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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May 23. 2022

악연이었던 상사가 내 인사평가를 높게 줬다

꼬여버린 사람과의 관계는 잘라내긴 쉬워도 풀어내긴 어렵다

 "김 팀장, 오랜만이에요. 우리가 인연이긴 한가 봐"

 "아...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나요?"




다니던 회사의 매각으로 중견벤처기업에서 졸지에 대기업의 탈을 쓰게 된 적이 있었다. 현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노력 없이도 대기업에 입사하게 되었으니 좋겠다는 부러움의 감정만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마냥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벤처의 특성상 유연한 의사 결정이나 추진력이 필요한 일에는 협업의 속도가 여러 단계에 걸친 의사결정 없이 실무자 간에 추진되는 장점이 있었다. 대부분의 관계가 정치와는 무관하게 연결, 연결되어 돌아갔고, 크게 이권의 개입 없이 개인들의 역량에 따라 업무의 우선순위가 결정되던 때였다.


물론 이런 이면에도 단점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일을 벌인 사람은 있지만 책임져야 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때가 많았고, 조직의 성과를 따져야 할 때에도 번번이 개인의 관계나 역량으로 의사 결정이 이루어졌다. 신중한 검토 없이 추진된 일들을 수습하느라 누군 힘이 들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래도 그렇게 처리되고, 굴러가면서도 회사가 성장하는 건 벤처만의 문화 때문인 것 같았다. 누가 누구에게 잘 보이고, 누군가의 줄에 서야 한다는 논란이 없어서 그것만으로도 좋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입사한 지 몇 년이 지나지 않아 회사의 최대주주인 당시 대표이사가 모회사의 경영난으로 재직 중인 회사를 매각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크지 않은 회사에서 들려오는 건 소문이었지만 너무 구체적이었고, 누가 들어도 알만한 회사들 이름이 하루가 멀다 하고 거론되었다. 그 얘기가 나온 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렇게 난 대기업 직원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모그룹의 손자 회사로 그룹 계열사로 편입되었고, 주변의 지인들과 선후배들이 부러워하는 내 사회생활에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대기업 직장인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특별히 달라질 것 없을 것이라는 모그룹 인사팀과 내부 경영진의 얘기와는 다르게 복리후생부터 규정 하물며 내부 업무시스템까지 모든 게 바뀌었다. 그래도 하던 업무나 업무환경은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뀌게 되었고, 그 처음 사건이 재직 중인 회사 개발 소프트웨어의 첫 번째 고객사가 그룹 계열사 중 하나가 되면서부터였다.


해당 소프트웨어 개발 기획부터 기술지원까지 내가 몸 담고 있었던 팀에서 진행하였던 업무라 당연히 우리 팀에서 구축을 전담했고, 어리석게도 그룹 내 한 식구라는 생각에 당연히 일반 고객사들에 비해 서로 편의를 봐줘가며 업무 진행이 가능할 줄 알았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평소보다 더 어려움 속에 프로젝트를 진행해 나갔다. 이런 것까지 지원해줘야 하나 싶을 정도의 지원 요청에, 추가 개발 요청 사항은 완성된 제품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뜯어고치려는 '갑'질을 제대로 보여주는 듯 보였다. 시간이 흘러 프로젝트는 마무리가 되었고, 담당부서간에 마지막 회식이 있어서 모그룹 계열사의 인프라팀과 우리 팀 간에 회식이 있었다. 당연히 가고 싶지 않았지만 팀장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실무 담당, 영업 담당과 함께 관련 부서를 만나 저녁 자리를 함께 했다.


  "박 팀장님, 프로젝트 마무리까지 도와주셔서 수고 많으셨습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문제없도록 최선을 다할게요" 내 입에서 어울리지도 않는 립서비스 멘트가 나갔고, 뱉은 나도 놀랐지만 그 얘길 듣던 그룹 계열사 인프라 팀장도 놀란 눈치였다.

  "네, 저희 직원들이 좀 고생했죠. 제품을 좀 잘 만드시지 사용하면 할수록 문제가 생겨서 혼났어요" 가는 말이 고왔으면 오는 말도 고을 거라는 기대는 사치였다. 역시 그는 본연의 태도로 프로젝트 종료 시까지 담당이었던 우리 팀원에게 대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하하, 계열사 직원들이면 한 식구인데 저희 담당자도 고생을 많이 했더라고요. 아무리 다른 회사여도 그래도 같은 계열사인데 매일 아침마다 부르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었어요" 이젠 더는 안 볼 사이라고 생각했더니 그의 가시 돋친 말에 한 술 더 떠서 분위기는 더욱 묘하게 돌았다. 결국 그날의 회식은 프로젝트 진행 당시 분위기와 비슷하게 긴장감 속에 끝이 났다.


