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마치 아빠의 간절한 마음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빙글빙글 웃으며 한참을 뜸을 들였지. 그리고 마침내 엄마의 입에서 그 한마디가 터져 나왔어.
아가야,
남아선호사상이라는 꼬불꼬불 어렵고 낡은 이야기가 있지. 쉽게 말하면 옛날에는 남자아이를 더 귀하게 여기는 생각들이 있었다는 거야. 드넓은 논밭에서 힘센 팔다리로 일할 사람이 필요했던 농경시대의 흔적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강하다 보니 아들은 집안의 기둥이자 모든 권위의 상징처럼 여겨지곤 했어. 아들은 낳지 못하는 엄마들은 그 어두운 그늘 아래 얼마나 많은 차별과 아픔이 있었을지. 생각만 해도 마음이 먹먹해져.
하지만 아가야, 놀랍게도 요즘 세상은 여자아이를 더 예뻐하는 ‘여아선호사상’이 스르륵 고개를 들고 있대. 엄마들, 할머니들 말씀 들어보면 딸만큼 살갑고 살뜰한 자식이 없다는 거야. 힘든 부모 곁을 챙기는 것도 딸이고, 늙어 병든 부모에게 달려와 손발이 되어주는 것도 딸이라고. 요양원에 가보면 딸들이 얼마나 자주 찾아오는지 모른대. 그다음에 자주 오는 사람이 며느리고, 아들은 마지막이래. 네 엄마는 이 말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아. 자식의 덕을 보기 위해 출산을 하는 것은 아니라나 뭐라나. 자식을 낳았으면 그들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엄마의 진심, 아빠는 그 마음이 정말 좋아.
네가 엄마 뱃속에서 꼬물거리기 시작할 무렵, 우리나라 헌법재판소라는 곳에서는 아주 의미 있는 결정이 있었단다. 임신 32주 전에 아기의 성별을 알려주지 못하게 했던 법 조항이 사라진 거야. 엄마 아빠들의 '알 권리'가 보호받는 거지. 우리 아기가 누구인지 빨리 알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된 거야. 병원도 더 이상 “분홍색 옷 준비하세요~”라거나 “아드님은 축구를 좋아하겠네요!” 같이 빙빙 돌려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어. 아빠는 비로소 우리 사회가 한 뼘 더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어.
솔직히 말할게. 아빠는 엄마와의 설레는 첫 만남 때부터 네가 딸이기를 간절히 바랐어. 왜냐고?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를 꼭 빼닮은 작은 천사가 우리 곁에 와준다고 생각하면, 그 자체로 온 세상이 환해지는 기분이거든. 엄마들이 딸을 보면서 종종 이런 농담을 하잖아. “내가 남편의 첫사랑을 낳아줬네!”라고. 생각만 해도 아빠는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단다. 또 딸은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아빠가 바쁘게 일하러 나간 사이, 네가 엄마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때로는 아빠와 엄마가 티격태격할 때 엄마 편을 들어주면서 엄마에게 큰 힘이 되어줄 거야. 조그만 손으로 엄마의 손을 잡고 조곤조곤 이야기 나누는 모습, 함께 예쁜 옷을 맞춰 입고 나란히 걷는 모습을 상상하면 아빠는 미소가 절로 지어져.
하지만 아빠는 엄마에게 섣불리 너의 성별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어. 혹시나 우리 아기가 아들일 경우, 무심코 던진 아빠의 말에 작고 소중한 네가 뱃속에서 상처받을까 봐 괜히 조심스러웠거든. 아빠의 작은 걱정이었지만, 너에게만큼은 혹시 모를 상처 하나 주고 싶지 않았단다.
아빠의 마음을 솔직히 말하면, 아들은 왠지 모르게 우당탕탕 에너지가 넘쳐서, 슬슬 기력이 달리는 엄마 아빠의 혼을 쏙 빼놓을 것 같은 걱정도 있었어. 엄마와 아빠가 결혼을 다소 늦게 하기도 했거든. 신생아를 놓고 비교해 봐도 아들은 딸보다 조금 더 무겁다고 해, 힘도 훨씬 좋고. 뭐, 괜스레 미안해지네. 체력과 능력이 없다는 것이 말이야.
그러니, 아빠가 네가 아들이라면 싫었을까? 물론 아니지! 아빠는 네가 아들이라면 어떨까라는 생각도 해봤어.
