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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Jan 09. 2024

매주 삼백만 원씩 칠 년을 줬다

당신은 관계에서 무죄입니까

'팀장님, 쉬는 날 죄송합니다'

평온한 휴일 저녁 갑작스러운 팀 동료의 전화에 놀란 마음에 전화를 받았다. 특별한 일이 없고는 퇴근 후 연락을 하지는 않는지라 무슨 일인가 궁금함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응, 괜찮아. 무슨 일 있어?'

'다름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집에 일이 생겨서 내일 시골에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휴가 좀 써야 할 것 같아요'

평소와는 다른 휴가 통보에 조금은 의아했지만 오죽하면 그럴까 싶은 마음에 조심히 다녀오라고 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인가 걱정은 됐지만 심상치 않은 동료의 목소리에 더는 물어볼 수 없었다.


그렇게 다음 날 오후쯤 됐을 때 다시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팀장님! 정말 죄송한데 하루만 더 휴가를 올려도 될까요?'

하루 더 휴가를 쓰겠다는 말에 어제부터 묻고 싶었던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이유를 물었다.

'아내가 친구에게 사기를 당한 것 같습니다. 오랜 기간 상상할 수 없는 큰돈을 저 몰래 빌려준 것 같아요'

자세한 건 복귀하고 얘기한다고 말하고 후배는 입을 닫았다. 후배의 말이 처음엔 장난처럼 들렸지만 그의 한숨과 침묵에 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더는 물어볼 수 없음을 알고 휴가 다녀와서 얘기하자고 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하루가 더 지나고, 후배는 다음날 아침에 출근했다. 후배는 휴가 복귀하는 아침부터 표정이 좋지 않았다. 살짝만 옆에서 건드려도 금세 터져버릴 듯한 인상으로, 시선은 모니터를 향했지만 집중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옆에서 지켜만 보는 나도 그의 불안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오전 시간이 조금 지나고 조용히 불러 무슨 일인지 물었다. 후배는 길게 한숨을 뱉고는 며칠간의 이야기를 내게 털어놨다.


이야기의 요점은 이랬다. 후배 아내에게 오랜 시간 연락이 없던 초등학교 친구에게서 갑작스럽게 연락이 왔다. 오랜 시간 연락하지 않았던 사이라 어색하고, 불편할 줄 알았는데 초등학교 동창이어서인지 금세 가까워졌다. 이렇게 가까워진 친구는 자신이 사기를 당했고, 이 문제로 현재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친구와 예전 좋았던 기억 때문인지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는 동질감 때문인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매일 카톡과 전화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그렇게 가까워진 어느 날 친구는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어려운 삶을 얘기하며 생활비 목적으로 돈을 빌려갔다. 현재 남편이 개인 회생 중이고, 빨리 회생절차를 끝내려고 무리해서 돈을 갚고 있는데 이에 따른 사건 처리 비용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생활고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초등학생 아이까지 있어서 많이 힘들어서 그러니 생활비를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남편이 현재 대기업에 다니기 때문에 개인회생이 끝나면 무조건 갚는다는 뻔한 약속까지 하면서 후배 아내를 안심시키기까지 했다.


처음엔 어렵게 얘기를 꺼냈지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당당하게 돈을 요구했다. 더 이상 돈이 없다고 얘기하면 자신의 문제가 아닌 공동의 책임인 것처럼 전화, 카톡으로 신세 한탄, 압박을 서슴지 않았다. 조금 더 심한 날은 '악'까지 쓰면서 후배 아내에게 절망과 좌절을 안겼다.


'야, 이게 나 혼자의 문제니? 내걸 처리 해야 네 돈도 갚지. 안 그래?'

