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돈의 세계로 쫓겨난 사람들
어느날 대한민국의 헌정질서 - 자유권과 민주주의가 붕괴된다면, 그리고 완전히 다른 체제가 들어선다면 당신은 어떤 마음이 들까?
가장 좋아하는 논픽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붉은 인간의 최후: 세컨드핸드 타임, 돈이 세계를 지배했을 때> 신판이 2024년에 나왔다. 저자는 구소련을 지나온 1천여명을 20년에 걸쳐 인터뷰했다. 알렉시예비치의 노벨상 수상에 결정적인 저작이지만 국내에서는 구판이 절판됐었다.
소비에트. 레닌이 세우고 스탈린이 독재했으며 고르바초프에 이르러 붕괴한, 70년의 역사를 지닌 연방. 누군가의 생애주기를 통과하기에 충분하도록 짧은 시간이다. 그 짧은 시간동안 수많은 변혁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수만갈래의 삶을 살았다.
책의 두께와 주제에 압도되어 고민하고 있다면, 본인은 러시아와 소비에트의 역사에 무지한 독자인데도 순식간에 읽어나갔다고 말하고 싶다. 역사서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의 일상적인 목소리를 담은 책이므로, 보다 미시적인 부분에서부터 소비에트-러시아의 1900년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저와 제 아들... 그리고 제 어머니는... 모두 다 각기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어요. 그 나라들이 모두 러시아라고 불리는데도 말이죠. ... 모두가 기만당했다고 느끼며 살아요...
소비에트는 오래도록 감시와 감청, 징집, 수용소와 부자연스러운 실종 그리고 죽음이 일상화된 나라였다. 당원증을 자랑스러워하고 젊은이들이 앞다퉈 조국에 목숨을 바치는 이면에, 누군가가 고발당하고 끌려가고 노역하는 잔인한 국가이기도 했다. 이 책에 실린 목소리들도 같은 시대를 살았다고 믿기 힘들 정도의 차별된 톤을 지니고 있다.
자유라는 단어는 대체로 아름답지만 어떤 시대냐에 따라, 어떤 경제상황을 지니느냐에 따라 기대보다 허망한 것으로 다가올수도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이:
과연 우리는 이런 자유를 기다려왔던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이상을 위해서 죽음도 불사할 수 있었다. 전장에 나가 싸울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시작된 건 체호프의 소설 같은 인생이었다. 아무 역사가 없는 인생.
자유를 얻은 인간에게 복종할 대상을 서둘러 찾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고 끊임없는 고민은 없을 것이오...
모두가 자유의 공기를 가득 들이마셨어요. ... 이제 조금, 조금만 더 기다리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큰 꿈에 부풀었던 시기였죠.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미지의 동물과도 같았어요. 우린 정신나간 사람들처럼 집회를 쫓아다녔어요.
사람이 엘리베이터 안에 갇혔을 때 바라는 건 딱 한 가지, 바로 엘리베이터가 열리는 것뿐이잖아요. 닫혔던 문이 열리면 그게 행복인거죠. ... 그 상태에서 사람은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아요.
그들은 곧 자유라는 황금빛 세기가 열리리라고, 부와 아름다운 옷과 집다운 집이 모두에게 허락되리라 믿었다. 그러한 믿음은 이성이 아닌 가슴이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는 몰랐다. 자유라는 단어뿐.
본인에게는 태어날때부터 민주주의, 자유주의, 자본주의라는 가치가 너무나도 당연했다. (물론, 나 같은 세대 앞에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그런 사람에게 구소련 사람들이 맞은 1990년대를 이해할 방법은 오직 이런 목소리들을 통해서일 뿐이리라. 개인화되고 분절된 2020년대의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체제. 마을마다 위원회가 있고, 소년단 피오네르가 있고, 청년 조직 콤소몰이 있어서 단체행동이 당연시되는, 그것이 어떤 강제가 아니라 활기차고 능동적인 이념으로 여겨지는 사회. 그런 사회에 살던 사람이, 모든 믿고 있던 것이 붕괴되어버리는 사회로 강제 이행되는 일. 그런 일이 30년 전에 있었다.
물론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정치/법/경제 개혁) 당시 반동도 있었다.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8월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국회 앞에 모였고, 고르비의 실각과 옐친(러시아 1대 대통령)의 부상을 가져왔다. 약 이틀동안 사람들은 그곳에서 먹고 자며 비무장 상태로, 죽을 각오로 쿠데타의 해산을 기다렸다. 여자들이 군인을 에워싸고 껴안고 입을 맞추어 달랬고, 어머니와 할머니들은 음식을 나눠주며 "어서 먹어. 쏘지만 마라. 정말로 쏠 생각은 아닌 거지?"라고 말했다.
돈은 자유라는 단어의 유의어였어요. ...
우리는 피를 흘리는 대신 물건을 받았어요!
그전까지 소련에서 돈은 금기어, 부끄러운 것이었다.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며 사람들은 청바지, 커피, 새 신발과 가전제품을 꿈꿨다. 여행과 수많은 소비, 그 수많은 돈들. 모두에게 파이가 돌아가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백군과 적군으로 나뉘어 피흘리고 싸우지 않아도 된다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동시에 지금까지 항복한 적 없던 소련이, 햄과 청바지와 벤츠에 패배했다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다. 같은 일이 일어났는데...
