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니 Aug 27. 2024

운전면허증 없어 사건

Day. 3

2024년 8월 6일 화요일


홍박사✐


오늘 치명적인 변수가 생겼다.


사전 계획으로는 직접 운전해서 브리즈번 시외의 레밍턴 마운트 국립공원을 며칠간 여행하기로 했었다. 관광지만 골라 가기보다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보석 같은 곳을(캬-) 우연히 발견하는 여행의 낭만을(캬-) 기대했었다. 여행 전에 여러 렌터카 업체를 꼼꼼히 비교해서 우리에게 알맞은 튼튼한 SUV를 골랐고 국제면허증을 발급받았다. 호주는 영연방 국가답게 좌측통행을 하는데 일본에서의 자동차 여행 경험이 있어 걱정이 없었다.


그만 읽고 짐 챙겨!


오전 일찍 렌터카 업체를 방문했는데 담당 직원으로부터 호주에서 들을 수 있는 가장 공포스러운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국제 면허증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건만 (영문 표기된) 실물 한국 운전면허증이 반드시 있어야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면허증은 당연히… 한국의 집에 고이 남겨두고 왔다. 고심해서 짜둔 며칠 간의 여행 계획이 구렁텅이로 빠지는 순간이었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혹시 다른 방법이 없는지 직원에게 묻고 또 물었으나 자기는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매뉴얼 상의 답변만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근처 다른 업체를 찾아갔으나 똑같은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동시에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이런저런 방법을 찾다가 일단 디디(공유차량 서비스)를 타고 오늘 묵을 비치몬드의 에어비앤비 숙소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이동하는 동안 국립공원의 일정에 대해 불이 나게 머리를 굴렸다. 택시나 공유차량을 타고 움직인다 해도 시골마을이라 한계가 있을 게 뻔했다. 다시금 마음이 쓰라렸다. ‘이게 어떤 여행인데!’ 다행히도 김 군은 이 사태가 일어난 순간부터 나를 달래며 괜찮다는 말로 위로를 해주었다. 기사님은 우리의 여행에 조미료라도 치려는 듯 EDM부터 마이클 잭슨까지 연신 빠른 템포의 노래를 틀어댔다. 남의 속도 모르고.


1시간 20분 동안 산을 넘고 물을 건넜더니 비치몬드라는 이정표가 보였고 고불고불 길을 더 들어가니 숙소의 이름 ’La dolce vita’가 쓰인 작은 팻말과 함께 초록 구릉과 하늘이 맞닿은 목가적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그림인데…아, 윈도 XP 바탕화면! 미국 캘리포니아주 나파 밸리의 한 언덕이라고 알려진 그 익숙한 그림이 눈앞에서 현실이 되었다.


윈도 XP 바탕화면 깔


차에 내리자 더없이 마음씨 좋아 보이는 노부부(제임스와 잉그리드)가 우리를 맞이했고 인사를 나누었다. 우리의 렌터카 사정을 설명했더니 역시나 이곳에선 택시나 우버 따윈 오지 않는다고 했다. “와이프가 너 죽일 수도 있겠다.(She could kill you)” 란 농담을 건네면서… 걱정할 것 없다며(No Worries!) 오늘 하이킹할 장소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것이다. 신이시여, 죽으라는 법은 없군요. 염치 불고하고 차를 얻어 탄 덕분에 3시간 남짓한 하이킹을 하며 우리는 호주의 자연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었고 잔뜩 쌓인 마음의 짐을 홀가분하게 내려놓을 수 있었다. 하이킹이 끝나고 카페에서 저녁식사를 해결할 즈음에는 픽업까지 해주셔서 정말 편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래밍턴 국립공원을 걷고 또 걷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조금 길었던 하루가 스쳐갔다. 이런저런 변수가 수도 없이 생기는 게 인생이라면 내 삶의 상수는 무엇일까. 오늘처럼 나를 충분히 원망했을 법한 상황에서도 차분함을 유지한 채 걱정 말라며 다 괜찮을 거라 도닥이는 김 군과 어려운 상황을 알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아이의 얼굴. 언제든 나를 믿어주고 내 편이 되어주는 이런 단단한 상수가 있어 고단한 삶 앞에서 조금 덜 민망하고 조금 더 버틸 힘이 생기는 것이다. 숙소에 다다랐을 무렵 숙소의 이름이 적힌 안내 팻말이 다시 눈에 띄었다. 달콤한 인생(= La dolce vita). 이름으로 쓰기엔 꽤 식상할 법도 한 이국의 언어가 인생의 진리가 담긴 것 마냥 마음에 쏘옥 들어왔다. 인생, 참 달콤하다. 여행, 참 달콤하다.






