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관계라는 게 존재할까? 살면서 종종 생각나게 하는 질문이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하늘이 맺어줬다고 하는 천륜이라고 하지만 결국 그 관계도 죽음 앞에 자유롭지 않다. 죽음 앞에서는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은 것 같다. 죽음이 아니어도 모든 관계는 어떤 형태로든 끝이 있기 마련이다.
있을 때 꾸준히 잘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함께 할 때 잘해야 하는 이유는 헤어진 후 그 관계의 의미와 중요성을 깨달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지나고 나서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이 종종 있다는 말이다. 관계에서는 어제보다 오늘이, 내일보다도 오늘이 더 중요하다. 그만큼 현재에 진심이어야 앞으로의 관계에 대한 후회도, 미련도 없을 것이다.
2019년 12월의 어느 날 출근길에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요양병원에 계시던 어머니가 방금 돌아가셨다는 전화였다. 어머니와의 이별이 멀지 않았음을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음에도 막상 부음을 전해 들으니 머릿속이 멈춘 듯했다. 붐비는 출근 지하철임에도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사고 자체가 정지된 것처럼 무엇부터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돌아가시기 일 년 전 어머니가 허리뼈 골절로 병원에 계실 때도, 병원에서 항암치료를 포기하고 요양병원으로 어머니를 모신 이후에도 난 시간 내 며칠씩 병원을 들여다봤어야 했다. 하지만 난 바쁘다는 핑계로, 어머니 마음이 약해진다는 이유로 단 하루씩만 어머니에게 시간을 할애했다. '당분간은 괜찮을 거야', '다음에 또 오면 되지'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모질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곤 했다.
잊고 있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와의 관계가 그렇게 끊어질지. 하지만 정작 돌이켜보면 미련과 후회는 고스란히 남은 사람의 몫임을 왜 몰랐을까. 슬픔인지, 미련인지 모를 아픔만 남았다. 후회 없는 삶이 어디 있겠냐만은 일어날 후회를 먼저 알 수 있었으면 조금은 더 현재에 충실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나간 상처뿐이지만 막상 지금도 떠올려보면 조금 더 애썼더라면 가끔이라도 떠오르는 미련이라도 없지 않았을까. 아쉬움일까, 그리움일까 모를 내 감정을 머릿속에서 일부러 털어내지는 않으려고 한다. 그렇게라도 해야 남은 미련과 그리움에 조금은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카톡~!'
주말 새벽, 어두운 방안 정적을 깨우는 소리에 잠이 깼다. 평소 같으면 새벽잠을 깨우는 소리에 짜증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새벽에 울리는 소리가 반갑기만 하다. 옆에서는 깊이 잠든 아내의 숨소리뿐이다. 적막한 방에서 소리라곤 메시지 알림음이 전부다. 조금 잠이 덜 깬 눈으로 스마트폰 위치를 좇았다.
'카톡~!'
또 한 번 정적을 깨우는 소리에 손을 뻗고 스마트폰을 잡았다. 일주일 만에 꿀잠을 누릴 하루지만 오늘은 잠까지 설치며 기다린 연락이다. 급하게 카톡을 실행하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필라델피아 도착했습니다'
'기내식 맛있네요'
아침 5시 30분. 휴일이라 누군가 메시지를 보내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다. 하지만 기다리던 아들의 메시지였다. 나도 모르게 지어지는 미소 때문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지는 게 느껴졌다. 대학생이 되고 나서 친구들하고 며칠씩 여행을 간다고 훌쩍 집을 떠난 적은 여러 번 있지만 이번처럼 긴 시간 집을 떠나는 건 처음이다. 그것도 멀고도 먼 미국까지. 나이 든 자식도 부모에게는 그냥 자식일 뿐이라고 했던가. 스물두 살이나 됐지만 아들은 아직 내게 자식인가 보다. 법적으로 성인이라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끼고 사는 자식이라 그런지 더 걱정이 크다.
좋은 기회로 학교에서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에 합격해 미국까지 가게 됐다. 어렵사리 잡은 기회라 적지 않은 비용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5주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집을 떠나 지낼 아들이 조금 걱정은 된다. 하지만 곧 군입대를 앞둔 아들이기에 입대 전 '예행연습' 정도로 생각했더니 한결 마음이 편하다.
토요일 아침 비행기로 출국한 지 스무 시간 만이다. 디트로이트를 경유하는 비행기 편이어서인지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린 듯했다. 학교 연수 정식 일정은 이틀뒤라 내일까지는 필라델피아 여기저기를 둘러볼 계획이라고 했다. 친한 친구 없이 같은 학교 연수 프로그램 신청 학생들과 조를 이뤄 떠난 연수지만 출국 전 공항에서 본 아들의 표정은 무척이나 설레했다. 새로운 나라, 도시, 학교, 환경, 사람들과의 만남이 표현하지 않아도 기대가 되는 얼굴이었다.
'나 안 하려고 해도 반강제적으로 회화 능력 레벨업 될 거 같아요. 방 배정을 받았는데 일본학생이 내 룸메예요. 다행히 영어를 엄청 잘하네요'
'아들, 어학연수도 아닌데 일석이조, 일거양득 되겠네'
같은 학교 학생들끼리 방배정을 기대했는데 막상 전혀 모르는 외국 학생과 한 방을 쓴다고 해서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아들은 이 상황조차도 즐기는 듯했다. 막상 비어있는 아들 방을 보니 벌써부터 마음 한편이 허전한데 사월이 되면 정말 더 허전하지 싶다. 끼고 살날도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갑자기 스민다.
꾸준히 이어오지 않던 관계라도 함께했던 시간을 충실했던 사람들은 어제 인연과의 소식이 어색하지 않다. 몇 년 전 함께 일했던 동료에게서 연락을 받은 적이 있다. 짧은 인사는 형식적이었고, 꺼낸 본론은 충격 그 자체였다.
'삼천만 원만 빌려주세요 부장님'
함께 일하던 당시에도 항상 본인 위주의 생각과 아집으로 무척이나 힘들게 했던 동료였다. 업무 협조 시에는 본인 입장에서 손해가 갈만한 일이면 전혀 희생이 없었고, 반대의 경우에는 다른 동료의 희생을 강요했다. 당장 앞에서만 하는 척, 친한 척했고, 뒤에서는 거짓말과 변명으로 일관된 행동을 보여온 직원이었다. 함께 했던 시간에 그의 행동과 태도를 봐왔기에 그의 부탁은 당연한 얘기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연락처 차단까진 아니어도 그의 전화번호 저장명에 '위험인물'이라는 옵션이 추가됐다.
누구에게나 뻔뻔한 사람이 있다. 자신이 하는 무례한 행동이나 요구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칠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혹은 너무도 당당히 이해를 구하기도 한다. 자신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고 말하기 전에 자신이 했던 행동과 태도를 돌아봤으면 한다.
모든 관계에서 끝은 어떤 식으로든 존재한다. 모든 일들의 시작만큼이나 끝이 중요하듯이 관계에서도 이 끝은 중요하다. 어떻게 끝을 냈는지에 따라 다음에도 관계가 다시 이어질 수도, 철천지 원수와 같은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오늘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충실해야 하는 이유다. 아름다운 과정이 있어야 행복한 끝이 있듯이 오늘을 함께하는 관계가 있어야 내일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