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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ronde Jun 14. 2022

Vantage Point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100년의 갈등

2022년 3월 14일, 키이우 시내


2022년 2월 24일 -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미사일이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비롯한 마리우폴, 하르키우 등으로 향했다. 우크라이나의 제2의 도시이자 러시아 국경 부근에 위치한 하르키우는 전쟁이 발발한 지 단 4일 만에 러시아 군에게 점령당한다. 동부 흑해 연안의 도시 마리우폴은 포위당한다. 마리우폴의 우크라이나 군대는 오래 버텼지만 크림반도와 러시아에서 동시에 충원되는 병력을 이기지 못하고 점령당한다.

  러시아는 속전속결을 원했다. 벨라루스에서 접근하는 북부군과 크림반도에서 진격하는 남부군 그리고 본토에서 충원되는 중앙군으로 빠르게 전쟁을 끝내려 했다. 키이우 점령을 목표로 북부군을 지속적으로 투입했다. 동시에 공수부대를 동원해 호스토멜 공항을 점령하여 제공권을 장악한 다. 공중에서 충원되는 병력으로 키이우를 효율적으로 공략했다.


  다급한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곧바로 SNS를 통해 다른 나라에 도움을 요청한다. 우크라이나는 세계 군사력 2위의 러시아를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도움이 절실했다. 젤렌스키는 타국으로 도망가지 않고 키이우에 남아 결사 항전했다. 2월 25일 우크라이나 군대는 러시아의 진격을 막기 위해 키이우 북부에 위치한 테테리우 강에 있는 교각을 폭파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거센 저항에 당황했다.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를 두고 시가전이 시작되었다. 시가전 개시는 늘 공격하는 입장에서 원치 않는 방법이다. 기계화 부대를 통해 도시를 포위하고 병력을 투입해 주요 공관을 차지해야 한다. 건물 곳곳에 숨어있는 저격수, 주요 도로에 설치되어 있는 장애물과 부비트랩을 피해야 한다.

  미사일이나 탱크로 건물을 폭파시키기도 쉽지 않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이 한번 주위를 둘러보아라. 서울만 하더라도 교차로 하나에 수십 개의 건물이 존재하고, 한 구역 안에는 수백 개의 건물이 있다. 탱크가 하나씩 포격해서 나갈 양이 아니다.  그래서 핵폭탄으로 도시 하나를 눈 깜짝할 사이 지우는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키이우 점령하는데 핵폭탄을 쓴다면 이는 세계 3차 대전의 신호탄이 될 가능성이 높다. 제 아무리 푸틴이라도 이런 결정을 하기 쉽지 않다.


피난소 역할을 하는 키이우 시내의 지하철 역



  우크라이나는 키이우에서 러시아를 막는 데 성공한다. 1달간의 지지부진한 공격 끝에 러시아는 키이우를 포위하고 있던 전차부대를 돌린다. 마리우폴과 하르카우에서의 전장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자 동부 방면에 더욱 집중한다. 이 와중에도 전쟁은 지속되고 있어 우크라이나의 전장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는 미지수이다.


(위 내용 집필 시점과 달리 22년 6월 기준 러시아는 다시 키이우에 미사일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유는 명확하다. 그 힌트는 그가 2월 21일 러시아 국영방송에서 했던 말에 있

다.




“우크라이나는 꼭두각시 정권이 들어선 미국의 식민지”
“1991년 소련 붕괴 당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서구 세력에 강탈당했다.”
“우크라이나는 볼셰비키 정책의 결과로 만들어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현재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역사적 기억과 의식을 왜곡하려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빌미를 제공한다.”




  푸틴의 연설을 해석해보자면 지금의 우크라이나는 볼셰비키 혁명 당시 블라디미르 레닌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면서 러시아는 서구 세력에게 우크라이나를 강탈당했다. 그런 우크라이나가 우리 러시아 편을 들지 않고 미국에 달라붙은데 이어 NATO에 가입하려고 하자 이를 막기 위해 군사적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과연 사실일까?


  다들 알고 있겠지만 푸틴이 우크라이나에 군사적 행동을 가한 것은 올해가 최초가 아니다. 2014년에도 우크라이나가 서방세력과 친하게 지내려는 행동을 보이자 공격을 감행했다.



