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떠나시는 어머니를 마지막까지 부여잡고 통곡하시며 슬퍼하셨다. 아버지의 슬픔에 돌아가신 어머니도, 남아계신 아버지도 내게는 아픔이 되어버렸다.
2014년 12월 어느 날, 나는 KTX를 타고 출장길에 올랐다. 열차 안은 아침 출장길에 나선 사람들로 빈 좌석 없이 가득 찼고, 난 창가 쪽 자리에 앉아 커피 한 잔과 책으로 전쟁 전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여유도 잠시였고, 주머니에 넣어둔 폰의 진동으로 여유로왔던 시간은 무거웠던 현실로 나를 내몰았다. 전화기에 뜬 번호는 아버지의 번호였고, 이른 시간에 전화할 분이 아닌지라 조금은 놀라고, 걱정된 마음에 옆자리의 승객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으며 열차 밖 복도로 걸어 나갔다.
"아버지, 아침부터 무슨 일 있으세요?"
"철수야... 네 엄마가 많이 아프다."
아버지는 잠시 말씀을 이어가지 못하셨지만, 머릿속에서 하실 말씀을 정리하신 듯 아침에 병원에 다녀오셨던 일들을 설명하셨다. 지방 종합 병원에서 검사를 했는데 폐암 진단 소견이었고, 아마도 머리에 전이가 있는 듯 하니 서울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며칠 전 머리가 아프다는 어머니 얘긴 들었지만 이렇게 상태가 좋지 않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출장길 아침에 난 머릿속이 고장 난 듯 멍해졌고,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라 오늘이라도 바로 서울로 올라오시라고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출장길 내내 마음은 엉망이었고, 일은 마무리했지만 어떻게 되었는지 관심 밖이었다.
이 날 이후 아버지는 폐암 4기 선고를 받은 어머니 곁을 지키며 어머니를 보살폈다.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건강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도 있었고, 길어지는 치료 기간으로 걱정스럽기도 했었고, 부작용과 호전되지 않는 상태로 힘든 일도 많았다. 아무리 자식이라지만 난 어머니 곁에 함께 하긴 어려웠고,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든든한 보호자로, 자식들에게는 튼튼한 버팀목이었다.
이런 아버지도 어머니의 긴 병환에 지쳐갈 수밖에 없었고, 결정적으로 아버지도 나이가 드신다는 걸 우린 깜빡 잊고 있었다. 재작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의 상태도 함께 안좋아지시니 좀처럼 흔들리시지 않을 것 같았던 아버지도 그때만큼은 많이 힘들어하셨다. 어머니는 바뀐 항암제의 부작용으로 식사도 제대로 못하시며 거부 반응을 보이셨다. 담당의사의 결단으로 1달간 약을 중단했고, 다행히 부작용으로부터 벗어나긴 했으나 수척해진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긴 시간이 걸렸다.
그 날 이후 아버지는 정기 검사 및 진료를 위해 서울 병원에 오실 때마다 어머니 때문에 힘드신 일을 아내와 내게 이야기했고, 어머니에 대한 '흉'이 날로 늘어가셨다. 전이된 암과 약의 부작용으로 눈과 귀가 모두 어두워지셨어도 어머닌 아버지가 우리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하실 때면 어떻게 아셨는지 아버지에게 큰 소리를 내거나, 아버지가 주무실 때 배를 툭툭 때리고는 하셨다. 이렇게 티격태격할 때만 하셔도 이것보다 더 힘든 시간이 찾아올 줄은 몰랐고, 어머닌 작년 1월 허리를 다치고 나서부터는 아예 거동을 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셨다.
70대의 몸으로 거동을 못하시는 어머니를 혼자 보호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아 아버지를 설득해 결국 요양보호사를 들였지만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보호사의 손보다는 아버지의 손을 간절히 원했고, 아버지의 건강마저 걱정됐던 우린 결국 아버지를 설득해 어머니를 요양 병원으로 모셨다. 다니던 병원에서도 의료시설이 있는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시는 게 환자에게도 좋다고 아버지를 설득했고, 이렇게 아버지는 어머니를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병원에 계시는 동안도 아버지는 하루에 저녁 몇 시간씩은 어머니 곁을 지켰다. 낮 시간에는 일을 하시느라 오지 못하는 아버지를 어머니는 저녁시간까지 기다렸다 아버지가 오면 큰소리로 아버지를 욕하고, 몰아세웠다고 하셨다. 아마 머리로 전이된 암으로 치매 증상을 보일 수 있다는 의사의 소견이 맞는 듯했다. 이렇게 요양병원으로 모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꼬박 12시간 이상을 주무시고 다음 날 아침에 길고 힘들었던 몸을 쉬시려고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아버지는 장례식 삼일 내내 울기를 반복했고, 뽀얗게 화장한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을 비비며 오열하는 모습에 아버지의 슬픔의 깊이가 느껴졌다. 마지막을 요양병원에 두신 게 항상 마음에 걸려하셨던 아버지는 집에서, 아버지 곁에서 보내지 못한 게 마음속 짐으로 남은 것 같았다. 이렇게 고이고이 어머니를 모셨고, 아버지는 어머니 물건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이제는 울지 말자고 가족들을 다독였다. 이렇게 시골집에 아버지 혼자 남겨두고 올라온 나는 오히려 어머니가 계실 때보다 더 아버지가 걱정이 되었지만 아버지도 어머니를 마음으로 편히 보낼 거라는 생각에 이내 일상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를 보내고 자주는 아니지만 아버지를 들여다봤고 겉으로는 잘 지내시는 것 같아 크게 걱정하지 않으며 지냈다. 어머니 49재가 되어 동생 내외와 우리 가족은 다시 모였고, 49재를 지내고 난 뒤 난 동생과 대화 중에 아버지가 아직 어머니를 보내지 못한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오빠, 아빠가 아직 엄마 전화기 서비스 해지 안 한 거 알아? 엄마 폰이 내 명의잖아."
"어, 아직? 왜"
"아빠가 3개월만 전화기 유지해 달래. 3개월 지나서 아빠가 얘기하면 그때 해지해 달라고 하셨어. 그게 말로는 엄마 폰으로 가끔 연락 오시는 지인분들이 있으니 엄마 돌아가신 소식은 알려야 된다고는 하는데 아마 아빠 마음이 아직은 엄마를 보내지 못하겠나 봐."
난 동생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고, 괜찮다는 말로 우리에게는 편안하게 얘기하는 당신이지만 아직은 그 슬픔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계신 듯해서 더 아버지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3개월이 지나 아버지는 드디어 당신 마음에서 어머니를 보내신 듯했고, 어머니의 전화기는 서비스 해지되었다. 아버지의 이런 마음을 알고서 나도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3개월이 지나는 동안 지우지 못했고, 서비스 해지 이후에도 한 동안 내 저장번호에 어머니 전화번호는 남아 있었다.
아버지의 깊었던 반평생의 사랑은 이제야 미련을 벗어버렸고, 한 동안 아버지의 사랑과 미련 사이에 어머니의 폰만이 자신이 할 일을 잊은 채 서비스를 이어갔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