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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Apr 09. 2024

두 번째 자른 후 헛헛한 마음이 드는 이유

아버지도, 나도, 아들도 해야만 했던 건 바로...

'우움~마마마~'

'날아라~~ 우리 지수 잘하네~'

울그락, 불그락 딸아이의 얼굴에 금세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다. 뒤집어 엎드려 고개와 팔을 드는 모습이 마치 나는 슈퍼맨을 연상시킨다. 태어난 지 몇 개월 안 된 딸아이가 얼마 전부터 뒤집기 시작했다. 아내와 난 이런 둘째 아이의 모습에 장난기가 발동했다. 아직까진 뒤집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다시 돌아눕는 건 딸에게는 언감생심이다. 팔을 세워 몸을 세웠다, 풀었다를 반복하던 딸아이가 입 밖으로 '하얀' 무언가를 흘린다.

'아차, 밥 먹은 지 얼마 안 됐는데 지수 미안'



아침부터 아내와 난 아들의 옛 사진 한 장을 찾고 있다.

'어디 있더라? 여기 폴더에도 없고'

외장형 하드 여기저기를 뒤져보고 있지만 찾던 사진은 못 찾고 다른 영상들만 감상하고 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지? 나도 그 사진 본 것 같은데. 사진 아들 앨범에 있던 거 아닌가?'

내 말을 듣고 아들 방에 들어간 아내의 목소리가 들린 건 잠시 뒤였다.

'하하하~, 찾았다, 찾았어. 아들 너 이 사진 봐. 이게 너 백일 때 머리 깎던 사진이야. 어쩜 이래?'

아내의 목소리에 그 사진 속 추억이 궁금했던 나도 얼른 아들방으로 쫓아 들어갔다. 그렇게 만난 추억 속 사진 한 장은 한참 동안 우릴 웃게 했다.


아내와 내가 찾던 사진은 바로 이십이 년 아들 인생 삭발 사진이었다. 그것도 아들 갓 백일이 지났을 때였으니 신기해도 너무 신기한 사진이었다. 그 시절 살던 곳 근처 미용실에서 머리 자르던 모습을 사진 한 장에 담았다. 울지도 않고, 그렇다고 웃지도 않는다. 백일 된 아들 모습이 사뭇 진지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모습, 표정이 너무 사랑스러워 추억에 담았다.

[좌측 :백일 때 삭발한 아들  , 우측 :훈련소 입소하는 아들]

이틀 뒤면 아들은 입대한다. 작년부터 입대 날짜를 고민했는데 생각하는 최적의 시간에 입대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군에 가기 전 하루, 하루 주변 사람들 만나느라 바쁘기만 했는데 드디어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 아들이 오늘 백일 때 이후 처음으로 짧은 머리에 도전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쉽고, 걱정됐던 마음은 있었지만 막상 입대라는 실감은 잘 나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 오늘 머리를 자른다고 하니 이젠 정말 아들 입대가 실감이 난다.


사람과 사람사이를 말할 때 관계라는 말을 빼고는 정의할 수 없다. 친구, 선배, 후배, 부부. 부자, 모녀, 형제, 자매, 교우, 사제관계 등 세상에는 많은 관계가 존재하고, 그 관계 속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우린 존재한다. 이런 관계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는 관련 당사자가 정의하지 않아도 의례 붙는 이름표와 같다.


하지만 이런 관계에 대한 표현은 관련 당사자들의 손에 달려있다. 사랑하는 부부, 친구 같은 부자, 착한 후배, 의리 있는 친구, 자매 같은 모녀 등 앞에 붙는 수식어는 그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의지만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없고,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관계 앞의 수식어를 결정할 수 없다. 관계라는 말 자체가 내포하듯 사람과 사람 간의 문제다. 좋은 관계가 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코드가 맞고, 서로 간의 공감이 가능하고, 울림과 진동도 비슷한 진폭이어야 한다. 그래야 찾게 되고, 만남이 이어지고, 헤어짐이 아쉬운 것이다.


사람들 간에 두 가지 이상의 복합적인 감정이 드는 경우는 드물다. '좋음'과 '싫음'의 감정, 기쁨과 슬픔의 감정, 감사와 분노, 오만과 겸손, 매력과 혐오 등 서로 반대되는 감정은 특히나 더욱 그렇다. 흑백 논리로 나눌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이 여러 가지 반대되는 감정이 공존하기는 어렵다.

가끔 드라마 속 남녀사이를 애증의 관계로 그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줄거리상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긴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진심 이해가 가질 않는다. 사랑을 하던가, 미워하던가 둘 중 하나만 가능하다고 믿지만 정작 드라마가 진행되려면 그런 마음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런 관계들 속에 말로는 이해가지 않지만 모든 복합관계가 존재하는 관계도 있다. 그건 바로 부모, 자식 관계이지 않을까. 아니 정확히는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마음이지 싶다. 애지중지 키워놓으면 자식은 머리가 굵어져 마치 내가 알아서 큰 것인 양 얘기할 때가 많다. 이럴 땐 아무리 부모라도 속상하고, 가끔 미운 마음들 때도 있다. 하지만 예전에 자식을 키우며 좋았던 기억, 추억 속 사진 한 장만으로 그런 마음도 고스란히 녹는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어도 부모는 똑같은 치유를 하고,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이해시킨다. 이런 부모의 마음을 자식들은 모른다. 자식들은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부모의 빈자리를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사진 한 장만으로 행복했던 추억이 소환되고, 그날의 시간을 함께 웃을 있었던 우리처럼 세상 모든 부모는 자식을 대하는 마음이 그런 듯 싶다. 오래 지난 추억들만으로도 철없는 자식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존재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부모라는 무겁고, 고귀한 존재뿐이다. 우린 누군가의 부모이기도 하지만 그런 부모의 자식이기도 하다. 우리 부모의 마음을 고스란히 이해하라고 우린 누구의 자녀에서 내 자녀의 부모로 성장해 나가는 게 아닐까.



금요일 오후 늦게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월요일 아들의 입대라 연차 휴가를 냈다고 동료들에게 전했다. 직장인의 월요일은 보고할 일도 많고, 보고받을 일도 많아서 당연한 절차고 배려다. 켜져 있던 노트북을 끄고 일어나던 내게 직장 동료가 말했다.


'이사님! 아드님 입대날 우시는 건 아니죠? 18개월 금방 갑니다. 아드님 건강히 잘 다녀올 거니까 너무 염려 마세요'


오십이 갓 넘은 요즘 내 감수성은 샘솟다 못해 폭발하고 있어서 전혀 불가능한 얘긴 아니다 싶다. 그렇게 말한 동료에게 멋쩍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스물두 살, 아들이 잠시 우리 곁을 떠난다는 생각에 이미 울컥했던 마음 탓에 부정도 못한 체.



어제 아들이 논산 훈련소에 입소했어요.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보내고 나니 마음 한 구석이 너무 헛헛하네요. 그래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잘 해내리라 믿어요. 안 그런 척해도 한동안은 어제 본 아들 뒷모습이 자꾸 생각날 거 같네요.


"아들 건강하게 잘 다녀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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