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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Feb 27. 2024

부하직원과 십년지기 친구가 된 사연

우린 이정재 씨와 정우성 씨 같이 서로 존댓말 하는 친구입니다

'이사님, 다음 달에 드디어 공연하게 됐어요. 한 1~2분 솔로 공연이지만 열심히 준비하고 있어요'


두 달 만에 찾아온 옛 회사 동료가 자신의 근황을 얘기하며 공연 소식을 했다. 발레를 배운다는 얘기는 몇 년 전부터 들었다. 하지만 최근 좋지 않은 발목 탓에 일부러 얘기를 꺼리는지 정말 그만둔 건 아닌지 알 수 없어서 물어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발목도 치료가 돼 가고 있다는 말과 함께 반가운 공연소식을 알려왔다.


'공연 어디서 하는데요? 안 그래도 집사람이 무척 초대받고 싶어 했는데 공연시간, 장소 좀 알려주세요. 꽃 준비해서 갈게요'


그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기에 말 나온 김에 바로 다그치지 않으면 다음은 없을 듯싶었다. 안 그래도 함께 일하는 내내 그가 업무 외로 하는 활동이 너무 궁금했었던 적이 있었다. 그의 열정과 용기가 부러워서 그가 취미로 하는 활동을 늘 보고 싶었다. 예전에 그의 글 쓰기가 부러워 그의 글을 항상 남보다 먼저 읽었고, 그의 성악 수업이 궁금해 공연 소식을 꼬치꼬치 물어보곤 했었다. 가끔씩 혼자 떠나는 여행이 부러워 여행 코스를 물어보고 한번 함께 가볼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글을 제외하고는 번번이 그의 정중한 거절과 이유 있는 변명에 마음을 접거나 양보를 반복해야 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오십에 서는 그의 첫 발레 무대가 너무도 궁금했고, 누구보다 큰 응원을 보내고 싶어서 더 그를 졸랐다. 마치 지금의 나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하, 공연이라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무대에 서고 전 아주 잠깐 나오는 무대라 추천하기가 좀 그런데요. 게다가 발레 공연이 처음이면 좀 지루할 수도 있고요'


말은 적당하게 거절과 배려가 섞여 들리는 듯했지만 표정만은 '오신다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로 보였다. 자신감 넘치고 밝아 보이는 그의 표정이 그날따라 더 좋아 보였다. 그의 그런 모습이 오랜만이라 공연이 오히려 더 기대가 됐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결국 그는 초대권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하고 우린 자리를 벗어났다.


생각해 보면 그와 나는 오랜 인연이다. 직장에서 만났지만 직장밖에서 더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다. 회사에서 친구를 만들 수 있을까 싶다가도 그를 생각하면 친구보다 더 친구 같은 동료라는 생각에 어떤 상황이나 예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말 그대로 난 그를 친구로 만든 것이 아니고, 상황이 우릴 친구로 만나게 한 것 같다.


어려운 시기에 함께 직장을 다니며 서로에게 힘이 되었던 아마도 그 시절이 지금 관계까지 발전된 듯하다. 얘기를 하다 보면 너무 잘 맞았고, 서로 이견이 있을 때도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는 배려는 기본이었다. 취미도 비슷해서 영화, 애니, 공연 이야기로 몇 시간을 마주할 만큼 말이 통하는 친구였다.


7년이 넘는 시간을 한 직장을 다니며 팀장과 팀원으로 함께 했지만 우리에겐 그 이상의 동료애가 있었다. 말 그대로 난 그의 결재권자일 뿐 직장 상사와 부하 같은 딱딱함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우린 단순히 동료로 정의할 수 없는 친구였고, 전쟁터 같은 직장에서 적에 함께 맞서는 전우였다. 그는 늘 내 합리적인 배려, 책임감 강한 마음과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난 그의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대한 열정, 자유로움과 깊은 생각들을 부러워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다. 특히 가까운 곳에 그런 행동과 의지를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당연한 순리인 듯싶다. 그가 바로 내게는 신기한 친구이자, 그런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는 10년을 넘게 일한 직장에 사직서를 던지고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른 적도 있고, 뮤지컬이 좋아서 덜컥 보컬 수강과 수년간 성악 수업까지 들었다. 일기를 쓰면서 시작한 글쓰기는 나와 함께 일할 때엔 좀 더 사고 깊고,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이유로 인문학 전공의 대학 진학을 했던 적도 있다.


가장 최근엔 우연히 본 발레공연에 푹 빠져 몇 년간 발레단에서 발레를 배우고 있다. 게다가 발레의 아름다운 동작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어서 그림까지 배웠으니 그의 열정은 단순한 취미 이상으로 느껴진다. 난 매사에 진심을 담은 그의 열정이 부러움을 넘어 경외감까지 든다. 늦은 나이임에도 한시도 자신을 게을리하지 않는 마음이 늘 부러운 건 진심을 담은 그의 열정 때문이다.


