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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Feb 06. 2024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습니다

관계에서 선택은 조건이고, 집중은 필수입니다

 '김 차장, 팀장 발령 축하해!'


갑작스러운 관리자의 퇴사로 관리자 자리가 공석이 됐다. 다시 뽑을 줄 알았던 관리자 직책에는 적임자가 나타나지 않았고, 팀장 자리의 부재가 길어졌다. 지켜보던 본부장이 운영상 문제 등을 이유로 기존 인력 중 관리자에 적합한 사람을 추천받았고, 많은 후임들이 나를 관리자로 추천하여 생애 첫 팀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다.


처음 관리자가 됐을 때는 부담이 컸었다. 매주 하는 팀장급 회의에서는 가급적 말을 줄였고, 임원들 중에 누군가가 내게 질문을 할 때면 당황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시간이 가며 점점 그 자리도 익숙해졌고, 임원들과의 식사나 술자리도 많아졌다.


 '김 팀장님, 아니 관리자 처음 하는 것 맞아요? 아니 안 시켰으면 어쩔뻔했어. 카리스마가 차다 못해 넘쳐'

 '아 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요 이 팀장님'


본부 전체 회식에서 다른 팀의 팀장과 자리를 마주하게 됐다. 함께 근무한 지는 2년이 넘었지만 부서도 다르고, 협업하는 업무도 많지 않다 보니 그와는 친분이나 교류가  많이 없었다. 그런 그가 날 마주하며 한 말이 팀장으로서의 평가라니 기분이 묘했다. 그는 애초에 회사 창립 멤버에 팀장으로 직책을 맡고 업무를 시작했다. 겉으로는 아닌척해도 동년배에 직급도 비슷하지만 새롭게 관리자가 된 나를 보는 그의 시선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구경하는 눈치였다. 그의 말이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날 이후로도 다른 자리에서도 타 부서 직원들과 어울릴 때면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얘길 했었고, 그럴 때마다 그냥 웃어 넘기기 일쑤였다. 좋은 말도 자주 듣다 보면 듣기 싫어지거나 본질을 오해할 수 있다고 하는데 내게 좋게 들리지 않았던 말이니 더욱더 피하고 싶은 언어가 됐다. 피할 수 있는 자리는 가급적 피하려고 애썼고, 일 잘한다는 칭찬도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늘 날이 서있는 사람처럼 예민했던 날이 많았고, 업무에서도 실수가 없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오랜만에 팀 회식 자리가 생겼다. 일이 많고 힘든 부서다 보니 전체가 함께 모일 일이 자주 없었다. 다행히 그날은 열명이 넘는 팀원이 전부 모였고, 좋은 분위기에 다들 반가웠는지 긴 시간 술자리를 이어갔다. 마치 내일이 오지 않고 지금 시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마음처럼 다들 떠나가라 웃고, 즐기는 자리였다. 다들 술도 많이 됐고, 집이 먼 동료들이 있었음에도 그 자리를 선 듯 먼저 끝내자는 팀원은 아무도 없었다.


 '팀장님~! 정말 전 팀장님이 좋은데, 별롭니다. 팀장님이 워낙 살뜰히 챙기시는 통에 저희가 게으를 틈이 없어요. 다 마음에 안 들지만 팀장님의 그 인간미 없는 꼼꼼함이나, 철두철미한 책임감이 싫습니다. 이젠 집에도 일찍 일찍 가시고 그러세요'

 '하하~맞아요. 팀장님! 좀 회사일은 후배들에게 맡기시고 좀 설렁설렁하시죠'


동료 중 한 명이 일어나 웃으며 내게 농 짙은 농담을 했고, 술자리고, 분위기도 워낙 좋았던 날이라 많은 동료들의 동조하는 목소리가 더 커졌다. 후배의 말을 듣고 금세 난 무거운 마음이 들었고, 어느새 표정까지 어두워졌다. 이유 없이 화도 나고, 서운하기도 했지만 최대한 감정을 누르고 조용히 말했다.


