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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Mar 26. 2024

아는 맛이... 더 두렵다

하나를 줬으면 하나를 받고 싶어 하는 게 일반적인 관계다

 '각 팀 팀장님들 부사장님이 아침에 급하게 회의 소집이십니다. 모두 대회의실로 오세요'


출근 후 한 시간도 되지 않아 갑작스러운 회의 소집이다. 그것도 회사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부사장의 호출이다. 특정부서도 아니고, 각 부서 임원도 모두 제외된 전체 팀의 팀장들이 대상이다. 조금은 의아하고, 수상한 소집이었다. 머릿속에 회의 소집 이유가 뜬구름같이 두둥실 떠올랐지만 잡히지도 않고, 명확하지도 않아서 생각을 접고 회의실로 급히 들어갔다.


회의실로 들어서니 대회의실 근처 부서인 연구소의 각 팀장들이 먼저와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회의실로 들어서니 회의실 입구 반대쪽 의자에 앉아있던 부사장이 고개를 들어 '까딱' 인사하고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하지만 늘 나이 든 옆집 아저씨같이 인자하고, 온화한 미소를 보여주던 평소 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자리에 앉고 나서 나머지 팀의 팀장들도 차례대로 회의실로 들어와 한 자리씩 자리를 채웠다. 모두들 밝은 조명 아래 들어섰지만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 덕에 짧은 인사 외에는 더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회의실 안은 마치 적막하다 못해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 때문에 밝은 조명이 모두 꺼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 순간 자리에 앉아있던 부사장이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중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 무거운 시선으로 바닥을 보던 그는 고개를 들고 한 명, 한 명 팀장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마치 모두 참석했는지 확인하는 절차를 걸치는 것처럼. 그러더니 이내 잠겼던 목을 풀듯이 가볍게 기침을 하고 입을 뗐다.


 '이렇게 아침부터 갑작스럽게 회의소집해서 미안합니다. 업무에 바쁠 텐데 그래도 다들 참석해 줬네요. 제가 오늘 이렇게 갑작스럽게 회의를 소집한 이유는 이번달 급여를...'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너무도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머리를 큰 망치로 '쾅'하고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회의 참석 전에 회의실에서 할 이야기를 생각해 보고 왔지만 그 이유들 중에 지금 말한 안건은 고려해 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많이 어리둥절했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부사장님, 그럼 이번달 급여만 지급에 문제가 있는 건가요? 아니면 좋아질 때까지 계속 이런 건가요?'


다른 팀의 팀장이 질문을 하는 통에 멍해있던 정신이 다시 돌아온듯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많은 팀장들 중에 나와 같이 혼란스러운 표정의 팀장도 눈에 들어왔고, 아직까지 정신이 없어 보이는 팀장도 있고, 조금은 격한 표정과 오르는 감정으로 흥분해 보이는 팀장들도 게 중에 있었다.


 '아니 이번달에 전혀 급여 지급이 안된다는 건가요?'

 '몇 달 동안 급여 지급이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요?'

 '전체가 대상인가요? 아니면 지금 부른 팀장들 이상이 급여 미지급 대상인가요?'

 '아니 오늘이 급여일인데 이렇게 발표하시는 게 말이 됩니까 부사장님!'


분위기는 순식간에 험악해져가고 있었다. 회의실에 있는 팀장들은 관리자라고 하더라도 대부분 직장 경험이 십 년 내외인 젊은 사람들이었으니 회사에 대한 충성, 이해, 의리 등이 전무하거나 아주 미약했다. 정확히는 적어도 '기본'은 받아야 회사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고, 열정을 보이고, 협업하고, 창의성을 발휘하는 지극히 보통의 직장인이었다.


하지만 그 기본 중에 가장 기본인 급여를 줄 수 없다는 말은 갖고 있던 성실, 열정, 창의성, 의리, 회사에 대한 이해 등 모든 것을 지웠다. 당연한 결과였고, 나 또한 비슷한 생각과 회사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부사장의 말이 회의실에 있던 팀장들을 더 당황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번 급여 미지급 사태는 3개월을 예상하고 있고, 대상은 전 직원입니다. 하여 여기 계신 팀장들은 많은 직원들이 있을 혼란을 진정시키고, 곧 정상화될 테니 업무 이탈이 없도록 잘 좀 독려해 주세요'


부사장은 무겁게 내려간 입술을 조금이라도 웃어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에 잠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가 수습하기 어려운 말에 되려 기운이 빠졌다. 내 한 몸도 추스르기 어려운데 직원들을 진정시키고, 이탈이 없게 독려하라니 가혹해도 너무 가혹한 일이다 싶었다. 그 말 이후에도 많은 질문들과 불만들이 쏟아졌지만 회사 최고 경영자 중 한 분인 부사장의 입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은 '미안합니다'가 유일했다.