햇수로 따지면 우린 18년 된 인연이다. 두 번째 직장에서 만나 인연을 이어가고 있으니 아주 오래된 친구 그 이상이다. 그와 난 나이차도 얼마 없는 한 살 차이다. 게다가 전 직장에선 난 팀장, 그는 팀원으로 함께 다시 회사를 다녔다. 그래서였는지 여러 차례 그가 내게 편하게 말을 놓으라고 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 순간마다 난 그의 요청에 얼버무리거나, 거절했다. 단순히 거리를 두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나이가 어리고, 상하관계의 직장 직급과 직책이 있다고 해도 난 늘 그에게 배웠고, 자주 위로받았다.


또 많이 의지했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 내겐 단순히 직장 동료 이상의 관계가 필요했다. 마음을 터놓고 공사구분 없이 함께 마음을 나눌 진정한 친구가 딱딱한 직장에도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었다. 그런 나의 마음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듯싶다. 편했지만 서로 간에 예의를 지켰고,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만은 한결같았다.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그와는 긴 인연으로 함께하는 중이다.  


그런 그가 오늘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무대 위에서 날개를 제대로 펴고 날아올랐다. 맡은 배역에 충실하고자 한 달을 기른 수염이 덥수룩하게 얼굴을 덮었지만 무대 위의 그는 어느 때보다 빛나 보였다. 몇 년 전에 봤던 '나빌레라'라는 드라마가 기억이 났다. 칠십이 넘은 나이에 발레를 시작한 주인공의 모습과 지금 내 오랜 동료이자 친구인 그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보는 내내 가슴이 벅찼고, 그가 자랑스러웠다. 또 한 번 피어오른 그의 열정이 아름답고, 순수한 욕망으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솔로 무대가 끝났다. 박수가 터져 나왔고, 난 그 누구보다 그에게 박수를 보냈고, 함성을 질렀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나의 오십을 응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아래는 2019년 어쩔 수 없는 회사 사정으로 그가 회사를 떠나며 제게 보냈던 메일과 당시 제 마음을 썼던 과거 브런치 글의 일부를 발췌해 보았습니다.


"마침표 인사드립니다."


매일 아침 7시 40분에서 50분 사이 스릴이 넘칩니다. 2~3분만 늦어도 9시 넘어 출근이거든요. 몇 년을

다녔는데도 그 몇 분을 줄이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한 달  전부터 탄력 근무를 했습니다.


 30분을 줄였더니 이번에는 마을버스 타는 곳까지 조깅하듯 뛰어다녀야 했죠! 놓치면 10분 이상 지각입니다. 당분간 서스펜스 넘치던 아침은 잠시 잊고, 편안하게 지낼 거 같아요. 어쩌면 바라 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뻔히 눈에 보여도, 차마 제 발로 나갈 용기가 없었거든요. 상황이 그럴 뿐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그러니 혹여나 느낄 씁쓸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으시길 바랄게요.


회사에서의 마침표 인사드려요.

그동안 (까칠하고 다혈질인) 저와 일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직은 어떤 길을 갈지 잘 모르겠지만, 또 다른 자리에서 웃으며 뵈었으면 좋겠어요.


항상 건강 잘 챙기시고, 유쾌한 일들이 많이 생기길 혹은 만들길 바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난 3월 22일에 회사에서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만 해도 우리 자주 볼 텐데 하고 많이 슬프지는 않았는데.  오늘 글을 쓰려고 노트북을 켰다가 그의 퇴직 인사 메일 들어온 걸 확인했어요.


  이 메일 보고 어찌나 맘이 공허해지던지, 좀처럼 진정이 안되더군요. 현재 재직 중인 직장에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극단(?)의 조치가 있었어요.  등 떠밀려 나갈 수밖에 없게 된 거요. 흔한 일들이 아니어서 좀처럼 남에 얘기로 생각했던 일이 막상 우리들에게 일어난 일이 되었고, 내 동료, 친구가 대상자가 되면서 한 편으로는 자괴감마저 들었어요. 같은 부서에 있었으면 내가 대상자였을 수도 있어서 오히려 더 미안함이 컸는지도 모르겠네요.


 8년 차 직장에서 드는 생각이 이런 아쉬움만 남기게 될 줄은...... 너무 안타깝기만 하네요.


지난 7년간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내 동료이자, 친구인 A 부장님!

항상 건강하고, 앞으로는 행복한 일만 생기길 빌게요.

수고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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