 칵테일 바를 알아 온 지예를 따라 비 오는 거리를 걸었다. 좋은 향기에 친절한 사람들. 우리는 여러 술을 함께 마시고 바꿔 마셔가며 시간을 보냈다. 지예는 여독을 칵테일로 풀었다. 한 잔씩 나올 때마다, 유심히 바텐더의 이야기를 듣고는 몇 차례 질문도 하고 내게 설명해 주었다. 어느 칵테일에 대한 유래, 칵테일 잔에 담긴 재미있는 이야기 등 지예는 칵테일 이야기보따리를 가지는 듯했다.


칵테일에 대한 지식이 없던 나는 처음으로 듣는 이 이야기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흥미로웠다. 그걸 지예의 입으로 들으니 더 재미있었다. 재주가 있었다. 좋아하는 것을 숨기지 않고 아낌없이 전달할 수 있는 능력.


지예의 집에도 술이 많았다. 친구들이 올 때면 대접하겠다고 아끼는 술을 아낌없이 꺼냈다. 전문가 다운 포스로 칵테일 도구를 쓰는 지예를 보고 있으면, 나는 자꾸 상상하게 됐다. 언젠가 자신이 원하는 분위기의 바에서 바텐더로 일하고 있을 지예의 모습이 말이다. 지예 없이 간 펍이나 칵테일 바에서도 지예를 자주 생각했다. 술을 그렇게 잘하지도 않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만 지예가 주는 건 좋았다. 적당하고 맛있었다. 술에 담긴 이야기도 좋았다. 지예의 추억이 담긴 그런 이야기들이. 누군가를 초대한 날에는 늘 레몬과 라임을 사러 나갔다. 아침 일찍, 밤늦게, 일을 마치고서도 빵빵한 봉지를 양손 가득 들고 돌아왔다. 칵테일과 어울리는 음식도 만들어 주려고. 지예의 게으르지 않은 애정이 좋았다. 누구보다도 응원하고 싶었다.



- IBU SUSU



그러니까 지예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 꽤 쓸쓸한 일이지만, 기대가 되는 일이기도 했다. 지예는 한다면 하는 애라서 꼭 할 거 같았다. 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그것도 잘할 거 같았다.


지예를 마중하고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곧 새로운 셰어생이 온다. 몇 차례 인스펙션을 하면서 아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친구였다. 멜버른 아파트는 1월에 정리를 하기로 했다. 셰어생 지현이는 날짜며, 집세며, 위치며 모든 면에서 서로의 조건에 완벽히 일치했다. 지예가 가고 조용했던 집에 지현이 오고 새 활기를 띠었다.


“언니~ 제가 만든 거 한번 드셔보실래요?”

“언니~ 쉬시는 날 여기 한번 가보실래요?”


말을 제발 편하게 하래도 생글생글 웃으며 깍듯하고 다정하게 대해주는 지현이는 방문을 조용히 똑똑-하고서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왔다. 지현이 덕에 심심하지 않았다. 지현이도 어느새 내게 의지하기 시작했고, 음식을 나눠 먹고 고민을 나누고 걱정거리를 들어주고 도울 수 있는 문젯거리를 해결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지예의 방에서 지현이가 나오는 게 낯설었는데 어느새 너무 익숙해져 자주 놀러 가곤 했다. 멀어지는 관계 속에서 가까워지는 관계가 새로 피어나는 게 이제는 익숙해질 일이었다.



- 호주에서의 마지막 집 콜린스



정에 약한 내가, 너무 가까워지면 헤어질 때 너무 어려울 거라고 새어 나오는 마음을 억지로 막아 댔던 지난날들이 꽤 후회됐다. 사람 간의 사이라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건데 말이다. 마음이라는 것도 다 잡을 수 있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한정된 인연에서 남을 미련이 두려워서 미련한 짓도 많이 했었다. 호주살이의 끝물에서야 그걸 깨달았다. 기왕 가지고 있는 거 무아지경으로 줘 볼 걸. 정이라는 게 뭐 그렇게 아까운 거라고.


추석이 다가왔다. 호주에는 추석이란 건 없지만, 기분이라도 내자고 추석 음식을 만들기로 했다. 히로에게 추석에 대해 이야기해 주며 같이 음식을 만들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어서 아는 추석 음식을 나열했다. 추석에 관해 설명을 해주면서 같이 만들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 싶어 꼬치도 만들었다. 이쑤시개가 없어 파스타 면을 잘라 썼다.


“한국 사람들은 좋겠다. 매일 이런 거 먹어서.”

“야 이걸 어떻게 매일 먹어.”


히로의 말에 지내야 할 제사가 많았던 어릴 적이 생각났다. 정성 들이는 차례상과 제사상이 비슷해 보여 몇 차례의 제사 뒤 다가오는 추석이면 어쩐지 음식이 지겹게 느껴졌다.




또 별개로, 아마 한국으로 돌아가면, 호주가 그립겠지. 그러면 그때야 나의 2년이, 길다면 긴, 짧다면 짧은 그 시간 안에도 내가 만든, 자연스럽게 저장해 둔 추억들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 거다. 나는 내 몸이 두 개인 양,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자주 여행하겠지. 기억으로 추억으로 말이다.


그래서 이 생활을 더 열심히 즐기기로 했다. 지독하게 그리워질 이 순간들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평생을 살다가 가야지. 지금도 여러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얼마나 우습고 재미난 일들이 많았는지. 곱씹고 웃을 수 있단 것에 너무나 감사하다.


홀스텝 일은 점차 적응돼, 이제는 바쁘지 않을 때 단골이 오면 스몰톡을 넘어 대화 상대가 되어 주기도 하고, 셰프님들과도 가까워져, 맛있는 것도 종종 얻어먹었다. 같이 일하는 워커 친구들과도 휴일이나, 쉬는 시간을 맞춰 틈틈이 시간을 보냈다. 할 줄 아는 것들이 많아지고, 더 할 수 있을 거라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그렇게 배우는 것도, 얻은 것도 많았다. 호주의 일상을 열심히 남겼다. 영상을 찍고 블로그를 쓰고 인화한 사진으로 앨범을 만들고 흔적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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