 '그래, 미안하게 됐네. 내가 당신들 팀장이라. 부족한 것도 많고, 눈치도 없었네. 그렇게 고충이 있는 줄도 모르고 배려 없이 내 생각만 했어'


감정 없는 톤으로 나온 내 말 때문에 좋았던 분위기는 일순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식었다. 나와 멀리 자리를 했던 동료들조차 멈추다만 웃음으로 어색한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갔고, 나 때문에 무거워진 분위기 수습을 어찌할지 몰라 피하듯이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러자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었던 친한 동료가 나를 따라 나왔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미안하다. 나 때문에 분위기 이상해졌네'

 '팀장님 아니 형! 형 요즘 너무 예민하신 거 같아요. 마치 뾰족한 바늘이나 날 선 칼처럼요. 많이 힘드시죠. 그래도 좀 전에는 형 답지 않았어요'


후배의 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차가운 밤공기 때문이었는지 올랐던 취기가 사라진 것 같았다. 최근을 돌아보니 예민하고, 날 선 상태였던 내 모습이 보였다. 첫 관리자라서 실수가 많을 수도 있었지만, 선후배가 믿고 맡긴 팀장 자리에 대한 책임감이 오히려 스스로를 괴롭혔던 듯싶었다. 잠깐이지만 후배의 나답지 않다는 말 한마디가 나를 반성하고, 위로하는 한 마디가 됐다.


 '그래. 원래 난 이렇게 예민하지도, 뾰족하지도 않잖아. 원래 날 잘 알던 선후배들이 믿고 추천한 자리니 그들이 아는 나로 지금 자리에서도 열심히 하면 되잖아'


그날 이후 쓸데없는 부담이나 책임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썼다. 말처럼 쉽지는 않았지만 의식하지 않으려고 애썼고, 남들에게 뭔가 보여주기보다는 스스로가 만족할만한 목표로 태도를 바꿨다. 가끔 날도 서고, 예민해지기도 했지만 이런 나도 원래 내 모습 중 하나이니 주변 동료들도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이야기가 있는 사람 간에는 관계가 있다. 이런 관계는 수직관계일 수도 있고, 수평관계일 수도 있다. 또 가까운 관계일 수도 있고, 그냥 그저 그런 관계일 수도 있다. 이런 많은 관계들 중에서도 짧은 기간 스쳐가는 관계도 있을 수 있고, 오랜 시간을 함께 이어가는 관계도 있다.


사람의 기억은 유한하다. 시간이 지나면 오래전 기억들은 잊히는 게 당연하다. 새로운 기억들이 쌓이면서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도 정확하게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 일들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누군가를 기억하려고 애쓰려고 할 때,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이젠 이상하게 생각되않는다. 그렇게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사람은 살면서 더 많이 만날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그 사람들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를 신경 쓸 이유가 있을까 싶다. 어차피 시간 지나면 내게도, 그 사람에게도 우린 잊힐 사람일 뿐이다. 많은 관계들 중에서도 짧게 스쳐가는 관계는 신경 쓰고, 나를 화려하게 포장하며 보여줄 이유는 없다. 우린 서로 조용히 잊힐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내 기억은 소중한 인연들과의 관계를 담기에도 부족하다. 길 것 같은 삶도 힘차게 달리다 보면 어느새 삼십 대가 지나고, 잠깐 한숨 돌리면 오십 대가 코앞이다. 한참 시간이 지났을 때 삶을 돌아보면 지나온 시간 동안 만난 사람들은 수백, 수천인데 지금까지 이어오는 인연은 많아야 십 분의 일, 백분의 일이 고작이다. 이렇게 따져봐도 그 십 분의 일 인연들과의 관계를 이어가기에도 시간은 그리 여유롭지 않다. 관계에서 선택은 조건이고, 집중은 필수다. 우리가 선택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가는데도 시간이 많지 않음을 인지하고, 스쳐가는 인연에 너무 의미를 두지 않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얼마 전 회사에 워크숍이 있었다. 귀가하는 중간에 함께 일하는 같은 부서 동료가 타 부서 임원에게 하는 얘기가 무심코 들렸다.

 '아니, 부장님은 이사님하고 어쩜 그렇게 사이가 좋으세요? 회사 사람들이 다들 부러워해요'

나와 동료는 과거 한 부서에서 팀장과 팀원으로 일했던 경험도 있었고, 지금 직장도 내가 함께 일하자고 제안해서 입사를 결심했기에 현 회사에서 만난 사이와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회사 내 다른 동료들의 부러움을 많이 사는 편이었다.

 '이사님 예전엔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정말 말 한마디 걸기도 힘든 사람이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요'

동료는 과거의 인연으로 이어진 관계다. 선택과 집중으로 지금까지 이어가는 관계라서 오늘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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