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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니 Oct 21. 2024

번 아웃 없는 브리즈번

Day.13

2024년 8월 16일 금요일



김 군✐


에카(Ekka)에 갈 생각은 처음부터 1도 없었다. 여행 중에 오고 가며 만난 사람들이 우리의 남은 일정을 물을 때,  그들이 마침 에카 기간이라며 꼭 가보라고 할 때, 주변에 갈 곳을 찾아보다가 검색 결과에 우연찮게 에카에 대한 내용이 뜰 때도 ‘우리가 추구하는 여행과는 결이 달라도 너무 달라’라며 미련 없이 넘겨버렸었다. 마지막까지 브리즈번에서 가장 핫하고 힙하고 한적하고 고즈넉한 곳을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낼 요량이었다. 분명 계획은 그랬었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핸들을 꺾었다. 언제 에카가 열리는 기간에 퀸즐랜드에 또다시 오겠냐며. 그렇게 우리는 갑작스럽게 에카가 열리는 장소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Ekka에 오신 걸 환영해요


어쩐지 오늘따라 거리가 유난히 텅 비어 보인다 했더니 브리즈번 사람들 전부 에카에 와 있었던 모양이다. 행사장 초입부터 호주에 온 이래 처음 보는 규모의 인파로 넘실거렸다. 이 난리통에 아이를 잃어버릴까 봐 갑자기 확 긴장이 되었다.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조금은 어리둥절한 상태로 축제 속으로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먹을 것, 마실 것, 놀 것, 살 것, 볼 것들이 어떠한 목적도 테마도 주제도 기승전결도 없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고 사람들 또한 그냥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축제장을 오가며 즐기고 있었다. Festival의 어원이 구 프랑스어 feste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feste의 의미인 “축제, 국경일, 휴일, 시장, 박람회, 소란, 떠들썩함, 장난, 즐거움"이 단어 하나하나 제대로 눈앞에 구현되고 있는 중이었다.


호주 사람들 여기 다 모였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놀이기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홍이은의 콧구멍도 확장되기 시작했다. 놀이기구를 탄 아이들의 얼굴, 그 얼굴을 바라보는 이은이의 얼굴을 보니 도저히 뭐라도 태워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나 모든 놀이 기구마다 대기줄이 어마어마한 관계로 딱 하나만 타보기로 하고 약속하고 이은이에게 타고 싶은 것을 직접 고르게 했다. 고심 끝에 이은이가 고른 것은, 널찍하고 얕은 야외 풀장 위에 바람을 채운 커다란 투명공들이 둥둥 떠 있고 그 속에 들어가 노는 시간제 놀이기구였다. 호주 아이들 사이에 쭈뼛쭈뼛 줄을 서서 15분 정도 기다렸을까. 이은이의 차례가 되었다. 아이의 공처럼 부푼 설렘이 나에게 까지 전해졌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들어갔지만 이내 물 위에 뜬 공 속에서 뛰고 구르고 눕고 달리기 시작했다. 공이 터지거나 찢어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국적불문 저 나이또래 남자아이들의 폭발적인 에너지가 놀라우면서도, 저 별거 아닌 놀이기구에 너무나도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이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땀을 뻘뻘 흘리며 공에서 나오는 이은이의 표정은 순도 100%의 즐거움으로 충만했다. 한껏 신난 아이를 데리고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뙤약볕 아래에서 걸으려니 허기와 갈증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즉석에서 오렌지를 잘라 즙을 내주는 오렌지 주스, 또 즉석에서 반을 갈라 먹기 좋게 슥슥 썰어주는 수박, 한국인이 운영하는 푸드트럭의 한국식 콘도그까지 앉은자리에서 해치우곤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짧고 굵고 찐하게 보낸 마지막 날의 오후가 저물고 있었다.


댄스는 못 참죠


태양은 저녁의 빛깔로 바뀌고 있었고 이대로 숙소로 돌아가기엔 어쩐지 아쉬운 시간, 사우스뱅크 스트리트 비치에 들렀다. 역시나 물을 보자마자 이은이는 옷을 훌렁훌렁 벗더니(완전 호주 사람 다 됐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물속으로 참방참방 뛰어 들어갔다. 노을이 지는 브리즈번의 도심 한복판의 모래사장에 자리를 잡고 해 저무는 도시와 물놀이하는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비치와 건물들이 온통 주황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식어가는 모래 위에 가만히 앉아있노라니 뜨거웠던 오늘 하루가, 그리고 이번 여행이 한 장면 씩 스쳐 지나갔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 남은 한 해동안 하고 싶은 일 등등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다 보니 어느덧 하늘이 깜깜해졌다.


