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그림자
남해 끝자락, 지도에도 희미하게 표시된 작은 어촌 마을 갈목.
이 마을은 육로가 이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인적 드문 외딴 섬마을이었다. 수 킬로에 이르는 긴 갈목대교가 생겼지만 이용하는 마을 사람도 없었고, 찾아오는 사람 또한 크게 늘지 않았다. 오랜 시간 마을 사람들은 외지인과 교류 없이 그렇게 살아왔다. 바닷가 언덕 위엔 마을을 지키는 하얀 등대가 있었고, 그 불빛은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불빛이 닿는 곳에선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갈목의 하루는 단순했다.
새벽 다섯 시, 첫 뱃고동 소리가 나면 어부들이 바다로 나갔다. 갓 잡아 올린 생선은 해가 뜨기도 전에 부두 한쪽 어물전 상인들 손에서 팔렸고, 한 낮이 지나면 바닷바람에 말린 생선들이 줄지어 걸렸다. 아이들은 골목에서 구슬치기를 했고, 저녁이 되면 집집마다 생선 굽는 냄새가 온 마을을 뒤덮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갈목은 그야말로 평온하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4월 17일 석양이 진지도 한참이 지난 늦은 저녁. '갈목' 유일한 지방 축제인 조개잡이 축제로 마을은 분주했다. 집집마다 대문이 열렸고, 주민들은 마을회관으로 모였다. 회관 마당에는 테이블이 놓였고, 테이블마다 조개구이와 막걸리가 올랐다. 아이들은 마당과 회관 내부를 뛰어다니며 놀았고, 회관 창문 너머로는 잔잔한 바다와 별빛이 보였다.
그러나 그날 밤바다에서는 철썩이는 파도소리 중간중간 이상한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낮고 길게 이어지는 소리, 마치 무언가가 깊은 바다 밑에서 크게 호흡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몇몇 있었지만 잠시 귀를 기울였을 뿐 다시 사람들과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개의치 않았다. 소리는 흥에 겨워 커져가는 사람들의 고성방과, 주변 웃음소리와 술잔 부딪히는 소리에 묻혀서 어느새부턴가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자정이 넘었고, 사람들도 하나둘씩 빠져나가며 축제도 파하는 분위기였다.
'꺄아악 -'
어디에선가 조용한 어둠을 깨우는 날카로운 비명이 울렸다. 비명과 함께 거센 파도 소리가 섞여 들렸고, 곧이어 사람들이 모여있던 마을회관의 불이 꺼졌다.
그로부터 30분 후, 방파제 근처와 회관 뒤편 그리고 바닷가 모래밭에서 십여 구의 시신이 발견됐다. 그들은 모두 눈을 부릅뜨고 하늘을 바라보며 굳어 있었고, 얼굴은 두려움과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십여 구의 시신 어디에도 살해되었다는 정황이 될 외상에 의한 상처가 전혀 없었다. 사건 이후 신체 부검과 혈액검사에서도 독극물은 검출되지 않았다. 결국 이들을 부검한 법의학 전문가는 원인 모를 급성 심장마비에 의한 돌연사로 사건을 종결시키려 했다. 하지만 유족들 대부분은 그 진단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신들 주위에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물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신들이 있던 모래밭과 회관 뒷마당, 방파제 근처에는 사람 팔목 정도 굵기의 검은 실이 뱀처럼 길게 뻗어 있었다. 그 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고, 강한 바람과 파도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누군가 그 실을 칼로 끊으려 했지만 실에 닿자마자 칼은 검붉게 녹이 슬며 부식되어 버렸다. 또 실을 잡아당기던 손은 강한 독에 중독된 것처럼 본연의 색을 잃고, 시퍼렇게 변해갔다.
아침이 되자 그 실은 증발하듯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선 며칠간 시신들의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
유족들의 심한 반발과 경찰의 집요한 조사로 국과수 부검과는 상반되게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마흔여섯 살의 어부 한두석이 지목됐다. 그는 사망자 중 세 명과 사건 당일 함께 술을 마셨고, 시신이 발견된 장소 주변 모래에 그의 장화 발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건 발생 하루 뒤, 한두석은 마을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수색대가 바다와 산을 샅샅이 뒤졌지만 한두석은커녕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사람들 사이에서 그에 대해 말들이 오갔다.
