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야,
아빠가 좋아하는 음식 중에 하나가 '잔치국수'야.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면 요리인데, 잔칫날에 나누어 먹던 국수에서 유래되었다고 해. 따뜻한 멸치 육수에 소면을 말고, 다양한 고명을 얹어서 먹는 요리인데, 참 소박하지만 또 푸근해지는 요리인 것 같아. 꼭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우리네 삶의 평범한 순간들을 넉넉하게 채워주던 음식이지.
어느 날 엄마가 퇴근한 아빠에게 처음으로 잔치국수 요리를 해주었는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단다. 소박한 식탁 위에서도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행복을 주는 요리였던 것 같아. 널찍한 면기에 정갈하게 담긴 잔치국수를 떠서 맛있게 먹는 아빠를 보는 엄마의 얼굴엔 웃음이 한가득이었어. 5성급 호텔의 화려한 요리가 아니더라도 우리 가정에 더 없는 행복을 가져다주었던 요리 같아.
엄마는 전세사기와 막대한 변호사 비용, 그리고 앞으로 네 앞으로 써야 될 돈을 생각하면서 부쩍이나 힘들어했단다. 불러져 가는 배를 쓸어내리면서도, 엄마의 눈은 종종 스마트폰 속 경제뉴스 기사와 주식 차트를 맴돌고 했지. 아빠는 그런 엄마를 종종 나무랐어. 그저 '사랑'으로 키우면 되지 않겠냐고 하면서.
"솔직히, 아기한테 너무 미안해요.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고..."
엄마의 목소리엔 죄책감이 묻어났어. 사기꾼 때문에 한 순간에 무너진 보금자리는 물론이고, 매일매일 우리 가족의 숨통을 조여하는 '돈'이라는 거대한 그림자 때문이었지. 그 검은 악마는 우리의 작은 행복마저 집어삼키는 듯했어.
"우리 아기가 결국은 크게 될 건데, 이 14평짜리 작은 방에 애기 침대는 어디에다 놓고, 물품은 어디에다 놓으며, 더 크면 이 집은 짐 더미밀로 둘러싸일 거예요. 난 우리 아기를 이 창고 같은 곳에서 키울 생각 하니 너무 미안해서 견딜 수 없어요"
엄마와 아빠는 매일같이 부동산 앱을 들여다보면서 서울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마음에 드는 우리 새 집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어. '영끌족'이라고 영혼을 끌어모으는 것처럼 온갖 대출로 아파트를 살 수는 있겠지만, 원리금 갚다가 우리 삶이 더 피폐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했지.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옥죄임 속에서 엄마는 주식투자도 하고, 공모주 청약도 하면서 한 푼 한 푼 짠테크에 집중하기 시작했어. 그런데, 뭐랄까. 티끌을 아무리 열심히 모아도 눈에 띄는 변화는 오지 않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답답해지는 것 같았어. 그런 것들이 엄마를 더 힘들게 만드는 것 같아 안쓰러웠지만, 아빠역시도 무력감에 휩싸여 있는 것은 다를 바 없었어.
그래도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려고 했어. 아빠마저 침통해 있다면 우리 가족은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 그늘 속에서 살아야 할 것 같았거든.
"무슨 소리예요. 갓 태어난 아기가 집이 좁고 넓고를 어떻게 알겠어요. 엄마 아빠 욕심이지. 우리 사랑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거예요."
"물론 그렇겠지만, 그냥 우리가 지금 처해있는 경제 상황도 그렇고, 아이가 커나가야 할 사회적 환경이나 분위기 이런 것들 때문에 그저 미안함 뿐인걸요. 다른 엄마들에 비하면 난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엄마는 짊어져야 할 현실이 점점 더 버거워졌나 봐. 엄마의 어깨가 계속 처지는 것을 보면서 아빠는 가슴이 저렸어. 엄마가 보는 사회는 어땠을까? SNS 속의 부모들은 완벽한 풀세트 아기 용품을 자랑하고, 맘카페와 같은 곳의 다른 예비 엄마들은 아기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기 방을 마련해 주고, 튼튼한 침대에 커다란 수납장, 다양한 장난감을 미리 구비해놓기도 하였어. 그런 행복한 모습은 엄마의 상처를 더 비틀기에 충분했지. 오죽했으면 차라리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고 싶다고 까지 얘기했으니까. 최근 친구들과의 만남도 재미가 없다고 했는데, 아마 아마 우리가 받는 이 숨 막히는 압박을 엄마 친구들은 다른 나라 이야기처럼 느끼고 있어서 그렇지 않았을까라고 짐작해.
하루는 아빠가 대학원 동기들을 만나고 늦게 귀가했어. 다들 아기를 키우고 육아를 하는 형, 누나들이라 많은 것을 배우고 왔지. 돈 문제를 비롯해, 집, 교육 등 다양한 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했었어. 지금은 힘들게 느껴지겠지만 결국은 다 잘 될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메시지였지. 아빠는 집에 오는 길에 여러 번 머릿속을 되뇌었어.
‘돈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우리 부부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자'
집으로 와서 엄마와 함께 모임에서 나왔던 얘기도 하다가 또다시 현실문제를 얘기하게 되었어. 하지만 아빠도 지칠 대로 지쳐있던 터라 아빠가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었어.
"자꾸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달라지는 건 없어요. 우리 어디 가서 밥 굶고 하지도 않고, 직업도 있으니 미래는 바꿔나갈 수 있잖아요... 자기가 장인, 장모님 돈돈 거리는 거 너무 싫다고 했는데, 결국 자기도 닮아가고 있잖아요?"
그 말이 엄마에게 얼마나 비수가 되었을지, 아빠는 헤아리지 못했어. 그 조그만 화를 못 이겨 괜히 냉랭하게 대한 아빠의 태도가 엄마를 더 불편하게 만들었지. 아빠가 참고 조심했어야 할 말이었다. 아빠와 엄마의 서먹함이 가시는 데는 며칠이 걸렸어.
며칠 뒤 우연히 엄마의 일기를 보았어. 그 속에는 며칠 전 아빠가 했던 말에 대한 속상함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지. 그리고 그 글의 끝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어.
‘함께 잔치국수 만들어 먹던 소소한 행복이 그립다.’
찢어질 듯한 속상한 가슴에 아빠는 손끝으로 가슴을 연신 긁어댔어.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은 완벽한 환경도, 값비싼 물건도 아닌, 그저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함께 잔치국수를 나눠 먹던 그 소박한 행복이었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엄마의 손을 말없이 잡았어. 여전히 어렴풋한 슬픔이 드리워진 얼굴이었지만.
"많이 힘들죠? 내가 조금 더 열심히 해볼게. 자기는 뱃속의 아기와 자신의 몸을 케어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자기의 몫 이상을 해주고 있어요. 너무 무리하지도, 그리고 미안해하지도 말아요."
"무슨 말이에요. 자기가 얼마나 열심히 해주는데..."
아빠는 잡았던 엄마의 손을 연신 쓰다듬었어. 엄마는 식탁 한편을 멍하니 보더니 말했어.
"배고프죠? 뭐 먹고 싶어요? 자기 먹고 싶은 거 먹어요."
우리의 식탁 위에 다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잔치국수가 두 그릇이 놓였고, 다시금 우리를 위로해 주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