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기도 하고, 정작 연말이 아니라고 해도 작업을 전날 저녁에 지시하시면 어떡합니까? 또 휴가 결제는 사업부장님이 3일 전에 하셨잖아요."
"고객이 우선 아냐? 나 이번 일 그냥 안 넘어갈 거야. 각오해."
팀장을 맡은지도 4년이 다 되었다. 이직하고 온 회사에서 신규 사업 진행 관련 부서로 전배 받고 새로운 팀을 구성해 이렇게 회사를 다닌지도 5년 차. 기존 부서와는 다르게 새로운 부서에서 무언가 결과를 보이기란 쉽지 않았다. 물론 예전 같았으면 맡은 일에만 충실하였을 테지만, 기존에 다녔던 회사에서는 기득권이었다면 지금은 누가 봐도 투자가 들어가는 새로운 사업부서의 기술팀을 맡고 있는 팀장인지라 시간이 가면 갈수록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 하는 자리였고,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믿음을 부서원들에게 보여주여야 하는 위치였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첫 해와 비교해서는 꽤나 매출 성장도 이뤘고, 위에서 보는 시선도 조금은 노력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내부적으로 신규 사업 부서이다 보니 인원도 적었고, 적은 인원이 가질 수 있는 유대감이 타 부서에 비해서는 좋았다. 아니 좋다고 생각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생각은 나의 착각이었음을 알게 되었지만.
지금 있는 사업부서로 조직 개편이 된 것은 2년이 체 안되었다. 기존에는 별도의 기술부서에 소속된 팀이었지만, 사업부서 체제로 부서가 재편되면서 관련 사업부서로 팀이 모두 전배 되었고, 한편으론 걱정이 많았다. 영업 대표가 관리자가 되면서 기존에 협력관계였던 분이 상하관계가 되는 것부터 걱정이 됐고, 무엇보다 사업부서로 팀이 전배 되면서 이제는 매출 결과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첫 해는 기존 협력관계로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부서는 운영되었고, 워낙 쿨(?)한 관리자 덕에 할 말은 하고, 사적인 자리에서는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업무 관련 의견도 편하게 제시했고, 가끔은 사업부와 의견 대립이 생겨도 적당한 선에서 중재가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1년을 보내고, 사업부서와 동행을 한지도 1년 6개월이 지날 때부터 우린 삐걱대기 시작했다.
우선 사업부서 내에서 관리자와 영업 팀원 간에 의견 대립이 자주 발생하게 되었고, 결국은 이런 분위기는 기술팀인 우리 팀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 결국 관리자와 영업팀원 간의 불화는 매출에도 영향을 주었고, 부서가 불협화음을 내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참다못한 나는 사업부장에게 긴급회의를 요청했고, 부서 전체회의를 진행하면서 조금은 선을 넘고 말았다. 물론 결코 나쁜 의도는 아니었지만 관리자 입장에서는 지나친 간섭이나 하극상으로 보았을 수도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 회의 중에는 그 어떤 반응이나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회의 진행 내내 나는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부서장은 이날 이후 나에 대한 태도가 조금씩 바뀌어 갔고, 의견차가 보이면 자신이 지시한 대로 하라고 하면서 나의 의견을 묵살하기 시작했다.
어떤 날에는 따로 회의실로 불러 협박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에는 '예전 같았으면 한 대 때렸을 것 같다'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난 어이가 없었고, 정말 기가 찼지만 그의 말에 지나침이 있다는 것만 지적하고, 부서의 평화를 위해 크게 문제 삼고 싶지 않았다. 결국 사람과의 관계는 일방적일 수 없듯이 난 부서장과의 신뢰가 이렇게 무너져 내렸고, 결국 그가 하는 말들이나 행동은 모두 곧이곧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그러던 즈음 사건은 멀지 않은 시기에 터졌고, 그 일이 문제가 되어 팀 해체 및 보직해임이 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사건의 전말은 연말을 맞아 회사에서는 전 직원 대상으로 남아있는 연차 휴가 소진을 권고했고, 팀원들은 저마다 연말 휴가 계획을 메일로 보고하고, 30~31일 연차 휴가를 냈다. 물론 미리 휴가를품의해 부서장의 결제까지 휴가 3일 전에 완료된 후라 한 해 동안 수고했다는 차원에서, 우리 팀은 29일 저녁 가볍게 회식을 했다.
즐겁던 분위기가 무르익던 중 팀원 중 한 명의 전화벨이 울렸고, 팀원의 표정만 봐도 좋지 않은 요청사항임을 직감했다. 딱딱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고서는 통화한 팀원은 내게 통화 내용을 얘기했고, 얘기는 정말 황당한 고객의 요구사항임을 알고 조금 화가 치밀었다.
