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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Apr 02. 2024

이직한 곳에서 뭐든 알아서 하라는 상사를 만났다

첫인상과 너무 다른 스마트하게 게을렀던 상사 이야기

회사 이직을 생각한 건 오래전부터였다. 회사 상황이 널뛰기하듯이 았다, 나빴다를 반복해서 마음은 늘 이직을 고민했지만 막상 고민만 했지 결심을 하지 못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회사에서 몸 담고 있던 사업부서 매각을 결정하고 나서 이직 결심은 확고해졌고, 그 결심은 현실이 됐다.


그 무렵 온라인 구직사이트에 이력서를 업데이트했다. 거짓말같이 업데이트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헤드헌터로부터 면접 제의가 왔다. 고민이 필요 없을 만큼 좋은 자리였고, 고민할 시간을 가질 만큼 재직 중인 회사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면접을 수락하고, 인터뷰에, 채용결정까지 일사천리로 이직을 위한 절차들이 진행되었다. 회사에서는 필요한 위치의 인재를 찾았다 생각해서였고, 난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는 회사 환경이 내게 적합하다 느꼈다. 그렇게 난 큰 고민 없이 이직을 결정했다.


이직을 결정한 후 재직 중인 회사에 보고를 했다. 이직할 회사에는 입사 가능 예정일을 한 달 뒤로 잡았다. 당연히 일반적인 절차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회사에도, 내게도 한 달의 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시간보다 회사는 나를 더 붙들었고, 5년이나 몸담았던 회사이기에 내 거절의 칼도 무딜 수밖에 없었다.  


'약속한 날짜에 입사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정리하고 오시는 회사에 최대한 누가 안되게 오려는 팀장님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당연히 실력 있는 분 모시니 기다려 드려야죠'


이직을 자주 해보지는 않았지만 버젓한 상장사에다 팀장 직책의 이직이라 회사뿐 아니라 나 스스로도 기대가 컸다. 그를 만난 건 면접 이후 그때가 처음이었다. 첫인상은 회사 임원으로서 권위도 없어 보였고, 소리 내 웃는 서글서글함에 스마트한 인상까지 이직 후 관리자로서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상사를 만나는 것도 직장에서는 드문 복이라던데 내게는 그런 복이 자주오나 싶었다.


그렇게 그에게 미뤘던 한 달이 지나고 나서 난 이직한 회사로 입사를 하게 됐다. 입사 후 그와의 첫 만남에서 그는 과거 처음 만났던 느낌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다.

'새로 셋업 되는 팀인데 혹시 함께 일하실 분 있으면 모셔오세요. 그게 어려우면 현재 같은 본부 내에 팀장들과 상의해서 팀별 인원 착출해서 전배 하는 방법도 있고요'

'우선 오늘 입사 첫날이니 제가 해야 할 업무 확인부터 하고요. 본부 내 인원들하고 상견례 후에 다시 결정했으면 합니다'


처음 인사부터 빡빡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처음 만남으로 사람의 성향이나, 회사 분위기를 백 퍼센트 이해하기에는 내가 가진 내공이나, 이직한 회사의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섣불리 판단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이후에는 적절히 사람들과 섞이며 회사에 녹아들려고 애썼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한 달이 지나는 동안 내 주변에도 변화가 생겼다. 나와 함께 일할 팀원을 결정했고, 해외 지원 업무도 새롭게 세팅됐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관리자 성향을 알게 된 결정적 사건이 터졌다.

 

'본부 내 각 팀 팀장들은 김철수 팀장하고 상의해서 전배 할 인력들 조율하세요. 굳이 인사상으로 조치 안 할 테니 팀장들끼리 알아서 하세요'


각 팀 내 소속인원에 대한 부서 전배 및 업무 변경이 이렇게 쉬운 일인가 싶었다. 자율적인 팀분위기라고 하기에는 너무 관여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당연히 팀장들은 자신의 팀원들 사수가 우선이니 '알아서'란 단어에 정확히 꽂혀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인력을 내줄 수 없어요', '넘어가는 인력의 업무까지 가져가는 조건이라야...', '3개월 파견으로 하고 그 사이 충원하세요' 등 답변은 각양각색이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팀원을 내어줄 수 없다였다. 의견을 취합하거나, 조율해서 최종 결정을 해야 하는 관리자가 팀장들끼리 알아서 조율하라고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결국 그 사건으로 다른 팀으로부터 인력 전배는 아예 없던 일이 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난 가급적 관리자에게 아주 중요한 사안이 아닌 것들은 보고 없이 알아서(?) 처리했다. 특별히 문제는 없었고, 그와의 마찰은 더더욱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와의 관계가 편하게 유지됐고, 그도 그런 조직 운영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가끔 그가 직접 내게 지시한 업무 외에는 그는 별도 업무 요청이나 관리가 없었다. 종종 그가 궁금한 게 생기면 내게 물어보는 정도로 업무 보고는 정리됐다.


