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어릴 때 정기적으로 찾게 되는 곳이 소아과 병원이죠. 예방접종뿐 아니라 정기 검진, 크고 작은 병치례로 들락날락하게 되는 곳. 파리 입성 3개월 만에, 프랑스 소아과를 체험했습니다. 세 돌 막둥이가 프랑스에 와서 악성 변비로 고생했어요. 식생활이나 물이 바뀌어서 그런 건지 궁금하고, 아이가 배변 시 너무나 힘들어해서 병원을 가 보기로 했습니다.
프랑스의 의료체계
기본 의료비가 매우 비싸고, 사보험에 의존해야 하는 미국과 달리 프랑스의 국가 의료보험체계는 훌륭한 편입니다. 국가 산하 의료보험에서 의료비의 약 70%를 커버하고 30% 정도가 개인부담인데, 사보험 추가 가입도 가능해요. 저희는 외국인이라 국가 보험 대신 사보험으로 의료비를 커버했습니다. 응급실 제외한 모든 병원은 기본적으로 예약제인데, Doctorlib이라는 전용 앱을 통해서 제일 빨리 예약한 것이 2주 후였고, 그것도 딱 하나 남은 마지막 타임인 저녁 6시였어요! (우리나라처럼 아프면 바로 가서 치료받을 수 있는 동네 병원이 있는 나라가 잘 없는 듯해요.) 일단 내가 돈을 내고 후에 환불받는 거라 귀찮고, 병원과 약국에서 서류 챙겨야 해서 역시 대한민국 국민 건강 보험이 지구 최고라는 생각을 했죠.
첫 파리 소아관 방문기
제가 소아과 간다고 했더니 한 한국분이 "음... 소아과 의사를 만나러 간다는 것이 맞는 표현일 거야"라고 하셨어요. 무슨 말인지는 곧 알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소아과는 (다른 소규모 클리닉도) 그냥 아파트 건물에 있어요. 즉, 어느 오피스텔 C동 2층 3호가 소아과인 거죠. 간판도 없고, 보시다시피 그냥 보통 가정집이에요.
소아과 병원문. 의사 선생님 이름이 작게 쓰여 있음.
이곳이 의료기관임을 나타내는 흔적이 있기는 합니다.
여러분과 저의 책장과 비슷한 자연스러운 책장 수납 상태
6시 예약이라 5시 50분에 도착했는데 두 가정이 있었어요. 기침하는 남자아이와 애 둘을 안고 있는 엄마, 진료실 안에서는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접수하는 곳은 없는 것 같아서 일단 기다렸는데, 20분이 지나도 진료실에선 계속 대화소리가 들립니다. 진료 중인지 담소 중인지? 25분 후 그 가정이 나왔고 잠깐 의사 선생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어요. 다음 가정이 들어갔고 또 대화소리가 이어집니다.
10분, 20분.. 시계는 7시를 향해가고.. 안에선 손뼉 치는 소리까지 들립니다. "여기 소아 정신과인가? 상담치료 하나?" 환자당 20분 이상씩 무슨 말이 저리 오가는 건지...
창밖에 깊은 어둠이 깔리고... "그냥 집에 가자. 내가 아기 배 마사지 할게"라고 했지만, 남편은 지금까지 기다린 게 억울하다며 움직이지 않고, 드디어 7시, 우리 차례가 옵니다!
병원이라기보다는 교수님 방 같았던 소아과 진료실
진료실은 의사 선생님의 오만 물건들로 가득.... 오래된 교수님 방 같은 그곳에서 친절하신 의사 선생님은 영어로 진료를 시작했어요. 일단 직접주소 이름 가족 관계등 접수, 입력하시더니, 문진 하고, 옷을 벗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납덩이 움직이는 저울에 몸무게 재고, 침대에 누우라 하고는, 갑자기 커다란 나무 자를 꺼내 키를 재는데 저랑 남편은 터지는 웃음을 참았지요. 배를 몇 번 눌러보시더니... 뭐 큰 이상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변비 처방은 배변 유도제와 유산균이었어요. 바나나, 과자, 쌀을 먹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쌀이요? 빵은 괜찮나요? 그랬더니 빵은 괜찮은데 쌀은 안된다는 생소한 지령을 주십니다. 그리고 소아변비는 심리적인 요인이니 아이가 똥 누는 것을 무서워하거나 싫어하지 않도록 잘 말해주라고 하셨습니다.