천국이 따로 없구나


그러고 보니 브리즈번에 와서 꼭 타 보고 싶었던 브리즈번 대관람차를 타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마지막 날 밤의 코스로 딱인 것 같아, 물놀이하던 이은이를 다시 씻기고 입혀서 브리즈번 휠로 향했다. 대관람차를 별로 즐기지 않는 홍박사는 아래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나와 이은이만 관람차에 올랐다. 천천히 출발한 관람차의 고도가 점점 높아지자, 브리즈번의 반짝반짝한 야경이 두 눈 가득 펼쳐졌다. 저 아래로는 첫날처럼 여전히 브리즈번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고, 강변을 따라 불빛을 밝힌 크고 작은 빌딩들이 줄 지어 서 있었다. 브리즈번에 와서 이은이와 둘만 보내는 시간은 또 처음인 것 같아서, 근사한 야경을 배경으로 열심히 함께 셀카를 찍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마지막 밤이라 그런지 감수성이 충만 해져서 아이의 손을 맞잡고 이번 여행에서 느꼈던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마냥 아이인 줄 알았는데 의젓하게 엄마아빠의 말을 따라 주고, 어떤 순간에도 항상 웃어줘서 정말 고마웠다고. 앞으로 더 많은 여행을 함께 하자는 약속도 덧붙였다. 부디 이은이에게 이 밤이 오래 기억되길, 그리고 지치고 외로울 언젠가의 밤에 오늘 밤의 기억이 이은이에게 조금은 힘이 되길 바라며 대관람차에서 하차했다.


여행이 끝나가네요 @대관람차


이렇게 우리의 호주 일정은 모두 끝이 났다. 팍팍한 일상 속에서 한 줄기 빛처럼 막연히 기다리고 그려오던 여행이 어찌 저찌 시작되었고, 마침내 마지막 날 마저 끝나버리고 말았다. 후회는 없지만 딱 3일만 더 주어진다면 진짜 잘 놀 수 있는데, 하는 약간의 아쉬움이 마음에 맺힌다. 하지만 어쩌겠나. 끝이 있기에 여행인 것을. 내일은 아침 일찍 공항으로 가야 하므로 이만 자야 할 것 같다. 오늘 밤 꿈에서라도 조금만 더 여행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홍박사✐


내일이면 출국이다. 아니 벌써! 밤을 지새우며 읽었던 소설이 에필로그로 향할 때와 같은 아쉬움이 폭풍처럼 밀려온다. 그래, 몇 장 남지 않은 우리의 이야기를 이대로 끝낼 순 없다. 아무래도 좀 더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를 끼어 넣어야 이 서운함이 가실 것 같다. 오늘 끝내주게 놀아주겠어! 마지막 날을 잔잔하게 정리하듯 보내려고 했던 계획은 이렇게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거참, 말이 참 많네요


지금 브리즈번은 ‘에카’(Ekka)라는 열흘 간의 축제 주간에 있는데 하루(8/14)는 공휴일로 지정될 만큼 (Ekka Holiday) 퀸즐랜드 주에서는 큰 축제 중 하나다. 에카는 농작물 수확에 대한 기쁨과 감사를 위해 시작된 농업축제로 100년간 지속되어 온 지역 행사라고 한다. 서울로 치면 효창운동장 같은 느낌의 오래된 공설 운동장과 그 주변에서 일주일 동안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경험할 수 있다. 입장료는 대략 성인이 3만 원, 아이는 2만 원이었는데 가족 패키지로 하면 할인을 받을 수 있어 그 편을 선택했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그곳엔 브리즈번의 모든 시민이 모여있는 것처럼 엄청난 인파가 넘실거렸다. 아무래도 금요일이라 사람들이 더 몰린 듯했는데 호주에 와서 호주 사람을 가장 많이 본 날로 기억될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입구부터 온갖 종류의 볼거리, 먹을거리, 놀거리가 줄을 이었는데 농업축제라는 근본을 잊고 ‘에라이, 뭘 좋아할지 몰라 그냥 다 준비했어!라고 외치듯 규칙과 컨셉을 접어두고 퀄리티보다는 양으로 승부하며 다 때려(?) 넣고 그냥 즐기자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하나에 집중하기를 포기하고 눈동자를 쉴 새 없이 굴리며 이 커다란 파도에 몸을 맡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축제 분위기 물씬


온갖 종류의 잡동사니를 파는 부스, 전 세계의 먹을거리, 그 중간에 끼어든 뱀쇼, 유령체험과 놀이기구들, 취지를 이어가고자 한 양털깎이, 멋진 강아지 선발대회, 염소와 닭에게 먹이 주기, 증기기관으로 옥수수알 털어내기, 마장대회, 그리고 빠질 수 없는 콘서트와 요리 대회까지. 가만있자,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신박한 조합인디… 그러니까 사시사철 팔도강산에 무한으로 공급되는 K 지역축제와 꽤 닮아있었다. 세련됨이나 우아함 보다는 본능에 충실한 것들의 총집합. 우리식 작명으로 하면 ‘브리즈번 농축산이고 뭐고 신명 나게 놀아보세 축제’ 정도 되려나. 사실 이런 분위기보다 차분하고 밀도 낮은 공간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로서는 다소 부담스러운 느낌이 있었지만 마지막 날이란 뽐뿌로 인해 최선을 다해 축제를 즐겼다.(이은이는 본인 취향인 듯 우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오후 늦은 시간이 되자 우리의 항마력은 바닥을 보이는 듯했고 역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하면서 에카와 헤어질 결심을 했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했어. 최선을? 다한 자만이 누리는 자유를 만끽하며 도시 중심으로 되돌아가는

버스에 올랐다. 언젠가 다시 에카에 또 올 날이 있을까. 아마도 없을 거라 단언하지만 조금 못생겼지만 밉지 않은 복작복작한 풍경을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날 것 같다.