'나 더 이상 이렇게 비참하게 살고 싶지 않아. 이 돈 못 구하면 어차피 다 끝나'

'너 계속 그런 식이면 그냥 포기하고 도망갈 거야. 날 고소하던지 죽이던지 알아서 해. 그만할 테니 연락하지 마'


연락은 후배 아내가 출산을 할 때도, 수술을 할 때도, 경조사로 정신이 없을 때조차도 이어졌다. 이렇게 친구의 뻔뻔함은 도를 넘은 지 오래였다. 이렇게 친구에게 수년간 심리적 지배를 당했고, 이 기간 동안 친구가 포기해 빌려간 돈을 받지 못할까 봐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겠지 하는 생각과는 달리 빌려달라는 횟수는 꾸준히 늘었고, 빌려달라는 이유도 다양해졌다.


후배 아내는 이런 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남편인 후배 명의부터 처가 식구들 명의로도 돈을 빌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지경에 이르자 당연한 얘기지만 생활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심리적 지배를 당한 당사자에게는 벗어날 수 없는 거미줄 같은 굴레였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개미지옥 같이 빠져나오려고 허우적거려 봤자 더 깊게 빠져든 느낌이지 않았을까.

숨길 수 없는 사실임을 늦게라도 깨닫고서야 드디어 폭로에 이르렀다!!!


후배의 급여는 고사하고, 가계 대출로 받을 수 있는 최대치까지 받고서야 그 폭주는 멈춰 설 수 있었다. 이 사실을 들은 후배는 처음엔 그냥 웃음만 났다고 했다. 현실감이 없었을 것이고,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쉬이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현실임을 깨닫게 됐고, 이런 현실이 두려워졌을 것이다. 또 긴 시간 자신을 속여온 아내에게 배신감까지 들었을 것이다.  


후배는 이 사실을 알고서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도대체 왜', '정말 생활고에 시달리는지', '잘못을 알고 있는지' 등을 묻고 싶어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당장에라도 아내의 친구를 봐야겠다는 생각에 휴가를 냈고, 직접 집에 찾아가 보고 나서야 '당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당장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테고, 안다고 한들 그럴 의욕도 없었을 것이다. 십 년이 넘는 결혼생활이 한순간에 무너질 위기까지 왔지만 주변의 조언, 위로가 두 사람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했다고 후배는 말했다. 무엇보다 후배 부부에겐 두 아이가 있어서 더 이상의 좌절과 포기는 있을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 그냥 좌절하고 만다면 아이들에게도 큰 아픔과 상처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은 아내 친구를 상대로 법적인 조치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모쪼록 벌 받을 사람은 벌을 받고, 다시 보통의 삶으로 복귀하길 진심으로 빌어본다.


얼마 전 한 가정을 파탄 낸 '가스라이팅' 사건을 기사로 접한 적이 있다. 무려 19년에 걸친 긴 시간 동안 엄마와 삼 남매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수억 원을 갈취하고, 폭행하고, 성범죄까지 저지른 사건이었다. 일반적인 상식에서는 '왜 당하지'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지만 주변 동료의 사건을 보고서는 관계를 이용하면 악의적인 범행에 이르는 사건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람과의 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관계에서 오는 두려움, 공포도 간과하기가 어렵다.


관계에서 기본은 소통이다. 서로가 신뢰를 쌓아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소통해야 한다. 상대가 듣기 좋아할 얘기만 한다고 해서 좋은 관계는 아니다. 서로 듣기 불편한 얘기라도 나중에 알게 되면 상처 주고, 상처가 될 일이면 대화는 언제든 필요하다. 신뢰에 있어서 소통은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이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관계는 오랜 시간 함께한 사람이 아닌 짧더라도 마음을 나눈 사이가 아닐까 싶다.


종종 대화를 하지 않으면 서로 어색하고, 불편해서 끊임없이 대화하는 사람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재밌고, 외향적으로 보여 함께 있는 사람은 불편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화의 단절이나, 적막함을 불편하게 생각해서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는 당사자는 그 관계가 편할 수가 없다. 결국 말을 하지 않으면 금세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그나마 간신히 붙어있는 꼴이다.


긴 시간을 알고 지냈다고 해서 상대방을 많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얼마나 진솔하게 상대방과 소통했는지가 관계의 깊이를 가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대화를 한다고 해서 꼭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닌 것처럼 대화가 없더라도 마음을 열고 소통하는 사이가 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관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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