그렇게 2년을 넘게 조직을 운영했다. 이후 전면적인 조직 개편 때도 그의 소속 내에 있던 다른 팀들은 모두 관리자가 바뀌었지만 우리 팀만은 예외였다. 그렇게 그와 4년을 같은 부서에 일했고, 4년 동안 여전히 그는 내 관리자로 존재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우리 팀은 다른 본부로 팀이 옮겨졌고, 그는 더 이상 내 관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내왔던 시간도 있고 해서 가끔은 그를 찾았던 적이 있다. 업무상 어려움이 있을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여러 번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는 역시나 '알아서' 하세요란 마인드를 유지했다. 한결같이.


어느 날 그가 나와 다른 팀 소속 부장을 불러 자신의 고충을 털어놨다. 결국 자신을 도와 TF팀을 만들어 업무적인 성과를 내보자는 의견이었다. 나도, 다른 팀 소속 부장도 제안한 업무에 관심이 컸고, 그의 회사 내 입지를 생각하면 가능한 일이라 생각해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비췄다. 다른 건 몰라도 그는 자신이 관심 있어하는 분야에서는 믿기지 않을 만큼의 추진력으로 업무를 이끄는 능력자였다. 잠깐의 시간뒤면 난 다시 그의 밑에서 일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과 그는 내편이 아니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그와 회사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 중간에도 그를 찾아가 진행상황을 물어봤지만 기다리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났고, 그 사이 함께 동참하겠다는 부장도 퇴사를 했다. 그러고 얼마 뒤 그와 둘이 마주할 일이 생겼다. 오랜만에 마주 앉은 터라 할 말이 많지 않았다. 그도 나와 함께 마주한 시간이 조금은 어색한 것 같기도 혹은 귀찮아 보이기도 했다.


'김 부장님, 저 다음 달에 회사 나가요'

'네? 이직하시는 건가요'

'아뇨. 회사 창업해서 나가요. 그냥 지금 하는 일도 미련 없고...'


잠깐 머릿속에서 머뭇거리긴 했지만 난 과거 나에게 제안했던 얘기를 안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답변은 자신의 성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로 날 실망시켰다. 잠깐 관심이 생겨서 제안했지만 시장조사를 시켜봤더니 그리 성장성도 없을 것으로 보고받았다고 했다. 또 회사가 실행하기에는 수익성도 불분명하고, 어려움이 있다는 얘길 듣고 스스로 포기했다고 했다. 게다가 한 달 동안 나의 움직임이나 별도 보고가 없어서 더 마음이 식었다는 말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일을 준비하기 전 바람만 잡아놓고, 우리가 알아서 일을 벌이기를 기다렸다는 눈치였다.


그 말을 끝으로 난 그와 더는 말을 섞을 일이 없었다. 이주가 안 되어서 그는 더 이상 회사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내게 보여준 첫인상의 오류를 다시금 곱씹게 했다. 권위가 없어 보인 것도, 서글서글함도, 스마트함도 모두 자신의 관심사가 아닌 경우 적당히 덮어쓰는 위장술 같은 것이었다. 천상 귀찮은 일, 자신의 에너지 소비를 무척 아까워하는 사람이다. '알아서'라는 말로 각자의 자발적 능력을 독려한다는 스킬아래 그는 결국 책임도 지기 싫어했고, 스마트한 게으름이 뭔지 보여준 관리자였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은 많다. 하지만 철저하게 직책의 무게로 타인을 기만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인성을 바닥까지 보이는 사람도 있는 유일한 곳이 회사이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마다 기본적인 성향이 있다. 특히나 바뀌지 않는 것이 이런 타고난 성향이다. 포장을 잘해서 보이지 않다가도 가끔씩 궁지에 몰리거나, 어깨 힘이 '팍팍' 들어가 있는 시기에는 타고난 성향을 감출 수 없다.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자신의 타고난 성향은 바꾸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바뀌지 않는 성향에 매달리기보다는 그 관계를 손절하는 게 좀 더 나은 방법일 수 있다. 만일 손절하기 어려운 관계라면 적절히 자신만의 대응 전략을 최대한 빨리 짜놓는 게 현명하다. 직장을 '롱런'하는 게 좋다, 나쁘다를 말하기는 어렵지만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이라도 여러 관계의 정의와 정리는 항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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