저희가 프랑스어가 잘 안 되니 다른 가족들처럼 의사 선생님과 긴 대화는 불가하여, 진료는 금세 끝났어요. 처방전을 뽑아주시고, 의사 선생님은 책상 구석에서 카드 단말기를 꺼내 살포시 들이밀며 "76유로입니다. 일시불?" 하십니다. 예상치 못했던 수납 상황 전개에 살짝 당황...
'나 혼자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올라운드 플레이 프 의사님
그렇게 진료를 마치고 나선 시각은 7시 15분... 와... 프 소아과 신선했다. 다시 올 일 없자!
의사 단독 운영 개인병원
대기실, 주사실, 검사실도 없고 가운조차 입고 계시지 않았던 모양 빠지던 프랑스 의사님.. 한국 소아과는 동네 소아과라도 간호사 없는 곳은 없고, 적외선 소독기, 전자 체중계 등 유아 계측도 기계로 하고, 귀 내시경 모니터도 있잖아요. 별다른 전자식 의료 기기의 도움 없이, 접수, 기록, 신체측량, 진료, 수납 & 결제까지 의사 1인이 모든 것을 단독으로 진행하는 진정한 '인술'의 현장! '결제는 카드로 하시겠어요?' 이건 한국에선 의사 선생님 멘트는 아닌데 말이죠... 진료비는 76유로. 약값은 25유로. 총 100유로(14만 원) 정도 나왔고, 보험 청구를 해야 합니다. 약은 한국처럼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가서 받는 것이고, 특이했던 것은 예방접종도 약국에서 백신을 사서 들고 와야 소아과에서 접종해 줍니다.
진철 하시고 뭐 대단히 진료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가정집에 의사 혼자 앉아 나무자를 들고 키재고, 카드 단말기 내미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이곳이야 말로 진정한 '개인 병원'!이후 여러 병원 방문을 통해 알게 된 사실들.
파리의 큰 안과 병원의 대기실. 의사들이 여러 명, 고급진 시설
찐 개인병원이 많은 이유
프랑스는 소득세가 높다 보니, 의사들은 최고 소득세 구간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예컨대 소득세가 급격히 올라가는 기준이 연간 소득 1억이라고 한다면, 딱 9900만 원만 버는 것이 오히려 좋다는 거죠. 간호사를 고용하거나, 정식 병원 건물을 빌릴 경우엔 더 많이 벌어야 하니, 딱 1인 사업장(?)으로 클리닉을 유지하는 것이 최고 가성비래요. 그래서 일주일에 4일만 진료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물론, 기본 의료 설비가 필요한 치과나 안과 같은 곳은 병원을 크게 꾸며 접수실, 진료실, 대기실 만들어 여러 의사가 간호사를 공유하기도 하지만, 저는 의사 선생님 한 분이 홀로 다 방어하시는 소아과, 안과, 산부인과 및 치과를 다녔답니다. 우아하게 딱 진료만 하는 게 아니라 그런지, 프랑스 의사 선생님들은 권위적이지 않고, 친숙하며 거리감 없이, 환자에게 충분한 시간을 허락해 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프면 이런 동네 1차 진료기관을 가고, 이후 더 치료/검사가 필요할 경우 2차 병. 의원에서 스페셜리스트의 진료를 받습니다.
응급실도 가본 적이 있는데, 당장 숨넘어가는 응급이 아니면 서너 시간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했습니다. 뭔가 허술해 보이는 병원들 같지만, 프랑스의 의료체계는 탄탄해서, 국민 1인당 의사 수나, 국가의 공공 의료비 지출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나은 수준이라고 합니다. 통계적으로는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아프면 언제든 찾아가서 바로 치료받을 수 있고, 사후 서류 작업 없이 바로 적용되던 국민 건강 보험이 있는 한국 병원이 그리웠어요.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충분한 시간을 허락해 주고, 많은 대화를 하는 프랑스 의사들이 인상적이기도 했지만, 프랑스어가 안 되어 그 장점을 못 누렸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