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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Jul 18. 2022

십억을 날려버렸다

그래도 사람만은 잃고 싶지 않았다

 "아이 X, 이게 뭐냐고. 기능 요구 사항에 이게 왜 지금 눈에 들어오냐고"


2013년 여름 어느 날 사무실 창 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고, 커다란 사무실 내에는 대부분 직원들이 퇴근하고 나와 같은 팀의 동료 한 명만이 남아 있었다. 동료와 나란히 앉은 책상에서 난 곧 계약을 앞둔 사업의 제품 기능 요구 사항을 다시 한번 검토하고 있었고, 조금 전까지 팀의 첫 대형 프로젝트가 될 사업 때문에 조금은 들뜬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들뜬 기분도 잠시였고, 발주처에서 공고한 기능 요구 사항을 다시 읽다가 난 '아뿔싸'하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졌고, 모공이 송연해지며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까지 들었다.


 "아이 X, 이게 뭐냐고. 기능 요구 사항에 이게 왜 지금 눈에 들어오냐고"

옆에서 다른 업무 때문에 남아서 일하던 동료가 이런 내 반응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고, 금세 터져버릴 것 같은 내 얼굴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팀장님,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정작 걱정하며 묻는 동료에게 무어라 말이 나오기보다는 그저 내 입에서 나오는 건 한숨뿐이었다. 아무 말 없이 한숨만 쉬는 내가 더 걱정되어 동료는 결국 내가 들여다보는 문서를 주저주저 뺏어 들었고, 한 참을 읽더니 내 반응의 이유를 알았는지 측은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팀장님, 너무 걱정 마세요. 쓰지도 않을 기능인데 뭘 걱정하세요. 이 기능 누가 쓴다고요"

 "준공 시험할 때 아마 캡처 정도는 해달라고 할 텐데 저희는 아예 구현이 안되어 있다고요. 이거 사업 공고 떴을 때는 왜 안보였는지 모르겠어요"

답답한 나머지 동료에게 조금 짜증을 냈고, 위로하는 동료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팀에서 처음으로 하는 대형 사업이 잘못될까 염려되어 책상에 엎드린 채 큰 한숨만 연신 토해냈다.


이런 내 모습이 딱해 보였는지 동료는 시원하게 맥주나 한잔하러 가자고 제안했고, 못 이기는 척 난 그를 따라 사무실을 벗어나 술자리를 하며 머릿속을 비우려고 애썼다. 하지만 생각같이 술이 들어가도 이 문제가 잊히지 않았고, 오히려 술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문제가 더 또렷하게 생각되며 끊임없이 괴롭혔다. 마치 사업 전에 기능 검토를 제대로 못한 내 실수 때문에 생긴 문제인 것 같았고, 준공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렇게 동료의 위로에도 내 기분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고, 다음날 출근해서까지 그 기분은 이어졌다. 다음날 아침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보는대도 일이 손이 안 잡혀 '멍'때리며 있는 나를 당시 관리자가 따로 불렀다.


 "김 팀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오전 내내 한숨 쉬던데"

아차 싶었다. 아마 풀리지 않는 그 문제에 대한 답답함에 나도 모르게 줄곧 한숨을 쉬고 있었나 보다. 내 바로 앞자리에 앉아있던 본부장이 이런 내가 왜 그러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었던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A기관 계약을 앞두고 있는데 제품 기능 요구사항을 다시 확인했더니 저희가 지원되지 않는 기능이 있더라고요. 제가 사전에 더 꼼꼼히 봤어야 했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내 얘기를 듣고 있던 본부장은 개발자 출신답게 어떤 기능인지 자세히 물었고, 몇 시간 뒤에 나를 다시 불러 자신의 모니터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렇게 나오면 되는 거 아닌가요? 굳이 구동 안돼도 된다고 들었는데"

그의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모니터에는 내가 걱정했던 지원 안 되는 기능의 명령어와 명령어 입력 시 출력될 정보가 함께 보였다.

 "네, 이렇게만 출력되면 될 것 같습니다. 이사님 이걸 어떻게..."

모니터를 보여주며 조금은 불안해 보이던 그의 모습도 어느새 환하게 날 보며 웃었다.