같은 그룹의 계열사이자 내가 다니는 회사 모 회사의 인프라 팀장이었던 박 팀장과는 그렇게 계열사 식구가 아닌 갑과 을로 엮인 결코 좋은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로젝트도 종료된 시점에서 그와의 인연도 거기가 끝인 줄 알았고, 내가 생각했던 대로 한 동안은 그와 엮일 일은 없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알 수 없었다. 모 회사의 경영 참여가 본격적으로 되면서 회사 내 중요직에 그룹에서 인사발령을 받고 인사 이동해 오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대상엔 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와의 관계는 그렇게 또다시 시작됐다. 이번에는 상사와 부하 직원으로.


  "김 팀장,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음료를 마시기 위해 들렀던 탕비실에서 내가 다니는 회사 내 한 부서의 본부장으로 인사발령받고 온 박 팀장을 만났다. 썩 기분은 좋지 않았지만 특별히 인사를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나도 웃으며 그와 환영 인사를 나눴다.

  "아, 박 팀장님. 아니지 박 본부장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죠. 이번에 저희 회사 기술 총괄 본부장으로 발령받으셨죠. 축하드립니다"  

  "고마워요. 이젠 정말 한 식구니까 잘해봅시다. 그래도 내가 기술 총괄 본부장이니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 얘기하고"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그도 특별히 가시 없이 내게 말은 했지만 은연중에 자신이 상사임을 강조하는 권위적 멘트가 거슬려서 결국 묵었던 감정을 참지 못하고 가시 돋친 말을 뱉었다.

  "그러게요. 이젠 정말 한 식구네요. 그땐 그렇게 팍팍하게 대하셨었는데 이젠 감싸주시겠죠. 전 본부장님 부서가 아니라 아쉽긴 하지만 그때처럼 본부장님 하고 상관없이 제가 잘 헤쳐나가야죠. 의지하지 않고"


결국 오래전 묵은 감정들이 다시 리마인드 되면서 결국 나와 그와의 화해, 이해, 협상, 타협 등의 자리는 물 건너가 버렸다. 그렇게 하루, 하루 시간은 흘렀고 그렇게 일, 이년이 지난 뒤 내가 몸담고 있었던 팀은 대대적인 조직개편에서 해체로 결정되었다. 최종 조직 개편 전 날 찾아온 건 그였고, 마지막으로 내게 기회를 준 것도 그였다. 기술부서 내 원하는 팀으로의 인사이동을 물었고,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부서를 옮길 수 있었다.  그와 함께 근무한 것도 2년이 조금 넘는 듯하다. 그 2년의 시간 동안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당시 날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팀장이 내 인사평과를 생각했던 것보다 평가절하하였지만, 2차 고과자였던 박 본부장이 나에 대한 평가를 높게 준 사실을 알게 됐다. 사건 이후로 그와의 인연을 악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전 그는 그의 업무를 한 것이고, 그의 정확하고, 꼼꼼한 업무 스타일을 난 오해하고, 왜곡하며 감정적으로 받아들인 것뿐이었다. 결국 그가 내게 손 내밀고, 평가를 바꿔준 것은 그의 기준에서 나라는 사람에 대한 직원으로서의 정당한 평가였다. 그는 끝까지 내게 감정이 없었다.


사람일이라는 게 한 치 앞을 알 수가 없다.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그와는 세 번이나 엮이게 되었고, 마지막 세 번째 엮인 인연은 내게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인연(因緣)은 사람들 간에 맺어지는 특별한 관계를 정의한다. 연인, 부부와 같이 이성 간의 운명적 관계에 국한 지을 수도 있지만 반세기를 사는 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단순하게 이 인연이란 말이 사랑하는 이성 간의 관계로 좁힐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큰 범주에서 관계를 정의하는데 중요한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철천지 원수가 아닌 이상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언제든지, 어떤 장소에서든 생길 수 있는 일이다. 예전에 우스갯소리로 IT 바닥이 좁으니 처신 잘해야 한다는 얘길 선배들에게 들은 적이 있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알게 될 사람들이고, 언제 '갑'이 '을'되고, '을'이 '갑'이 될 줄 모르는 환경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이 말을 조심스럽게 다시 정의하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이유가 있다. 굳이 선을 그어놓고, 자신만의 잣대로 그 사람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다. 더 이상 안 볼 사람으로 함부로 대하고, 감정을 쏟아내면 그 또한 부메랑이 되어 언제고 또 다른 악연이 되어 만날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 관계는 잘라내기는 쉬워도 풀어내기는 어렵다. 정말 모질게 잘라낼 사람이나 관계가 아니면 풀지 못할 정도로 꼬지 않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이미지 출처 : tvN 드라마 『미생』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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