ㅍ아가야, 오늘은 임산부와 배려에 대해 얘기해보려고 해. 너도 임산부 배지에 대해서 지난번에 얘기해서 어렴풋이 알고는 있겠지?
핑크배지라고도 불리는 이 '신기한 물건'은 임산부에게 보급된 '전투물자' 중에 하나야. 사람들은 이 핑크배지를 보고 소지자가 임산부임을 알게 돼.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임신 초기에는 임산부의 배가 눈에 띄게 나오지 않았지만, 임산부가 신체적으로 매우 취약한 시기야. 대부분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고 어지러움도 많이 느끼기도 하는데 건강상태가 매우 좋지 않지. 배려가 많이 필요한 초기 임산부들이 핑크배지를 들고 있음으로써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이 핑크색은 사회적으로 '여성' 또는 '여성과 관련된' 색으로 고정관념처럼 각인이 되어 있어. 마치 '여성의 색상'처럼 말이지. 백화점이나 마트, 주차장과 같은 곳에 여성 우선 주차공간으로 핑크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여성 배려 주차공간, 서울 지하철에 핑크색으로 칠해진 임산부 배려석, 그리고 아빠가 말한 핑크색 임산부 배지 등등이 있어.
이런 것들을 보면 네가 아는 핑크색은 단순히 예쁜 색상 중 하나라기보다는 여성을, 다시 말해 아직은 우리 사회에 보살핌과 배려가 필요한 집단을 상징한 색상이 된 것 같기도 해. 물론, 여성 모두를 사회적 약자라고 정의해 버린다는 것 자체가 폭력이라는 반론도 있어. 이 주제는 지금 너에겐 너무 어려운 얘기라 나중에 네가 커가면서 차츰 공부해 봐도 될 듯해.
어쨌든, 엄마가 임신하고 우리도 그 핑크배지를 실물영접하게 되었어. 지역 보건소에서 발급해 주는 데, 엄마도 핑크배지를 수령하고 한참 동안 만지작 거렸지. 남들의 가방에 곱게 매여 있던 것을 직접 가지게 되니 그게 너무도 신기했나 봐.
“우와 이 것이 그 유명한 '핑크배지'... 내가 차고 다니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런데 사람들한테 자리를 비켜달라고 압박주는 것 같지 않나요? 괜히 그런 오해를 살까 봐 솔직히 잘 차고 다닐지는 의문이에요.”
아빠는 엄마의 '쓸데없는 걱정'에 웃으며 대답했어.
“여보, 요즘 출산율 바닥이라고 나라에서 그 난리를 치고 사람들도 걱정 많이 하는데요. 이제 임산부는 '벼슬'이라니까요? 아주 당당하게 배지를 눈앞에 들이밀고 나오라고 해요. 하하"
“에이 그러다 괜히 막 싸움 나고 그러면 애기한테 또 안 좋은 영향 갈 수 있잖아요. 배려잖아요, 강요할 수는 없잖아요. 안 비켜주면 참아야죠.”
아마 대부분 임산부들이 이런 마음들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사람들이 ‘뭐야 임산부라고 비켜달라는 거야?’라는 생각을 가지고, 또는 거칠게 항의할까 봐 조심스러워하는 것일 테니까. 아빠도 농담처럼 핑크배지를 무기로 사용하라고 했지만, 실제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지. 우리가 나서서 'X호선 임산부 커플' 영상의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으니까.
정말 속상한 일도 많았어. 하루는 엄마랑 함께 퇴근하고 함께 집으로 가는데 그날따라 엄마는 심하게 어지러움을 호소했고, 눈조차 뜨기 힘들어했어. 옆에서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는데, 안타깝게 임산부 배려석은 꽉꽉 차 있었지. 대부분 아주머니들께서 앉아계셨는데 그분들도 나름대로 힘드시겠지라는 생각으로 우리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섭섭하긴 했어. 또 요새는 정중하게 부탁을 해도 핀잔을 주는 경우도 많다고 하더라고. 엄마도 괜히 사사로운 시비에 휘말리면 뱃속에 있는 네가 놀랄 수도 있으니 그냥 핑크배지를 가린 채 서 있었어. 그때 이해가 가더라. 왜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핑크 배지를 차고 나오지 않는지.
임산부가 아닌 승객이 배려석을 차지하고 있다는 민원은 서울교통공사에만 매달 400건 이상 접수된다고 해.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조사한 '2023년 임산부 배려 인식 및 실천 수준 조사 결과'에 따르면 임산부 배려석을 이용해 본 86.8% 임산부 중 42.2%는 '이용이 쉽지 않았다'라고 했다고 해. 임산부 배려문화를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야.
‘나도 직장 다니느라 힘들고 지치는데 왜 우리에게 배려와 양보를 강요하냐’라는 불만과 반문도 충분히 이해는 가. 아빠도 지하철이나 버스 타고 왔다 갔다 하면 너무나도 앉아서 가고 싶기도 하거든. 그렇지만 엄마를 보면서 느꼈어. 임산부가 느끼는 어려움은 단순히 힘든 정도가 아니구나라는 걸 말이야. 그리고 잘 못되면 한 생명이 위태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 사회가 그 소중함을 조금 무겁게 봐야 하진 않을까 생각해.
임산부 배려석이 필요한 이유는 단순히 힘든 임산부를 쉬게 하자는 취지보다는 태아의 유산 위험성 때문이거든. 오래 서있는 것은 척추와 골반에 무리를 주기 때문에 분명한 인과관계가 있다고도 해. 이 사실을 알고 엄마가 어지러움을 느낄 때 임산부 배려석이 '비임산부'로 차있으면 아빠는 매우 날카로워졌었어. 시끄러운 일을 내기 싫어하는 엄마 덕에 뭐라 말도 못 하는 상황이었지만.
물론, 이런 소수의 사례와는 달리 많은 분들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엄마의 임산부 배지를 보고 자리를 양보해 주셨어. 짧은 응원의 메시지도 함께 주셨고 말이야. 특히 임신 초기에는 조금만 걸어도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몸이 좋진 않았는데, 그때 양보해 주신 분들의 얼굴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이 지면을 통해서 그분들 게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을 전달하려 해.
핑크색은 권리일까? 배려의 강요일까? 출산을 몇 주 앞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권리도, 배려도 아니고 그것의 강요는 더더욱 아닌 것 같아. 이런 말로 행동의 규범을 정하기보다는 '따뜻함'이라고 표현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해. 핑크색을 통해 우리 사회의 온기의 정도를 느낄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오늘도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