민간인을 고발하고 고문하고 학살하는 사람이 내 친절한 이웃이고 예쁜 사촌누이인 일이 비일비재했다. 본래 공개되지 않았던 기록보관소가 열람 가능해짐에 따라, 나와 내 가족을 고발했던 사람이 누구보다 믿어서 내 아이를 맡길 정도였던 이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살한 사람도 있다. 핀란드 작전에 나갔다가 포로로 살아돌아왔는데, 조국을 배신했다고(목숨을 바치지 않았다고) 가장 혹독한 수용소로 보내버리는 나라. 그런 아버지를 두고도 당의 서기관으로 복무한, 소련의 가치를 굳게 믿은 딸. 이런 목소리를 읽으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언더그라운드>를 떠올렸다. 나와 먼 것을 비상식이라 치부하기는 쉽지만, 인간의 인식과 생활방식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어떤 사람은 대기근에 지쳐서, 생산 목표치를 달성해도 상점에서 무언가 살 수 없는 상황이 지겨워서, 밀고와 상호감시에 시달리다가, 굴라크, 철장, 테러에 지쳐서 사회주의라는 가치에 신뢰를 잃고 고르바초프와 옐친을 환영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실상을 알면서도 '정의롭고 밝은 세상,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약자를 불쌍히 여기고 함께 고통을 이겨 나가는 세상'을 진정히 원했기에 아직 사회주의를 믿고 있다. (이런 사람들을 비하하는 어조로 '소보크'라 부른다.) 그는 (자본주의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무존재"가 되어버리는 평범한 사람이 "신문에 글을 실을 수도 있었고, 지역위원회를 찾아가 부서장이나 삭딩의 부실한 서비스 또는 바람난 남편을 고발할 수도 있었"던, "평범한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필요로 하는" 사회를 그리워했다. 그들에게는 구소련이 정상적인 삶이었다. 소젖 짜는 사람들, 방적공들, 장비 운전기사들을 볼 수 없고 금융업자, 사업가, 모델만 보이는 사회.
전자보다 후자를 길게 설명하는 까닭은, 내게 전자보다 후자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 따라가질 못해요... 뒤처지는 무리 중 하나예요. 사회주의를 향해 질주했던 기차에서 모두가 자본주의로 향하는 기차로 환승하고 있는데, 저만 지각하고 있어요...
체제가 붕괴되고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젊은이들은 그러한 가치를 업신여기고, 방송에서도 풍자하기 바쁘다. 민중들은 지역위원회에 난입하고 기물을 짓밟으며 "공산주의자들을 재판하라!"라고 외쳤다. 지역위원회에서 일한 자들은 시대를 지나간 가치를 위해 일했기 때문에 백안시됐다. 영화 패왕별희에서도 그 광기를 엿볼 수 있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떠오른다.
신념과 말이 가치있었던 시대. 아름다운 미래에 대한 믿음만으로 전쟁터의 시체들과 시베리아로 향하는 열차가 합리화되는 시대. 당을 믿는 당원인데도 끌려가서 고문을 받고도 전쟁에 내보내달라고 애원하던 시대. 작가마저도 그런 사람에게 "그 감정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로 그 솔직한 마음이 작가를 인터뷰이들 앞으로 데려다 놓았으리라.
왜? 이 기억들을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우리는 미래를 사랑했어. 미래인들까지도 사랑했지. 그 미래라는 것이 언제 도래할지 늘 논쟁했다고.
그런 정치체제 하에서, 사상은 종교와 닮은 형태로 전파되었다. 그러지 않으면 모두의 힘을 합칠 수 없었으니까. 감시와 통제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사회구조였으니까. 사상은 완벽할 수 있지만 사상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완벽할 수 없다.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아서 종교와도 같은 신념으로 눈을 가려야 했던 것이다. 공산주의는 '다함께 못사는' 체제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사람은 늘 절대적 조건이 아닌 상대적 조건으로 인해 불행해진다. '소보크', '어제에 속한 사람들'이 자본으로 구분되는 체제에서 그토록 커다란 모욕감을 느끼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이 책에 '망나니'(가해자?)의 목소리는 드물지만, 공안에서 근무하던 이의 이야기를 옮긴 목소리는 있다. "살인기계"에 대한 그의 통찰이 인상깊었다. 군인이라서 시키는대로 했고,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전쟁에서 메달을 따고, 체포당해 7년형을 살고... 그런 사람들도 "자신들을 긍휼이 여겨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잘못한 사람도 없고 망나니는 또다른 희생자가 되고... '가해자'는 부자가 되어 넓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러시아-소련은 넓다. 독일인의 손에도 소비에트인의 손에도 죽을 뻔한 유대인, 반푸틴 시위에 참여한 사람, 이념이 아닌 인종으로 인한 분쟁, '학살'이라는 한 단어만으로는 도저히 전해지지 않는 참상, 친하게 지냈던 이웃이 하루아침에 내 민족을 도륙하는 살인자로 돌변하는 모습,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살아가는 삶들이 담기고, ... 그리고 이 모든 역사적 대격변을 겪지 않은, 누가 정권을 잡든 똑같이 살아온 사람의 '넋두리'로 끝난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것도 아닌", 때로 "낡은 것"으로 폄하되는 목소리를 똑똑히 기록했다. 책을 읽는 동안 괴로웠다. 물론 수용소와 전쟁, 학살을 여과없이 전하는 목소리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수용소 군도>에도 있다. 다만 목소리들은 수없이 질문한다. 왜? 어떻게?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나도 함께 질문한다. 어째서? 이렇게 끔찍한 참상이 일어나야 했나? 무엇을 위해서? 내가 익숙하게 지녀왔던 사회질서가 붕괴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전쟁과도 같은 충격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