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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Jun 20. 2022

급여받은 만큼만 일합니다

원하지 않는 업무를 대할 때 필요한 우리의 자세

 "십칠, 팔 년을 넘게 엔지니어로서 일을 했어요. 이제 와서 인증이라뇨"

 "아니 메인 업무로 하라는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제품에 대해서 최 과장이 잘 모르니까 좀 도와서 함께 하라는 얘기예요"


 부서를 옮긴 지 몇 달이 되지 않았다. 부서 내 팀장과 불화로 회사를 그만두려고 했던 시기다. 부서장과 맞서며 불이익을 받을 때도, 팀이 없어지는 수모를 당했을 때도 난 퇴사하지 않고 참고, 참았다. 언젠가 다시 기회가 생길 테고, 생각했던 업무도 잘 되리라고 믿었다.


그렇게 옮겨온 팀에서 2년을 보내며 잘 지낸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정말 해결되지 않는 건 특별한 이유 없이 어떤 사람이 싫을 때다. 아마도 그런 관계이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2년을 버텨온 팀에서 끊임없는 불화가 있었고, 난 퇴직을 결심하며 이직을 위한 준비를 할 때였다.


타 본부 부서장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다른 사람들이 해오지 않던 특정 제품에 대한 검증 및 제품 기획 등의 업무를 함께 제안해 왔다. 8년이 넘는 그곳에서의 생활에 기대가 1도 없던 내겐 고민도 없이 거절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고, 그런 날 잘 안다는 듯이 그는 바로 답하지 말고 충분히 생각해보고 결정하라고 말했다.


그런 그의 배려가 고마워서였을까. 난 잠깐은 더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새롭게 제품 기획과 내가 기획에 참여했던 제품의 고도화도 가능한 업무의 장점을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은 포지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팀 전배를 요청했고, 인사이동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옮겨간 부서에서 처음 두어 달은 주변의 간섭 없이 내가 지원, 기획했던 제품에 대한 소프트웨어 검증에만 충실히 몰입할 수 있었다. 잠깐의 의구심을 가졌던 난 두 달의 시간으로 충분히 부서 이동에 만족해했고, 그렇게 그 시간은 꾸준히 계속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일들은 조금씩 보이지 않는 균열이 가고 있었고, 그 균열을 느낀 사건은 여러 가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처음 입사할 때만 해도 회사 전체 인력은 웬만한 중견기업 규모로 커졌었지만 부서를 옮겨간 당시에는 사업 축소, 구성원 이탈 등으로 예전 규모의 7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력 구성이었다. 이런 인력 이탈은 내가 있던 부서에도 발생했고, 그렇게 하나, 둘씩 이직을 사유로 퇴사자들이 생겨났다.


인증을 맡고 있던 담당자도 그맘때 퇴사를 결정했고, 후임이나 백업이 없던 업무라 부서장 입장에서는 후임자 선임이 최우선이 되었다. 아무리 외부에 인력 풀이 넘쳐난다고 해도 해당 업무 인력은 그리 흔하지 않았고, 당장 입사자가 결정된다고 해도 제품에 대한 숙련, 이해 없이 인증 업무를 진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따라서 후임자는 내부 선임이 우선되었고, 그 우선순위에 첫 번째가 테크니컬 라이터인 최 과장이었다. 하지만 최 과장은 제품 관련 문서에 대한 경험은 많지만 직접 제품을 설치, 운영해 본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부서장은 고심 끝에 새롭게 전배 온 내가 적합하다는 결정을 내렸고,  과장을 도와 인증 업무 지원을 내 새로운 업무로 결정하고 내게 제안해 왔다.   