"그 얘기 들었는가? 두석이 사라지기 전날 밤, 두석이 집 벽에 검은 실이 여러 겹 얽혀 있었다고 하던데."
"응, 들었구먼. 그 실이 뱀처럼 벽을 타고 올라가더니 집 안으로 기어들어갔다지 뭐야."
그 얘길 듣고 있던 두석의 이웃집에 사는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내가 떼볼라 했는디. 손끝이 퍼렇게 변하더니 딱딱하게 굳어 불었어야. 그 후론 이 손이 말을 안 들어."
그녀의 손은 파랗다 못해 검게 변색돼 있었다.
사건 이후 갈목은 완전히 변해버렸다. 두려움에 대낮에도 대문을 잠갔고, 해가 지면 집 밖 출입은 일절 없었다. 그래서인지 밤이 찾아오면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죽은 마을 같았다. 수 십 년 동안 꺼지지 않던 등대도 불빛을 잃은 지 2주가 지났다. 등대 불빛이 꺼진 시간에는 개 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골목에 나오지 않았고, 어부들은 바다에 나가길 꺼려했다. 바닷가 모래사장은 며칠째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채 조용했다.
그러던 중 마을 회관에 모인 몇몇 사람들이 술김에 이야기를 꺼냈다.
"그날 밤에 바다서 이상한 소리가 나불드라. 깊고, 무겁고, 참 기분 나쁜 소리였어. 마치 거친 숨을 몰아 쉬는 거 같더라니께."
"그리고 나가 잘못 본 갑다 혔는디 참말로 달이... 달이 핏빛맨치로 붉지만 이라."
한 젊은 어부가 반박하듯이 소리를 질렀다.
"그건 그냥 바람소리랑께! 괜히 사람 불안허게 그런 소리 좀 혀불지마소!"
그러나 그는 다음날 새벽 홀로 배를 몰고 나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사라지고 며칠 뒤 그의 빈 배가 등대 아래 바다에서 발견됐다. 배에는 젖지 않은 그물과, 낯선 기호가 배 바닥에 그려져 있었다. 그 모양은 수많은 선이 얽힌 원 안에 ‘눈’이 있는 형상이었다. 그 문양을 손끝으로 따라 그린 사람은 갑자기 숨을 헐떡이며 손을 뗐다.
"허억-,뭐가 이리 싸~하냐… 온몸이, 허벌나게… 꽁꽁 얼어붙는 거 같당께… 숨이 턱, 막혀불 것 다잉…"
최근 큰 사건으로 시끄러워진 마을이라서인지 한 사람의 실종임에도 광주 국과수와 광주 지방 경찰청에서 직접 조사를 나왔다. 여러 방면으로 심도 있는 조사가 이루어졌지만 결국 어떠한 흔적이나 단서도 찾지 못한 채 단순 실종으로 결론 내리고 철수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믿지 못했다. 그들은 낮에도 서로 눈을 피하며 속삭였다.
"그거 저 깊은 바다 속서 불러온 거여. 불러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누가 그걸 불렀당가!"
"우라질, 오래전에 봉인된 걸… 또다시 누가, 도대체... 우린 다 끝났당께. 어쩐댜!"
두 달이 지나고 6월 중순. 계절이 여름에 들어서자 갈목 앞바다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
밤 11시 꺼졌던 등대가 다시 켜졌고, 불빛이 세 번 깜박였다. 잠시 후 수평선 너머에서 달이 빨갛게 피로 물든 것처럼 떠올랐다. 달빛이 바다를 덮자, 파도와는 다른 깊고 음산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지만 어딘가, 누군가와 닮은 소리였다. 잠이 들지 않은 몇몇 사람들이 들었을 때 오래전 사라진 한두석의 목소리와 닮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