회의실에서 그 일이 있고 난 후 직원들과 개별 미팅도 하고, 이해도 구해보고, 설득도 여러 차례 해봤다. 처음 급여 사태가 있은 후 '설마'하는 마음에 다음 달이면 갑자기 '뿅'하고 정상화되겠지 하는 믿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 기대와는 상관없이 급여 미지급 사태는 정확히 3개월을 채웠고, 다행히도 그 시간 동안 이탈한 팀원은 없었다. 최소한 생활비의 명목이었는지 각자 받을 급여의 40퍼센트는 매달 지급되었다. 이런 태도가 최선을 다한다는 회사 입장을 보여줬는지 아니면 3개월의 희망고문을 철저하게 믿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뒤로도 그런 일은 또 발생했다. 그 회사에 재직 중인 수년동안 따지고 보면 7, 8개월 이상은 정상적인 급여를 받지 못했던 것 같다. 같은 일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당하다 보면 내성이 생겨 버티거나, 이 길 힘도 생긴 다지만 좋지 않은 일, 두려운 일은 생길 때마다 오히려 더 두렵고, 그냥 힘들 뿐이었다. 십 년이 더 지난 일이지만 다시 경험하기 싫은 두려운 경험이다.


직장에서 만난 사이는 그냥 직장 선후배, 동료가 일반적인 관계다. 그 이상의 관계로 발전시키기에는 서로 간의 이해와 상충의 편차가 클 수 있다. 하나를 줬으면 하나를 받고 싶어 하는 게 일반적인 생각이다. 오히려 사회에서 만난 관계에서는 하나만 주고, 둘을 받고 싶어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따라서 늘 기본이 중요하고, 기본을 채워주지 못한 관계의 사람에게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행여나 기본을 채워주지 못했는데 열정, 의리, 이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관계는 더욱 신경 쓰고, 챙겨야 하는 관계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 사람의 기본적인 소양, 회사나 내게 바라는 마음만큼은 진심임을 헤아리고, 감사해야 한다.


노사의 관계가 아무리 돈독해도 그건 기본이 지켜질 때 일이다.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돈을 주는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이다. 기본적으로 계약으로 이루어진 사이이다. 급여를 받는 직장인은 자신이 하는 만큼의 대우를 받고, 성과를 칭찬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직장에선 남몰래하는 선의는 없다. 내가 한 일에 대한 적절한 보상과 조금의 칭찬만이 직장 내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일한 성과에 대해 급여가 오르고, 진급을 하고, 인센티브를 받아야 애사심도 커지고, 다니는 회사에서 자신의 미래를 걸기 마련이다.


고용주도 마찬가지다. 피고용인에게 갖는 감정의 형태도 한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 피고용인이 보이는 성실, 열정, 애사심, 성과 등이 있어야 나머지 개인적인 감정도 동반되는 것이다. 무작정 내 회사에 몸담고 있다고 가족처럼 이뻐하진 않는다. 열심히 하는 직원을 좋아하게 되어있고, 그중에 성과를 내는 직원을 더 좋아한다. 당연히 성과를 내고, 열정을 보이고, 회사까지 생각하는 직원이면 고용주 입장에서는 가족만큼 아낄 마음이 있을 것이다.


서로가 생각하는 필요한 부분을 채우고 나서야 직장에서 만난 관계는 돈독해지고, 서로 배려나 이해심도 늘어날 것이다. 이런 관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사회에서 만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해야 할 기본적인 조건임을 이해해야 한다. 서운해하거나, 아쉬워하기 전에 내가 현재 있는 위치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이유가 분명히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그 인지와 객관적인 이해 이후에 관계에 대한 현재의 정립 혹은 재정립을 하면 한결 마음이 놓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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