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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Dec 12. 2023

나도 가끔은 나쁜 사람이고 싶다

모든 관계가 만족스럽고, 좋을 순 없다.

얼마 전 딸아이가 학폭에 연루된 일이 생겼다. 학교를 다니며 아이들 간에 사사로이 다툼 있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딸아이가 학폭으로 문제가 된 것은 처음이다. 거기다 피해자도 아닌 가해자로.


사건의 발단은 아이의 친구 중 한 명과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한 학생과의 다툼부터였다. 작은 말다툼에서 시작된 사건은 수일이 지나고 불 번지듯이 커져버렸다. 이런 과정에서 딸아이는 주 가해자로 지목된 학생과 친하게 지낸 이유만으로 피해 학생의 신고서에 이름이 들어갔다. 평소와 같은 하루였지만 친구와 대화 중에 웃었다는 이유로 사건 가담자로 지목된 것이다. 실제 웃지도 않았지만 피해 학생의 주장은 자신 얘기를 하며 웃은 것 같다는 주장이었다.


진술서 작성과 여러 차례 억울함을 설명해 봤지만 학교 측에서는 신고가 접수된 이상 피해 학생 입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처음 피해 학생은 가해 학생으로 지목한 딸을 포함한 여러 친구들을 어떻게든 괴롭히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학교의 면담도 거부하고, 있지도 않았던 얘기를 자신이 느낀 감정만으로 문제를 키웠다. '자신을 따돌림하는 것 같다', '뒤에서 자기 얘길 하는 것 같다' 등과 같이 마치 일부러 아이들을 괴롭히는 것 같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딸아이와 친구들은 여러 차례 면담고, 학생부 선생님 참관하에 대화도 시도해 봤다. 처음엔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아내와 나도 중요한 시기에 불안정한 학교생활이 걱정되어 어떤 식으로든 해결되길 바랐다.


결국 피해학생이 입장을 밝혔고, 요청한 내용은 처음과 달리 간단했다. 서면 사과! 그것도 처음 요구했던 가해학생 전체의 사과에서, 개별 사과도 수용한다는 입장으로 바뀌었다. 딸의 결정은 쉽고, 간단했다. 잘잘못을 떠나서 아니 정확히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해도 2, 3주 괴롭힘을 받았던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의도한 상황이 아니었어도 '사과'하는 것만으로도 그간 불안한 마음을 홀가분하게 던져버릴 수 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딸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잘못하지도 않았는데 '사과'는 절대 못한다는 친구 몇 명의 일관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애초에 이런 문제 때문에 학교에서는 개별적 사과를 수용했다. 하지만 딸은 이런 친구들에 반하여 자신만 빠져나간다는 죄책감이 마음 한편에 있었던 듯싶었다. 아이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는 갔지만 그대로 있다간 아이까지 좋지 못한 상황에 휘말릴까 아내는 걱정했다. 이런 아내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던 난 며칠 전 저녁 딸에게 얘기했다.


 '딸! 자신이 잘못하지 않았다고 해도 피해자라고 말한 학생 입장에서 상처가 된 일이 있을 수도 있어. 게다가 이미 사과하기로 결정한 마당에 다른 걸 신경 쓰기엔 그동안 너무 힘들었고 지쳤잖아. 제일 중요한 건 자신이야. 결정이 필요할 땐 '나'만 생각해. 모든 관계가 만족스럽고, 좋을 순 없어. 친구관계도 마찬가지야. 알았지?'

얼마 전 중요한 회사 이슈로 회의를 주관한 적이 있었다. 최근 오랜 시간 준비했던 제품 인증을 외부 기관으로부터 인정받았지만 생각과는 다른 결과로 이어졌다. 가 생각하는 방향과는 조금은 다른 영향과 결과였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조금은 자책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점에 '책임 공방'은 회사면 당연히 나올 법한 얘기였다. 하지만 회사가 원했던 다른 인증도 함께 지정받은 입장에서 관심과 도움이 적었던 개별 업무라 서운함이 컸다. 게다가 회의 요청을 한 건 나였지만 내가 생각했던 회의 방향과는 다르게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관련 업무를 주관해서 맡아줘야 할 부서에서 결국 인증을 담당했던 내게로 업무가 넘어오는 듯싶었다. 속에서는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고, 며칠 전 들었던 자책까지 겹쳐져 머릿속은 이미 폭풍 속 같았다. 감정을 속이기 쉽지 않았다. 이미 얼굴에는 그 복잡하고, 어지러운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함께 회의를 하던 다른 부서 임원이 이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조심스럽게 말했다.


 '김 이사님은 너무 착해서 다른 분들에게 자신이 착한 사람이어야 한 것 같아요. 오늘 회의 내내  고생했는데도 회사에서는 알아봐 주지 않으니 당연히 서운하시겠죠. 참고 있지 마시고 말씀하세요. 오히려 지금 쌓인 감정 그대로 얘기했으면 합니다'


이 한마디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되었고, 결국 난 참았던 말과 감정을 그대로 토해냈다. '진행할 때는 관심도 없었다',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이었던', '도대체 밥 지어서 떠먹여 주기까지 해야 합니까' 등 지금 생각해도 낯 뜨거운 말들이 입 밖으로 나왔다. 던져낸 말들 때문에 그날 긴 시간 동안 관련 업무 분장을 새로 하게 했다. 또한 부서 간 불만과 아쉬움, 협조 요청 방안 등에 대해 편하게 얘기하는 자리로 이어졌다. 득(得)보다 실(失)이 많았는지, 실(失)보다 득(得)이 많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하고 싶은 말을 한 내 마음만은 편해졌다.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감정을 모두 드러내면서까지 내 속을 보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을 때는 감정은 빼고, 사고에 따른 결과물을 이야기하는 게 옳다. 하지만 내 속에는 상처가 나고, 내 화는 고스란히 쌓이는데 참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길 원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반복해서 포장하게 되면 자신의 감정을 속이는 게 일상이 돼버린다. 진실 없는 속 빈 감정에 매몰될 수도 있다.


거미줄 같은 복잡한 관계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 적당히 감정 표현, 표출이 필요하고, 상황에 따라 나쁜 사람이 돼도 된다는 식의 사고가 필요하다.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만족할 수 없듯이, 자신의 감정을 속이면서까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마음 가는 대로 표출하고, 진실되게 표현하는 게 자신의 긴 삶 속 건강한 관계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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