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민 Apr 23. 2024

일상의 철학

   2019년 봄부터 이곳에 적어도 일주일에 한 편씩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여행을 가는 경우에는 필요한 편 수를 미리 계산해서 세이브 원고를 써놓고 갈 만큼, 약간 변태 같이 5년간 혼자 저만의 마감을 지켜왔는데요. 요즘 들어 버겁긴 합니다. 이곳에 미리 공개할 수는 없는 원고들을 쓰는 시간이 많아지기도 했고요.

   그래도 제가 언제까지 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마음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쓸데없는 글도 자주 올리지만, 그래도 그간 올린 글로 세상에 나온 책이 넷, 앞으로 나올 책이 아마도 다섯, 도합 아홉 권가량 꾸려지고 있으니 참 감사한 일이죠.


   이번 글(...이라고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서랍 속에 발행할 글이 정 없을 경우를 대비해 만들어 두었던 건데, 이걸 올리게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저의 브런치 곳간이 비었다는 뜻이군요. 어쨌든 휴식 삼아 즐겁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일상의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림을 하나씩 그리고 있어요. 시작은 오은 시인의 '그곳'이라는 시를 읽고, 생각나는 대로 붙인 짧은 단상이었는데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제 소셜 미디어 계정에 하나씩 그려서 올리고 있습니다. 자주는 못 그리고 가물에 콩 나듯, 잊을만하면 하나씩 올리는 것을 모토로 하고 있는 데다 그다지 볼 건 없는 계정이라 굳이 들르실 필요는 없고요. 여기서 이렇게 보시면서 한번 피식 웃어주시면 좋겠어요. 뭔가 생각 버튼이 눌리는 부분이 있다면 기쁠 것 같아서, 또 여러분 각자의 일상에서 만나는 사물들 이야기를 들어보셔도 좋을 것 같아서 올립니다.   


저희 집에 있는 사물들을 그림으로 남길 수 있어서 그것도 좋더라고요. 이건 선물 받은 오디 비누입니다.
어디서 듣던 소립니다. "아니 제가 집에서 논다고요?"
사십 후반인 저는 오후 두세 시쯤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저보다 더 어린 어느 작가님은 네 시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각자의 체감시간이 다른 것도 참 묘하고 신기해요.
위를 볼 때보다 아래를 볼 때 더 아찔한 법이죠.
어쨌든 글을 쓰는 것은 닭의 벼슬이 아니라 족제비의 꼬리.
선후관계가 헛갈릴 수도 있지만 백열전구의 경우 빛보다 열이 먼저랍니다. 시간을 두고 따뜻해지는 건 우리가 만지는 유리 부분이고요. 그러므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이 먼저!

   전구에 관해서는 친구가 더 멋진 말을 알려줬어요. "빛나려면 연결되어야 한다." 아스널의 아르테타 감독님이 한 말씀이래요. 먼저 콘센트에 연결해야 빛이 나는 전구의 특성이 여기서도 멋지게 겹쳐지네요. 빛나려면 (어딘가에 혹은 누군가와) 연결되어야 하고, 먼저 나의 내면이 뜨거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요 작은 전구가 알려주는 게 귀엽고 고맙지 않나요.

"먹먹한 심장으로 푸른 날을 다 받아내고," "썰어낸다고 다 잘려나가면 그게 세상인가" - 강경화, '어머니의 도마' 중에서
‘나를 닮은 어둠’과 ‘살아있는 모든 것에는 어둠이 있다’ 중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후자로 채택했던 그림자의 말.

   계정에 쌓이는 것을 보고 있으니 왠지 뿌듯합니다.


   이 그림들의 시작점이 되어준 오은 시인의 시를 붙여둡니다.


오은, '그곳'

시집 <없음의 대명사(문학과지성 시인선 시인선 585)> 중에서


[그곳]


거울이 말한다.

보이는 것을 다 믿지는 마라.


형광등이 말한다.

말귀가 어두울수록 글눈이 밝은 법이다.


두루마리 화장지가 말한다.

술술 풀릴 때를 조심하라.


수도꼭지가 말한다.

물 쓰듯 쓰다가 물 건너간다.


치약이 말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변기가 말한다.

끝났다고 생각한 지점에서, 다시 시작하라.



매거진의 이전글 독일 시골마을 산책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