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추억바라기 Aug 20. 2024

브런치 작가인걸 들키고 회사일이 늘었다

본업, 부업 가리지 않고 썼더니 글 때문에 성과도, 성취감도 두 배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안 그래도 맡은 일에 대해 자신감이 없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새로운 업무가 또 하나 주어졌다. 작은 회사라 지정된 업무 외에도 많은 일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하지만 내가 입사 전에는 도대체 회사가 돌아갔을까 싶을 정도로 새롭게 주어지는 일이 많았다. 이렇게 새로이 주어진 일은 바로 제안서 작성 업무였다. 일반적으로 업무 분장이 되어있는 회사인 경우에는 회사 내 제안팀이 별도로 존재해서 관련부서가 아닌 이상 제안서를 쓸 일이 없다.


하지만 내가 입사한 회사는 서른 명 남짓한 작은 기업이다. 그것도 최근 일 년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입사를 해서 말이 서른 명이지 일 년 전만 해도 십여 명이 직원 전부였던 회사다. 그러다 보니 기존에 작성 부서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준비된 제안서가 존재하지도 않았다.


'김 이사, 언제 출근 가능해? 오면 바로 제안서 작업부터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입사 결정을 하고 난 후 대표이사와의 통화에서 예견된 일이었지 싶다. 단순히 농담처럼 건넨 말이라고 생각했고, 정작 입사 후에 그 일을 맡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20년 가까이 문서라고는 기술문서, 매뉴얼 작성이 전부였던 터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 불확실성이 확신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입사하자마자 적응도 되기 전 업무들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처음 입사를 논의하는 과정에선 맡아야 할 업무에 대해서 기술총괄, 영업지원이라고 안내를 받았다. 하지만 입사하고 보니 안내받은 업무 외에도 제안서 작성 포함 해야 할 일이 차고 넘쳤다. 모른 체할 수도 있었지만 성격상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순리가 있듯이 맨바닥에 헤딩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업무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은 나에게 넘어오는 일을 만족스럽게 처리하기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었다.

결국 제풀에 지쳐 한숨만 늘어갔고, 마음속 응어리만 깊어갔다. 그런 하루하루를 보내 던 어느 날 나보다 먼저 입사해서 재직 중이던 여러 임원들과 함께 티 타임을 가졌다. 업무 얘기가 오가던 중 영업부서에서 제안서 제출 사업이 생겼다고 업무 지원 요청을 해왔다. 당연히 내가 맡은 업무이기에 그는 정당한 요청을 했지만 그간 스트레스를 받았던 업무라 더는 마음에서 그 '화'를 참지 못했다.


'제안서 작성이 하루, 이틀에 끝나는 작업이 아닌 건 아시죠? 얼마 전까지 수정해서 제출했던 제안서가 떨어지는 건 다 그전에 만들어졌던 제안서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제게도 시간을 주셔야죠. 이게 몰아붙인다고 될 일이 아니에요'


그 말을 끝으로 난 회의실을 나왔다. 기대하고 지켜보던 관련 부서 임원들 보기도 낯 뜨거웠고, 업무 요청한 담당영업에게도 화가 났다. 하지만 정작 가장 화가 났던 이유는 입사하고 두 달이 지나는 동안 준비가 안된 제안서를 아직도 미련 붙들고 있는 나였다. 새롭게 완전히 뜯어고쳐야 된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정작 밀려들어오는 다른 업무 때문에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에 부담이 컸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으로 어차피 안될 제안서임을 알면서도 여기저기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바람이라도 쐴 겸 건물밖으로 나왔다. 아직은 이른 봄바람 탓에 머릿속이 조금은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잠시 찬바람을 맞았더니 조금 전 상황이 정리가 됐다. 결국 내게 필요한 건 새로운 제안서 작성을 위한 시간과 약간의 투자였다. 대표에게 내 결심을 얘기하고, 당분간 새로운 제안서 작성을 하겠다고 얘기할 생각이었다. 결심이 서고, 다시 사무실로 복귀했더니 조금 전 함께 회의했던 임원 한 분이 나를 불렀다.


'김 이사님, 좀 괜찮으세요? 저랑 잠깐 차 한잔 할까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했다. '홀짝'거리며 커피를 마시다 말고 그는 내게 조금 전 업무 관련 의견을 물었다.

'김 이사님, 기존 제안서는 폐기하고, 제안서를 새롭게 다시 쓰실 생각이신 거죠? 혹시 다른 업무를 모두 배제해 드린다면 새롭게 제안서 쓰는데 얼마나 시간이 필요한가요? 두 달? 세 달?'

갑작스러운 그의 제안에 조금은 어리둥절했지만 사무실 밖에서 마음먹고 결정했던 일이라 그의 제안이 반가웠다. 아니 오히려 내 마음을 알고 있었던 그가 신기하고, 고마웠다.

'네. 다른 업무 배제해 주신다면 두 달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그 사이 디자인업체 선정해서 작성한 제안서 디자인도 해야 하니 업체 선정하는 건 상무님이 좀 도와주세요'

'그럼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혹시 그 두 달 사이에 나오는 제안사업은 영업들 보고 알아서 제출하라고 할 테니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먹구름으로 찌푸렸던 하늘이 맑게 걷히는 것 같았다. 눈앞을 가리며 막막하게 누르던 무거운 짐도 그의 배려로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난 두 달 동안 새로운 제안서에 몰두할 수 있었고, 전과 전혀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기획부터 사소한 문장, 문맥까지 더욱 심혈을 기울여 작성했다. 정말 한 땀, 한 땀 장인정신으로 두 달 인고의 시간을 견뎠고, 결국 그렇게 탄생한 제안서를 제출해 첫 제안사업을 수주했다. 창립이래 제안사업 첫 수주라고 하니 더욱 의미가 있었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제안사업에 수주하며 두 달간의 투자에 대한 성과가 톡톡히 빛을 발했다. 배려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희생으로 이뤄낸 것이라 더욱 기뻤다.

