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야, 오늘은 타인에게 임신의 기쁨을 나누기 전 아빠의 생각과 행동들을 얘기해주고 싶어. 아빠의 오만한 생각으로 얼마나 바보 같은 행동을 했는지 꼭 말해주고 싶어.
한 생명을 잉태하는 것은 너무나 큰 일이기에 머뭇거려지기도, 두렵기까지 해. 그렇지만 생명의 신비함과 숭고함 때문에 임신이라는 것은 언제나 설레고 기대되는 일일 것이야. 그렇기에 임신 소식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축하하며 축복해 주지.
그렇지만 내 의지대로 마음대로 임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야. 지금도 많은 부부들이 아이를 간절히 원함에도 다양한 원인으로 인해 품지 못하고 있어. 불임이나 난임이 될 경우 크나큰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고, 또 막대한 돈을 쓰기도 하지. 나이가 들어가면서 초조함은 파도처럼 다가올 테고 말이야. 그 아저씨 아줌마들이 무언가를 잘 못해서 그렇냐고? 그렇지 않아. 앞서 말했듯이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거지. 신이 있다면 그들을 보호해 주길 바라..
아빠 옆자리에는 정말 훌륭하고 멋진 동료가 있어. 40대 중반의 그 직원이 아빠가 일하는 부서로 전입을 왔고 함께 식사를 한 자리에서 가족사항을 묻자 아이가 없다는 얘기를 했지.
“자의였던 것은 아니에요”
우리가 놀랄까 봐, 혹은 그 자신의 슬픔에 휩싸일까 봐 하는 말이었는지는 모르겠어. 그렇지만 빙빙 돌려하는 말이 오히려 아빠를 더 숙연케 만들었어.
“아, 아이고 그렇게 안 놀라도 되어요. 전 아내와 계속 신혼처럼 잘 지내고 있으니까요”
어렵사리 위로의 말을 꺼내려고 했던 아빠의 입을 그가 먼저 막었어.
“아기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준대요. 우리 부서에 애 셋을 키우고 있는 저 직원을 봐봐요. 완전 어른 같지 않나요? 그에 비해 저는 아직 애 같죠? 하하"
그 직원의 가정사(?)를 알게 된 이후로 엄마의 임신사실을 알리기가 더욱 조심스러웠어. 물론 그 직원은 네가 이 땅에 내려온 것에 대해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축하를 해주겠지만, 아빠가 행복해하는 모습이 그에게 어떤 상처 난 기억을 불러일으킬지 두려웠어. 내 자랑이 그의 마음에 아린 파편을 집어넣는다는 생각을 하니 임신 사실을 밝히는 것도 괜히 미안해지더라.
문제는 아빠가 네 얘기를 꺼내지 않는 것 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어. 사무실 내에서 다른 분들이 임신한 엄마와 태아인 너의 건강상태를 물어왔거든. 아빠로서는 매우 감사한 일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그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어. 기쁜 얼굴로 호들갑 떨 수도 없었고, 항상 대답을 떨떠름하게 할 수밖에. 애정을 가지고 근황을 묻는 사람들에게 '아니꼬운' 사람이 되어버리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 집사람이요? 뭐 이상은 없는 것 같은데 검사받아봐야죠.”, “태아 상태가 어떨지는 병원 가봐야 알 것 같네요." “예, 요새는 잘 있는 것 같아요. 전 일한다고 정신이 없어서....”
이런 식으로 답변을 하다 보니 아빠는 신경을 써주신 분들께 내심 미안해지더라고. 그래서 사무실 직원뜰을 한 명씩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어. 물어봐주는 선의에 대해서는 너무 감사하지만 임신 관련 얘기로 사무실의 빈 스피커를 채우는 것이 조금 불편하다는 말도 했어. 얘길 들은 직원들은 아빠를 이해해 줬어.
물론 내가 이렇게 다른 직원들을 찾아가며 얘기를 했던 것이 그 직원분이 알면 더 속상해 할 수도 있어. 그분은 자신의 속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아빠에게 털어놓기도 했고, 정말 진심으로 너의 탄생을 기다리며 축하해 주었기에 말이지.
또 다른 경우는 임신을 위해서 노력 중인 사람들 앞에서의 '임밍아웃이'었어. 아빠의 고등학교 여자 동창생은 남편과 함께 아이를 가지기 위해 열심히 노력 중이었어. 그 동창생은 아빠와 엄마보다 훨씬 더 빨리 결혼을 했었고, 아이를 가지기 위한 준비도 오래 했었단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쉽지 않은 것 같아.
아빠는 친구들에게 엄마의 임신 소식을 알려야 하는 상황에서, 또 한 번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어. 아빠는 동창생들과 단체 메신저방을 만들어 그곳에서 서로의 근황을 물어보며 연락을 주고받았는데, 그 여동창생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지. 그 친구가 열심히 노력해도 안 되는 임신을 결혼한 지 두세 달도 안되어서 덜컥 애를 가졌다고 하면 얼마나 힘이 빠질까라는 생각도 들더라고.
‘어떻게 하지? 개개인별로 전화해서 알려야 하나? 단체 메신저 채팅방이 낫겠지? 발랄하게 얘기해야 하나? 서프라이즈?’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 한 채 카카오톡 단체 방에 메시지를 보냈어.
“7주 차....”
소심한 '임밍아웃' 메시지를 남기고 답장이 오기 전까지 발을 동동 굴렀지. 제발 너무 '자랑'처럼 보이지 않기를. 그 친구가 상처 아닌 힘을 받기를.
기우였을까? 아빠 친구들의 열화와 같은 축하가 쏟아졌어. 특히 그 여자동창생은 성별은 나왔는지, 허니문베이지(?)인지를 물어보며 따뜻한 관심을 보내기도 했고, ‘제발! 엄마 닮아라’는 덕담(?)도 해주었어. 또 엄마가 섭섭한 마음이 들지 않게 아빠가 잘하라는 당부의 얘기도 잊지 않았지.
'왜 괜한 걱정을 한 거지?'
그 친구의 메시지를 보면서 정말 마음이 편했어.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유난 떨었던 것 같기도 해. 아빠의 기쁨이 누군가의 아픔을 자극하고 초조함을 불러일으키지 않기를 바라며 한 행동이었지만, 어찌 보면 어설프고 오만한 '배려'였던 것 같아.
오히려 아빠 스스로가 당당하게 얘기하고 축하받을 용기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어. 정작 아빠의 주변사람들은 아빠를 열렬히 축하해 줄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