김 군✐


원래 오늘의 계획은 차를 빌려 브리즈번으로부터 약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비치몬트의 숙소로 가는 것이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짐을 챙겨 체크 아웃을 하고 다 같이 렌터카센터에 갔다. 차를 렌트하고 싶다고 하니 한국에서 쓰던 ‘실물 면허증’을 보여 달라는 센터 직원의 말.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이내 창백해지는 홍박사의 얼굴. 곧이어 폭풍처럼 밀려오는 슬픈 예감…


끝내 차는 빌릴 수 없었고, 차를 빌린다는 전제 하에 세워 두었던 여행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위기였던 건 혼돈과 절망의 늪에 단단히 빠져버린 홍박사의 멘탈이었다. 말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동공은 어딜 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최소 4년 3개월은 늙어버린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 역시 못지않게 혼란스러웠지만 나까지 이 상황에서 어쩔 줄 몰라하면 홍박사가 빠져버린 늪의 점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먹었다. 저 자를 늪에서 당장 꺼내줄 수 없다면 나까지 합세하지 않기로. 되려 속을 고요히 하고 의연한 마음가짐과 태도로 오늘 하루에 임하기로.


참 태평한 어린이 @렌터카센터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하면 된다. 우리는 렌터카 대신 우버(정확히는 디디. 우버와 유사한 서비스)를 잡아 타고 비치몬트의 에어비앤비로 향했다. 숲 속으로 난 꼬불 꼬불한 산길을 따라 한참을 달려야 했다. 그렇게 도착한 숙소에 주섬 주섬 트렁크를 내리고, 환한 미소로 맞아주는 주인 내외께 차를 빌리지 못한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이곳은 우버가 절대 잡히지 않는 곳인데 어떡하면 좋으냐며 진심으로 우리를 걱정해 주었다. 그러게요… 어떡하면 좋을까요… (호주에 온 이래로 모든 사람들이 ‘No worries!’라고 말하는 것만 들어왔는데 처음으로 ‘That’s really worrying.’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 직후 다시 ‘No worries!’라고 말해주시긴 했지만.) 나도 모르게 울상을 지을 뻔하다가 오늘의 키워드인 ‘의연’을 속으로 세 번 되새기며 애써 웃음 지어 보였다.


다행히 인상 좋으신 제임스 할아버지께서 근처 어디든 차로 태워다 주신다고 하여 감사히 얻어 타고 세계 자연 유산인 ‘래밍턴 국립공원’에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두 시간가량 새소리 가득한 (스피커가 달려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한적한 숲 속을 거닐었고, 국립공원 초입의 카페에서는 레드 와인 한 잔에 끝내주는 올리브와 구운 빵, 갓 튀긴 감자튀김까지 맛볼 수 있었다. 

(심지어 제임스는 몇 시간 후 다시 차를 가지고 와 숙소로 우리를 데리고 가 주었다. 스윗하셔라.)


매일 먹어댄 와인, 올리브, 감튀


숙소로 돌아오자 그제야 아까는 정신이 없어 보이지 않던 이곳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은 온통 오렌지 태양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녹음으로 둘러 싸인 너른 벌판 한가운데에 무려 야생 캥거루(!!)가 앉아 있었다. 우리가 조심스레 다가가자 경계심 많은 캥거루는 재빨리 지평선 너머로 겅중겅중 달아나 버렸다. 믿을 수 없이 아름다운 오늘 하루의 뒷모습을 잔상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참이고 서서 바라보았다. 비현실적인 풍경 속에서 마음 가득 선의가 차올랐다.