함께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좋아하는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 목청껏 응원하는 상상을 펼쳐보았지. 아마 온몸에 땀을 흠뻑 흘리고 나서 부자가 시원한 물 한잔 마실 때의 개운함이란! 남자들끼리만 나눌 수 있는 끈끈한 유대감 같은 것도 느끼겠지? 아빠가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희로애락을 이야기해 주면서, 인생의 좋은 선배이자 든든한 친구가 되어줄 수도 있을 거야. 그리고 먼 훗날, 네가 아빠의 뒤를 이어 멋지게 성장하는, 그런 영화 같은 장면도 꿈꿔볼 수 있을 거야. 또 아들은 엄마에게 '든든한 수호자'가 되어줄 거라고 생각했어. 듬직한 아들이 옆에 있다면, 엄마는 세상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아들이 아빠 없을 때 용맹하게 엄마를 지켜줄 테니까. 든든한 상상이었어.
아들이든 딸이든, 너는 그 자체로 소중해
그날은 엄마 혼자 병원에 갔던 날이었어. 아빠는 출근해서 일을 하고 있었어.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 엄마에게 전화가 왔어.
"자기, 일 잘하고 있어요? 나는 병원 잘 마쳤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미안해요, 오늘 같은 날 꼭 함께 병원에 갔어야 하는데..." 아빠가 아쉬운 마음에 말했지.
"아이고, 뭐 수술한 것도 아니고, 괜찮아요. 간단하게 검진받는 건데요."
"그...애기 성별 나왔어요?" 아빠가 조심스럽게 물었지. 엄마는 빙그레 웃는 소리를 전화기 너머로 들려주며 말했어.
"후훗, 1급 비밀이에요. 퇴근 후 집에서 확인하세요~"
그 짧은 통화가 끝나고, 아빠는 도무지 일에 집중을 하지 못했어. 남은 시간 동안 온통 네 성별 생각뿐이었지. 얼마나 설레고 궁금했는지 몰라. 매일밤 엄마의 배를 쓰다듬으면서도 아빠는 너의 성별을 모르니 너와 함께하는 미래가 뚜렷하게 그려지지 않는 거 있지? 우리 세 가족이 함께 잔디밭을 뛰노는 상상에서도 너의 얼굴은 그려내기 어려웠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간절함 때문일까? 날이 지날수록 그 궁금증은 더 커져만 갔어.
지금도 맘카페를 포함한 예비 엄마 커뮤니티에도 초음파 사진을 올려놓고 사진 속 태아가 딸인지 아들인지 판별해 달라는 글이 쏟아지고 있어. 초음파 사진에 나와있는 척추와 아기의 성기가 이루는 각도를 보고 예측하는 '각도법'이라는 것도 있대. 아이의 성별을 얼마나 빨리 알고 싶었으면 그런 방법까지 찾아볼까 싶어 웃음이 나더라.
퇴근 후, 집으로 가는 그 길이 어찌나 멀던지. 평소에는 짧게 느껴지던 길도 그날은 무슨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것 같았어. 아빠는 발걸음을 재촉해 현관문을 열었지. 엄마는 거실에서 아빠를 기다리며 반겨주었어. 하지만 아빠는 다시 한번 병원에 혼자가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마치 태연한 것 마냥 엄마를 안아주고 평소처럼 실내복으로 갈아입었지. 그리고 오늘 엄마의 하루가 어땠는지 물어보기도 하고 아빠의 하루를 엄마에게 공유하였지. 그러면서도 아빠는 엄마의 표정과 작은 손짓 하나하나에 집중했어. 엄마는 마치 아빠의 간절한 마음을 즐기기라도 하듯이, 빙글빙글 웃으며 한참을 뜸을 들였지.
그리고 마침내 엄마의 입에서 그 한마디가 터져 나왔어.
"축하해요. 드디어 꿈을 이루셨군요?"
"에...?"
"우리 아기는 공주님입니다."
아빠는 그 말을 듣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었어. 기쁨에 겨워 "정말? 진짜?" 하고 몇 번이고 되물었던 것 같아.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를 쏙 빼닮은 예쁜 공주님이 우리에게 온다는 생각에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돌았단다. 앞으로 너에게 무슨 이름을 지어야 할지, 어떤 예쁜 옷을 입혀줄지, 함께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지, 상상만 해도 하루 종일 행복할 것 같아. 여담이지만, 그 와중에 외할머니는 혹시 딸이라고 엄마가 시댁에서 미움받지는 않을까 봐 걱정하셨단다. 하하. 아빠는 그런 걱정은 넣어두셔도 좋다고 단호하게 말씀드렸지.
아빠는 지금도 그 순간의 기쁨을 잊지 못할 거야. 엄마와 함께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 지었던 그 순간은 아빠의 기억 속에 영원히 반짝이는 별처럼 남아있을 거야.
아가야,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