  푸틴의 야욕으로 시작된 전쟁이 더 이상의 사상자 없이 하루빨리 종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크림반도 위치



2014년 3월 1일 -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



  2014년 2월 28일. 우크라이나 영토 크림반도에 정체불명의 군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부대 마크를 전혀 달지 않은 이 군대가 러시아 혹은 체첸 공화국 소속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야누코비치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공격하려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미 지난주 탄핵된 그에게 실권은 없었다. 그리고 3월 1일 러시아의 대규모 2천여 병력이 러시아를 출발해 크림반도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크림반도의 경우 친러 성향이 매우 강한 지역이다. 과거 크림반도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다. 침공 일주일 전 크림반도에는 갑작스럽게 새로운 자치 공화국이 세워졌다. 그리고 러시아 군대와 새로운 자치 공화국은 곧바로 러시아 합병 건에 대한 주민 투표를 실시한다. 투표를 통해 압도적인 찬성표를 받은 크림반도는 러시아에 합병된다.


  크림 사태의 발단이 된 것은 13년도 말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발생한 유로마이단 혁명 때문이었다. 친 러시아 성향의 야누코비치 정권은 유럽연합 가입을 포기하고 러시아와 우호적인 협력을 하는 조약을 체결하려 한다. 그러나 국민들은 이에 반발하여 EU 가입에 찬성하는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를 일으킨다. 이 시위로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탄핵되고 새로운 과도정부가 세워진다. 유럽연합 가입과 더불어 NATO에 가입해 서방 세력과 우호적으로 지내려 한다.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은 항상 푸틴의 발작 버튼이었다.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에 가입한다면 크림 반도는 러시아에 반드시 반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크림 자치공화국의 아나톨리 모힐로프 총리는 우리는 우크라이나의 소속이며 과도정부를 인정한다. 그러자 푸틴은 연락망을 총동원하여 크림반도 분열을 조장한다. 러시아인이 많아 부추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결국 반도 내에서 친러 시위대와 반러 시위대가 서로 충돌한다.


2013년 말, 우크라이나 유로마이단 운동


  그리고 2014년 2월 27일 군소정당 출신의 세르게이 악쇼노프가 총리에 당선된다. 그는 잘 알려진 사람이 아닌 의문의 정치인이었다. 정치 이력마저 불확실했다. 갑작스럽게 총리가 된 악쇼노프는 크림 자치 공화국의 러시아로 편입 방법을 모색한다. 그리고 하루 뒤 대규모 러시아 병력이 크림반도를 침공하게 된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대로 악쇼노프 내각은 3월 11일 크림반도 내의 주민투표를 실시해 영토를 러시아 내부로 병합하는 투표를 실시한다. 무려 96.77%라는 경이로운 찬성률을 보이며 크림반도가 러시아로 편입되었다.


  서방 세력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은 크림 사태를 막기 위해 나서기 시작한다.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크림 사태를 막기 위한 중재안을 보여줬지만 푸틴은 단칼에 거절한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 역시 크림반도를 무력으로 점거하는 경우 러시아는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라 경고했다. 3월 말을 기점으로 대규모 자본이 러시아를 빠져나가며 경제적 제재를 가했다.

  그러나 서방의 제재는 푸틴의 야욕을 막기에 한없이 부족했다. 이에 맞춰 동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친 러시아 시위가 시작된다. 러시아는 이에 대응하여 돈바스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한다. 이것이 2022년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돈바스 전쟁의 시발점이다.


  러시아가 크림 반도에 유독 목을 매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흑해 연안이라는 지정학적 위치, 상당한 곡물 생산력이 주요 이유다. 소련과 러시아 제국의 영광을 되찾고 싶은 푸틴에게 있어 중요한 전진기지가 바로 우크라이나이다.

  하지만 이미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향력을 포기한 전적이 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러시아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



1991년 8월 24일  - 우크라이나의 소련 탈퇴



  1991년 드디어 50여 년간의 미-소간 냉전이 종결된다. 80년대 후반,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개혁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위기의 소련을 구해내려고 했다. 소련의 노선 변경으로 인해 1989년부터 공산주의 국가 내부에서 개혁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다수의 동유럽 국가들이 소련을 따라 기존 봉쇄 정책을 파기한다. 가장 대표적 사건은 1989년 11월 9일의 베를린 장벽 붕괴였다. 독일을 가로막던 장벽이 무너지면서 이제 독일을 완전한 통일 국가가 된다. 뒤이어 폴란드, 헝가리, 알바니아 등 다수의 공산 국가들이 시민들의 혁명으로 인해 공산당이 무너지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탈바꿈하게 된다. 소련 바깥의 공산 국가들이 자유민주주의로 전환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연방을 유지하려고 했다. 특히 연방 소속 국가 중 우크라이나는 가장 중요했다. 우크라이나의 농업 생산력과, 흑해 연안의 지정학적 위치는 러시아 입장에서 너무나도 중요했다. 반대로 우크라이나는 연방으로의 독립을 강력히 원했다. 우크라이나에서 1986년 일어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는 우크라이나 경제에 엄청난 악영향을 줬다. 연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경제 위기를 벗어나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세계 최악의 원전 폭발 사고는 한 나라의 경제를 나락으로 보내기 충분했다. 1990년 1월 21일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에서 무려 30만 명의 시민들은 서부 도시까지 인간 사슬을 만들어 소련의 정책에 반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독립에 대한 갈망은 그만큼 강렬했다.