 "하하, 저 개발자 출신이잖아요. 이거 구동은 안되고 그냥 빌드만 된 거예요. 이렇게만 해도 된다고 하면 이 소프트웨어 버전 전달드릴게요. 팀장님, 이런 걸 가지고 걱정해요. 그냥 이렇게 하고 넘어가는 거죠"


이 일로 고민했던 나에게 본부장은 해당 문제는 별일 아닌 것처럼 말했고, 혹시나 문제가 생기더라도 책임지고,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많으니 사서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이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회사를 이직하고 팀을 새로 만들어서 운영한 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회사에 무언가를 보이려는 의욕이 컸었고, 성과를 이루기 전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난 그 순간 부담을 많이 느꼈었다. 정작 이렇게 빌드하고, 준비했던 소프트웨어도 고객사에서 사용할 일은 없었고, 정말 내가 사서 걱정한 꼴이 되었다.


얼마 전 난 옮긴 회사에서 큰 사업에 제안 담당 업무를 맡아 진행했다. 번번이 결과가 좋지 않았던 과거 사업과는 다르게 오랜 기간 준비했던 제안서는 처음으로 당당히 최고점을 받았다. 믿어왔던 회사 동료들에게 그간의 믿음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보여준 것 같아 기뻤고, 회사에 큰 기여를 한 것 같아 뿌듯했다. 하지만 난 그 기쁨을 누릴 수가 없었다. 제대로 된 축하를 받을 수도 없었다. 기술평가를 일등 하고도, 타 부서와 협업의 문제로 생각지도 못한 큰 실수를 범했다. 몇 날 며칠을 무거운 마음을 떨치지 못했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은 이런 날 피하는 것 같아 보였다. 최종 결과 발표일에 속이 타 들어가는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던 심정에서 동료들은 발표 현장을 찾았다. 하지만 오매불망 결과만 기다리던 내게 동료들은 발표일은 고사하고, 주말 내내 연락 한번 주지 않았다. 이직 이후 처음으로 옮겨간 회사에 실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있으면서 갑작스럽게 많은 부담을 갖게 됐다. 옮겨온 회사에서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만으로 느지막이 새롭게 시작했다. 하지만 난 이곳에서 작은 혹은 커질 수도 있는 생채기가 생겼다. 과거의 과실과는 차이가 있는 것을 안다. 이번 일은 사이즈부터 다르다. 하지만 난 무엇보다 사람이 먼저다. 정작 축하를 받아야 함에도 난 지탄을 받을 수도, 아니면 반성을 해야 하는 자리에 설 수도 있다. 지금 내가 어떤 자리에 서야 할지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판단할 수도 있겠지만 결과 때문에 과정이 매몰되는 현실만은 아니길 빌어본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런 책임을 마음에 갖는 것도 문제이지 않을까 하는 무거운 생각이 든다.


기대했는데 십억 원이 눈앞에서 날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아쉽겠지만 직접 제안 작업을 했던 나는 아쉬우면 더 아쉽고, 안타까우면 더 안타까울 거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꾸준한 관계는 이런 작은 배려에서 이루어짐을 알려주고 싶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한 드라마 속 대사가 오늘따라 더 생각이 난다.



지난 일요일까지는 글에 쓴 내용과 똑같은 마음이었다. 많이 복잡했고,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오늘 글 발행 전에 많은 생각들을 했고, 동료들과 많이 이야기가 오갔다. 동료들의 생각도 나와 같았음을 알았고, 그들도 복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나를 챙기기에는 자신들도 괴로움의 터널에 갇혀 있었고, 문득문득 생각했지만 볼 낯이 없을 만큼 창피하기도 했다고 했다. 지난 며칠간 십억만 큼의 내 노력의 결실과 당장은 떨쳐내기 어려운 마음의 아쉬움을 잃었다. 하지만 난 내가 노력한 과정이 매몰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내 주변에는 아직 함께 일하고 싶은 동료들이 남아 있었다. 난 사람만큼은 잃지 않았다. 그걸로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쉬운 마음이야 꽤 긴 시간을 가겠지만 그걸로 잊힐 것이다.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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