하루 종일 보고 싶은 풍경


갑자기 나타난 너


냉소적으로 사는 게 멋진 거라고 굳게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남들이야 어떻든 말든 신경 끄고 나 만의 길을 가겠다고 세상 쿨한 척 굴었었다. 하지만 살아갈수록 거듭 증명되는 것은 사람은 늘 타인에 의해 구원받는다는 것. 하마터면 진창이 될 수도 있었던 하루였지만 멀리서 날아온 손님들에게 선뜻 베풀어 주신 호의 덕분에 잊지 못할 하루가 된 오늘의 끄트머리에서 묻는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이들의 하루를 망쳐왔고 또 일으켜 세워 왔을까? 저 사랑스러운 부부처럼 언젠가 나 역시 엉망이 될 위기에 처한 누군가의 하루에 먼저 손 내밀 수 있을까?






이은✐


오늘도 일찍 일어났다. 일어나서 크리미 치킨맛 수프를 먹었다. 맛있었다. 크림수프에서는 아빠 맛이 난다. 왜냐하면 아빠의 맛은 느끼하다. 아빠는 땀을 많이 흘리기 때문이다. 수프는 정말 맛있다. 그리고 수프에 뿌리는 ★후추★도 엄청~ 맛있다. 왜냐하면 짭조름하고 매우니까 내가 후추를 좋아한다. 수프에 빵을 찍어 먹으면 최고~다. 그리고 우린 밖으로 나가서 택시를 잡아 차 빌리는 곳으로 가서 ‘운전면허증 없어 사건’ 때문에 차를 못 빌리고 택시를 타고 비치몬트 숙소로 왔다. 거기에는 캥거루도 있고 도마뱀도 있고 히스*도 있었다. 끝

*Hares (Hare: 호주의 야생토끼)


길었던 하루가 끝났다. 나잇 나잇!


⛳︎ 오늘의 일
점심 식사 → 비치몬트로 이동 → 레밍턴 마운트 국립공원 → 저녁 식사 (레밍턴 마운트 국립공원 내 카페) → 숙


◇ 렌터

호주 여행에서 운전을 하려면 영문 표기된 실물 면허증이 필요하다. 종이로 된 국제면허증을 발급받았다면 실물 운전면허증을 함께 챙겨야 한다. 퀸즐랜드주에는 다양한 렌터카 업체가 있는데 우리는 가격과 차량 조건에 부합한 이스트코스트 렌터카(eastcoast car rentals)에서 예약했다.


◇ 디디(didi)

우버의 경쟁 서비스. 비용을 아끼기 위해 우버와 요금을 비교하며 더 저렴한 편을 선택했다. 브리즈번에는 택시보다 차량 공유 플랫폼이 더 보편화되어 있으니 앱을 미리 깔아 두면 편하다.


◇ 레밍턴 마운트 국립공

세계 자연 유산(Gondwana Rainforests of Australia)으로 지정되어 있는 호주에서 가장 큰 아열대 우림이라고 한다. 원시림에 가까운 숲길을 걸어보는 특별한 경험을 해 볼 수 있다. 운이 좋으면 야생의 코알라를 볼 수도 있다고 한다. 트래킹 코스 초입에 위치한 카페(Binna Burra Tea House)는 뷰도 좋지만 음식도 훌륭해서 끼니를 해결하기에 좋다.


◇ 라 돌체 비타 (La Dolce Vita)

비치몬트 깊은 숲 속에 위치한 동화 같은 에어비앤비. 잉그리드와 제임스, 두 노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숙소다. 5성급 호텔 같은 시설을 기대할 수는 없지만 나름 포근하고 깔끔하게 잘 관리되고 있다. 도착하면 환영의 의미로 잉그리드가 직접 구운 커다란 빵과 화이트 와인 한 병을 받을 수 있다. 탁 트인 앞뜰에는 총 천연색의 새들이 지저귀고 뒤뜰에는 야생 캥거루가 뛰어논다. 노부부가 키우는 개 ‘루시’는 사람을 잘 따라서 함께 동네 산책도 할 수 있고, 저녁이 되면 끝내주는 노을과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목격할 수 있다. 호주의 대자연을 직접 느껴보고 싶다면 강력 추천!



매거진의 이전글 호프 투 씨 유 어게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