  고르바초프의 개방 정책으로 소비에트 연방 내의 국가에서도 다당제가 허용되었다. 이를 계기로 우크라이나 의회에서도 무려 26%의 자유주의 정당이 권력을 잡게 된다. 연방유지를 위해 노력했지만 8월 쿠데타가 일어나며 고르바초프조차 쫓겨난다. 그리고 공산당 세력 내에서 가장 강력하게 개방 정책을 주장하던 보리스 옐친이 새로운 지도자로 떠오른다.

  보리스 옐친은 러시아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이제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옐친 대통령은 서방 세력의 원조를 통해 러시아를 경제를 살리려 했다. 러시아는 경제 원조를 받는 대가로 여러 국가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다. 러시아는 벨라루스의 벨라베자 숲에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지도자와 회동을 가진다. 이 회의에서 옐친은 벨라루스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독립을 인정한다. 


 1991년 12월 8일 벨라베자 숲에서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우크라이나의 독립에 공식적으로 승인한다. 블라디미르 레닌에 의해 우크라이나가 소비에트 연방으로 편입된 지 무려 60년 만에 일어난 독립이다.



블라디미르 레닌



1917년 12월 25일 -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출범



  세계 1차 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러시아 제국은 블라디미르 레닌 주도하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로 탈바꿈하게 된다. 제국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폭정과 부정부패, 세계 대전으로 인한 경제 악화는 공산주의 혁명에 힘을 실어준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개념으로 만든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였다.

  혁명을 마친 레닌은 적백내전을 통해 러시아를 완전히 통합한다. 사회주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포함한 주변 국가를 연방에 포함시켜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새로운 국가 체제를 만든다.


  레닌은 우크라이나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우크라이나가 중요한 이유는 이미 앞에서 수도 없이 언급했다. 레닌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같은 연방 소속이니 행정 관리상의 편의를 위해 현재 돈바스를 비롯한 많은 지역을 우크라이나 소속으로 편입시킨다. 당연히 이 지역은 우크라이나 인들보다 러시아 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살았다. 우크라이나 내부의 민족 구성 변경은 분쟁의 씨앗이 된다.

  레닌이 실시한 이 우크라이나 편입 정책은 오늘날까지 양국의 갈등에 영향을 끼쳤다. 8년 전의 크림반도 사태 이어진 돈바스 전쟁 그리고 현재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모두 이 편입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자 스탈린은 강제적이고 효율적인 농업 생산 명목 하에 우크라이나의 대규모 식량을 전부 러시아로 가져간다. 레닌 정부 때까지만 하더라도 신경제정책의 일환으로 어느 정도 자체 생산력과 잉여 생산을 인정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전 국가의 생산력 일원화를 위해 잉여 생산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우선 우크라이나 곡창지대에 존재하던 부농들을 전부 때려잡았다. 노동자들과 시민들을 강제로 동원시켜 우크라이나에서 식량 생산을 시작했다. 생산량의 대부분은 러시아를 비롯한 타 연방 국가로 강제 수출된다. 우크라이나 식량은 점점 떨어져 갔다. 농업지식이 전혀 없었던 공산당 간부들로 인해 생산량은 더 떨어져 갔다. 결국 이 정책으로 우크라이나에 대기근을 발생했다. 물론 우크라이나 내부의 갑작스러운 가뭄도 한 몫했다. 굶어 죽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추정되는 사망자만 무려 1100만에서 1500만 사이였다.


  레닌의 행정상 편의를 위한 편입, 스탈린의 수탈로 인해 우크라이나는 대기근, 체르노빌 사건. 이 정책들은 소비에트 연방의 우크라이나 정책은 훗날 러시아와의 관계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양국 간의 반목의 배경은 바로 레닌이 소련을 만들 시점까지 거슬로 올라가야 한다.


  전쟁은 작은 분쟁 때문에 일어난다. 월드컵 경기 결과에 인정하지 않아 발생한 전쟁도 있으니 얼마나 사소한 이유로 전쟁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과거 소련 시절의 편의를 위해 실시한 정책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엄연히 다른 두 나라이지만 러시아는 계속 우크라이나의 문제에 대해 간섭하고 있다. 

  100년간 지속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간섭과 자주성을 지키려는 우크라이나의 노력. 하루빨리 좋은 방향으로 끝나 전쟁으로 더 이상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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