이직을 하고 나면 그 압박이나 스트레스는 기본적으로 동반되는 조건과 같다. 이런 이직 스트레스 중에 가장 큰 원인 아마도 해당 업무 적응 전 성과를 내지 못하는 조바심일 것이다. 이직을 위한 면접에서 자신의 능력을 잘 포장해 이직성공에 이르렀지만 대부분 이직초기에는 겪어야 할 적응기가 있기 마련이다. 당연한 과정이지만 몸값도 올려서 왔는데 회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자책에 괴로워하는 일이 생긴다. 이직 성공에 대한 기쁨은 온데간데없고, 마음이라도 편했던 과거 직장이 그리워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이직자들이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경력직이라서 당연히 바로 업무 투입이 가능한 사람도 있지만, 똑같은 업무가 아닌 이상 경력자에게도 적응기가 필요하다. 혹여나 같은 업무일지라도 업무 환경, 회사 분위기, 협조 부서, 일하는 사람들이 달라진 이상 그 또한 적응이 필요한 것이 당연하다. 경력자를 뽑았다고 해서 바로 실전 투입해 성과를 낼 것이라는 희망적인 기대를 갖는 회사는 드물다. 다만 신입들보다는 빠른 적응은 당연한 기대고, 몸값에 걸맞은 성과는 시간이 지나면 당연히 가져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 것도 사실이다.


회사도 누군가 빠진 빈자리를 혹은 신사업을 맡길 경력자가 필요해서 뽑은 것이다. 서로의 필요에 의해서 상호 조건이 맞으니 회사는 충원을 했고, 이직자는 입사를 결정한 것이다. 부담은 갖고 적응하되 적응 전까지 회사도 큰 성과를 기대하지는 않을 거라는 틈은 필요하다. 그런 성과는 적응 후에 보여줘도 충분하다.

프로 스포츠에서도 'FA'를 통해서 비싼 몸값을 받고 소속됐던 팀을 떠나 새롭게 보금자리를 트는 선수들이 많다. 이런 프로 선수들조차도 옮겨간 팀에서 비싼 몸값에 걸맞지 않은 미비한 활약에 그치는 선수가 많다. 소위 말하는 '먹튀'가 되곤 한다. 몇 년씩 계약하는 프로에서조차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자신이 활약했던 팀과는 분위기가 다르고, 환경이 바뀐 탓에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을 제 실력을 펼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런 환경변화에도 꾸준히 자신의 루틴대로 연습하고, 부담을 이겨내고, 노력하는 선수들은 조금 더 빨리 기대에 부응하게 된다.


새로운 환경에 빠른 적응이 이직에 관건이다. 빠른 환경 적응에는 마음을 터놓을 좋은 동료만큼 도움 되는 조건이 없다. 결국 일보다 사람이 먼저 듯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마음에 맞으면 업무 시너지는 극대화가 될 것이다. 업무 성과를 기대한다면 주변에 마음 맞는 동료는 기본이니 열심히 동료들과 교류해야 한다. 혼자 잘할 수 있는 일들도 있지만 조직에서는 협업이 기본이다. 업무 성과에 부담이 크다면 바로 옆 동료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보는 게 현명하다. 이직 성공의 가장 큰 키일 수 있으니.



'김 이사, 우리 올해 초에 만들었던 제품 카탈로그 말고 고객사에 좀 폼나게 전달할 회사 소개서 같은 게 있으면 좋겠는데'


얼마 전 대표의 요청으로 30페이지 분량의 새로운 회사 소개서를 책자 형식으로 만들었다. 기획부터 디자인까지 전적으로 내 손에서 일궈낸 성과다. 제안서가 시작이었지만 이후 대외적인 문서, 회사 카탈로그, 회사 소개 책자까지. 난 요즘 글쓰기 재능을 회사에 쏟아내고 있다. 대표의 한 마디 말로 내 본업과 부업의 경계가 무너진 지 오래다. 하지만 성과도 있고, 회사 발전에 기여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니 뿌듯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난 매일 회사에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에이 이런 일을 누가 해. 김 이사가 작가잖아요. 작가니까 회사 관련 대외 문서는 김 작가님이 해야죠. 그럼 마케팅 부서가 뭐 따로 있을 필요가 있나. 김이사면 다 되잖아. 그 정도 능력 있잖아요'  

'하하...(그럴 리가요)'



안녕하세요, 추억바라기예요.

이번 브런치 북 '고구마보다 사이다'의 연재를 이번 글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생각보다 시원한 사이다 같은 청량감이 부족했지만 끝까지 제 브런치 북을 구독해 주신 많은 독자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다음 연재는 제가 제일 자신 있게 쓸 수 있는 글일 것 같아요. 올여름 너무 더운데 무더위 잘 이겨내시고요. 다들 건강하세요.

이전 15화 아무런 문제없는 부부생활은 오히려 따분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