이야기인즉슨 내일 A 고객사 대외기관 작업이 있으니 지원 요청을 하는 것이었고, 다음 날 오전 작업 지원을 저녁 7시가 넘어서 한다는 것 자체도 화가 나고, 납득이 되질 않았지만, 정작 더 화가 난 것은 휴가임을 이야기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스케줄이 있으니 다른 직원이라도 보내달라는 요청이었다.
난 알코올로 혈액 순환도 빨라진 데다 터무니없는 고객의 요구사항에 화가 나 영업 담당에게 전화해 고객의 요구가 너무한 거 아니냐, 내일 두 명이 휴가인 데다 나도 다른 고객과 지원 일정이 있어서 도저히 시간 내기가 어려우니 영업담당에게 작업일정 변경을 조율해달라는 이야기를 전달했다. 담당 영업은 자신의 입장에서 변명하며, 난처한 목소리로 기술팀 휴가 일정 변경을 이야기해봤지만 나의 곤란해하는 목소리에 본인이 고객 측과 다시 이야기해보겠다고 얘기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 이후로 1시간여 동안 전화가 없길래 이렇게 일단락이 될 줄 알았던 사건은 다시 해당 팀원의 전화벨이 울리고 통화하는 담당 팀원 얼굴을 보면서 잘 해결이 되지 않았음을 직감했고, 결국 난 극단의 조치로 담당 영업에게 조금은 격한 표현으로 문자로 욕을 한 바가지 쏟아부었다.(실제 욕은 아님) 그 이후 부서장에게 전화가 왔지만, 시간도 늦었고, 받아봤자 뻔한 이야기를 할 듯해서 전화를 받지 않았고, 이게 결정적인 나의 실수였다. 예정된 대로 팀원들은 다음 날 출근하지 않았고, 난 다른 고객과의 약속으로 고객사로 이동 중이었다.
지하철로 이동 중에 갑자기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고, 전화기의 착신 번호를 보니 부서장의 자리 번호였다.
"김 팀장, 어디예요?" 조금은 격앙된 그의 목소리에 난 조금 긴장하며 답변을 미루었고, 그는 다그치듯이 나에게 한 마디 쏘아붙였다. "다들 어디 간 거예요? 왜 출근들 안 합니까?" 난 조금 어이가 없기도 했고,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가 싶어서 조금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두 사람은 휴가 품의 올려서 사업부장님이 3일 전에 결제하셨잖아요. 저는 미리 보고한 대로 B사에 직출 중입니다."
"누구 마음대로 휴가를 보내, XX야. 회사가 장난이야?"
그의 목소리는 마치 내가 할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터져 나왔고, 나름 조금은 억울하고, 조금은 화가 나서 나도 사업부장에게 쌓인 말들을 뱉어냈다.
"말 막 하지 마세요. 그리고 A사 너무한 거 아닙니까? 연말이기도 하고, 정작 연말이 아니라고 해도 작업을 전날 저녁에 지시하면 어떡합니까? 또 휴가 결제는 사업부장님이 3일 전에 하셨잖아요."
"뭐? 내가 언제 막말했다고 그래? 그리고, 고객이 우선 아냐? 나 이번 일 그냥 안 넘어갈 거야. 각오해."
나의 거침없는 말에 그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나에게 독하게 이야기하며 선을 넘었고, 그 전화 한 통화로 서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로 우리 팀 전원은 해당 사건에 대한 경위서를 썼고, 사업부장은 인사팀장과 사장실을 쫓아다니며 나에 대한 인사조치를 관철시키려고 그가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적극성'을 보이며 끈질기게 회사 측에 인사 조치를 요청했고, 이런 와중에서도 날 개인적으로 불러 자신에게 사과하라는 강요를 꾸준히 해왔다. 결국 회사에서는 인사위원회가 열렸고 직책과 위계질서가 있는 조직이 우선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항명과 소통의 죄를 물어 팀 전원을 다른 팀 전배 및 팀장 보직해임의 인사 조치를 당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결정적으로 내가 불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영업 담당에게 보낸 격한 표현의 문자가 사업부장에게 전달되었고, 사장님 이하 인사위원 임원들에게 아주 결정적 악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꽤나 지났지만 이 상처 한방으로 난 회사에서 복구 불능의 상태가 되었고, 시간이 지난 지금도 아픈 상처로 남아 잊힐만하면 생각이나 내 머릿속을 헤집고,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A고객사 영업담당과 사업부장은 퇴사를 했다. 그 퇴사 때 내 맘은 시원하고, 통쾌할 줄 알았는데 그냥 그랬다. 남아있는 나도, 떠난 그들에게도 상처가 된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순간에 잘했다, 잘못했다의 생각들은 이제는 남아있지 않지만, 단지 그 아픔만은 잊어버리고 싶어도 잊히지가 않는다. 앞으로도 꾸준히 생각날 듯하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닌 척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