 "십칠, 팔 년을 넘게 엔지니어로서 일을 했어요. 이제 와서 인증이라뇨"

 "아니 메인 업무로 하라는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제품에 대해서 최 과장이 잘 모르니까 좀 도와서 함께 하라는 얘기예요"

 "너무하시네요. 연구소로 오면 기존에 해오던 제품 강화와 소프트웨어 개선 위주로 업무를 할 거라고 얘기하셨는데 이젠 땜빵 업무를 맡기시네요"

 "아니 이번 인증만 도와주고 나면 다음번부터는  과장 혼자 할 수 있을 거예요. 이번에 들어가는 인증만 도와줘요"


렇게 며칠을 거절했지만 내가 생각해도 특별한 대안이 없었고, 그의 말대로 이번 한 번의 인증만 지원하기로 하고 새로운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새롭게 받은 인증업무가 내게만 부담이 되었던 건 아니었다. 결국 원래 메인으로 일하기로 했던  과장은 다른 회사로 이직을 결정했고, 애초에 부()로 업무를 하기로 했지만 결론은 혼자 인증 업무를 해야 하는 상태가 되었다. 처음엔 금방이라도 퇴사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지만 난 그렇게 꾸역꾸역 2년을 넘게 버텼고, 마지막까지 해당 업무에 애정이나, 즐거움이 전혀 생기지 않은 상태였지만 특별한 잡음 없이 일을 해나갔다.   


그렇게 회살 어렵게 다닐 때 주변에서 후배들이 몇 번씩 내게 회사 다니며 대충 하지 뭘 그렇게 책임감을 갖고, 부담을 가지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사실 흥미도 없고, 관심도 없었지만 나름대로는 열심히 마무리 지으려고 했었고, 수행했던 모든 인증들도 인증서 발급까지 마무리 지었다. 그럴 때마다 난 그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냥 받은 만큼 일하는 거야. 더 적게 주면 지금보다 덜 할 거고, 더 주면 지금보다 조금 더 열심히 하는 거지"


난 그렇게 2년을 넘게 딱 돈 받은 만큼만 일한다 생각하며 회사를 다녔고, 그만큼의 결과만을 냈다고 자평한다. 하지만 마지막 인증은 평가 담당자의 문제로 인증에 어려움이 있었고, 결국 인증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이직을 하게 됐다. 퇴사 후 들은 얘기지만 진행 중이었던 인증은 결국 획득하지 못했다고 들었다.


요즘 세대들은 '받은 만큼 일한다'는 생각을 하고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평생직장의 의미가 없어진 지 오래고, 이제는 회사를 '주인 의식'을 갖고 다니라는 얘기는 폭행과 진배없다. 요즘 세대들 대부분은 직장에서의 '자아실현'보다는 현실적인 캐시카우 정도로 직장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더 이상 '열정 페이'나 '주인 의식'을 논하면 안 된다. 다만 받는 만큼 일해야 하는 양심적인 책임감을 갖는 것은 직장생활의 기본이자 자신과의 약속이다. 그래서 더도 덜도 말고 '딱 받는 만큼은 일하자'라는 생각은 필요해 보인다.


시작부터 삐걱대던 업무를 2년을 넘게 끌어온 것만 해도 지금 생각해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적성에 맞지 않았고,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평가를 담당하던 평가기관 평가원들도 편하지 않았고, 오히려 배려나 양심 없는 친구들을 만날 때도 많았다. 회사를 다니며 일도 결국 사람이 시작해서, 사람이 끝을 내는데 인증 관련 업무만은 사람하고 일한다는 생각보다 원칙, 규칙 등과 일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벗어난 적이 없다.


대가 없는 결과가 없다고 했던가. 어디에 쓸 때도 없을 것 같았던 업무임에도 가끔은 인증 관련 지식이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다. 지금 하는 일이 전혀 다르긴 하지만 가끔은, 아주 가끔은 그렇게라도 도움이 된다고 하니 내가 보낸 2년여의 시간이 조금은 보상이 되는 듯하다. 딱 돈 받은 만큼 일했던 그 시간이 말이다. 이제야 받은 돈 보다 조금 더 보탬이 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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