수박은 한국 수박이 최고라능


도시 중심으로 돌아온 우리는 사우스뱅크 지역의 상징인 스트리트 비치(인공 해변)로 향했다. 여행가이드에서 도시를 대표하는 스팟으로 이곳 비치를 소개할 정도로 브리즈번 여행의 핵심과 같은 곳이다. 조금 서늘한 날씨 탓에 미루다가 마지막 날에 드디어 가게 되었다. 물을 좋아하는 이은이의 적극적인 구애도 한몫했다. 구글 지도에는 오후 5시에 닫는다 정보가 있어 서둘렀는데 도착하고 보니 다행히 제한시간은 없었다. 저녁이 되자 조금 더 쌀쌀해진 탓에 물도 꽤 차갑게 느껴졌지만 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물에 뛰어들었다. 보통 도시 강변에 수영장을 만들 법하지만 모래를 가져와 진짜 해변처럼 만들어놓은 아이디어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점에서 이 도시의 여유가 물씬 묻어났다.



김 군과 함께 모래사장에 앉아 유유히 흐르는 강물과 건너편 고층빌딩이 만드는 야경에 빠져들었다. 넋 놓고 풍경을 보고 있자니 마치 내가 이 도시의 시민이라도 된 것 기분에 휩싸였다. 고작 열흘 남짓 머물렀는데 말이다. 그만큼 이 도시에 푹 빠져든 것일까. 김 군에게 물었다. ‘우리 이 도시에 다시 올 수 있을까?’ ‘글쎄, 언제가는?’ 세상에 가 본 곳 보다 가보지 않은 곳이 더 많기에 이곳을 다시 선택할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이 시간을 몹시도 그리워할 것은 분명하다. 만약에 다시 올 수 있다면 그때까지 이 도시도 우리 가족도 무탈하고 온전하며 조금 더 성장해 있기를 바란다.


브리즈번, 잘 있어!






이은✐


오늘은 아침 일찍~ 일어나가지고 브리즈번 페스티벌 EKKA에 갔다. 거기에는 사람이 엄청~ 많았다. 그래서 엄마 아빠가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난 기분이 무척 좋았다. 우린 거기에서 승마도 보고 핫도그(콘도그)도 먹었다. 승마를 보는 중에 멀미가 나서 곧장 인공 바다를 갔다. 거기에서 포켓몬 놀이도 하고 배영도 마스터했다. 신나는 하루였다.


얘야, 어서 먹거라


⛳︎ 오늘의 일
숙소 → 에카 (Ekka) → 사우스뱅크 스트리트 비치 (Southbank Street Beach) → 브리즈번 휠 (The Wheel of Brisbane) → 숙

◇ 에카 (Ekka)
퀸즐랜드 최대 규모의 축제. 농작물 수확에 대한 기쁨과 감사를 표하기 위해 시작된 농업 전시회이자 페스티벌로, 정식 명칭은 로열 퀸즐랜드 쇼(The Royal Queensland Show)이며 매년 8월 포티튜드 벨리 역 근처 로열 퀸즐랜드 쇼 그라운드에서 열린다. 약 40만 명의 사람들이 매 해 찾는다고 하며 다양한 동물들, 놀이기구, 음식, 라이브 공연 등을 즐길 수 있다. 모든 부스는 카드 결제가 가능하므로 별도로 현금을 준비해 갈 필요는 없다. 다만 엄청난 인파가 몰리므로 단단히 각오하고 방문할 것!

◇ 사우스뱅크 스트리트 비치 (Southbank Street Beach
)
브리즈번 시티 한가운데 조성되어 있는 인공 해변. 골드코스트의 고운 모래와 근처 바닷물을 끌어 와 진짜 해변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무료로 개방되어 있어 누구나 도심 한복판에서 해수욕을 즐길 수 있고, 3개의 물놀이 스팟과 샤워장 등의 시설들이 모두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다. 근처 산책길과 언제든 사용 가능한 바비큐 시설 등도 구비되어 있어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기에 매우 훌륭한 장소.

◇ 브리즈번 휠 (The Wheel of Brisbane
)
브리즈번 시티의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대관람차.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다섯 바퀴를 돌고 내리게 된다. 브리즈번 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하고 싶다면 추천. 브리즈번 휠 그 자체로도 멋진 야경의 일부이기에 굳이 타지 않고 근처에서 야경을 감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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