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맞이한, 32번째 생일 아침
나에게 5월은 생일 <주간>을 넘어 <월간> 행사에 가깝다. 31일 중 20일을, 먹고 마시는데 기꺼이 바치는 달. 게다가 공휴일도 제법 많은 ‘가정의 달’ 아니던가. 매년 어버이날 즈음에는 가족과 친척들이 꼭 모인다. 역시 피는 못 속인다고, 다들 훌륭한 먹성을 한껏 뽐낸다. 친정뿐 아니라 시댁 식구들도 마찬가지다. 친구들과도 오랜만에 한껏 꾸미고 만난다. 근사한 분위기의 숨은 레스토랑에서 사치를 부려보자고. 술은 당연히 빠지지 않는, 치팅으로 가득한 행복한 날들이다.
올해도 그렇다. 5월의 첫 주말, 시댁 식구들과 강원도로 식도락 여행을 떠났다. 내가 직접 담근 막걸리를 종류별로 챙겨 간 덕에, 술꾼 이모들에게 격한 환영을 받았다. 노는 걸 미룰 틈이 있나, 짐정리하는 시간도 아까운데. 우리 부부는 강원도에서 곧장 인천으로 달려가 친정 식구들과 집캉스를 했다. 호프집을 운영하는 엄마친구 가게에서 안주를 얻어오고, 어엿한 성인이 된 막내 동생에게 맥주 심부름을 시키며, 아빠와 늦도록 수다를 떨었다. 배가 볼똑해진걸 보니 연휴는 끝나가지만, 나의 월간 행사는 아직 한창이다.
아무렴, 아직 생일이 오지도 않았는 걸! 겨우 이틀 후 저녁, 우린 다시 동생 자취방에 모였다. 결혼 전부터 내 생일마다 함께 가던 망원동 단골집을 가기 위해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워 맥주 한 병을 가볍게 비우고, 그 취기를 빌려 평소엔 마시지 않던 청하까지 기분 좋게 마셨다. 며칠 뒤에는, 시부모님과 샤부샤부 무한리필 집에서 거하게 먹고, 삼겹살 파티를 하자며 장까지 야무지게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생리 예정일이 4~5일이나 지났는데, 감감무소식이다. 며칠쯤이야 하고 넘길 수도 있지만, 너무나도 건강한 나는 평생토록 주기가 정확했다. 정말 늦어도 3일이면, 마치 꽉 참고 기다렸다는 듯이 ‘팡’ 하고 터졌는데 말이다. 그 와중에 양쪽 가슴이 너무 아프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피가 가슴으로 쏠리는 듯한 이상한 감각. 처음 느껴보는 통증이라 정확하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우선 실오라기만 스쳐도 쥐어짜는 듯하다. 남편에게 몸이 좀 이상하다고 말하다가 문득 —
어머, 설마...?
남편이 약국에서 임신 테스트기 하나를 사 왔다. 아침 첫 소변으로 검사해야 정확하다는 말에, 검사는 다음 날로 미뤘다. 여기까지가, <생일 월간>의 절정을 향해 달려가던 생일 이브까지의 이야기다.
- 오빠, 나 화장실 갈래.
- 그래, 다녀와!
침대에서 겨우 다섯 걸음이면 닿는 화장실인데, 남편이 배웅까지 해줬다.
그리고 너무나도 선명한 두 줄!
화장실 문을 열자마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침실에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남편을 아무 말 없이 와락 껴안았다. 그는 임테기를 슬쩍 확인하더니, 담담하게 내 등을 쓸어주었다. 처음 써보는 테스트기였지만, 그 의미는 둘 다 단번에 알았다. 우리는 한참을— 한참을— 끌어안고 있었다. 내 눈물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원래 눈물이 많은 울보이지만 이렇게 의미심장한 눈물은 처음이었다. 남편은 차분했고, 어쩌면 조금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순간 나는, 그저 남편 품에 안겨 충분히 눈물을 흘릴 수 있어서 좋았다. 말없이 등을 쓸어내리는 남편과 함께라니 두려울 게 없었다. 안심이 되었다.
아기집이 아주 튼튼하게 잘 생겼네요. 임신하신 게 맞습니다.
-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산모님이 정말 기뻐하시네요. 많이 기다리셨나 봐요.
- 아, 그건 아니고, 계획한 것도 아닌데 감격스럽네요. 감사합니다. 근데 제가 사실 평소에도 …. 특히 지난주 내내 술을 마셔서 너무 걱정되는데요.
- 이 정도로 아기집이 잘 생겼다면, 지금까지 먹고 마신 건 아무 문제없어 보이네요. 앞으로만 조심하시면 됩니다. 지난 일들은 잊고 안심하세요.
우리는 주말에도 문을 여는 산부인과를 찾아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얼떨떨하고 어리둥절한 나와 달리, 남편은 차분히 병원을 검색하고, 지금부터 해야 하는 것들을 정리한 자료를 찾아 주었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다시 눈물이 났다. 이번엔 소리 내어 울었다.
아이를 낳아 기르며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은 나의 큰 목표 중 하나였다. 하지만 커리어 또한 중요하게 생각해 온 터라, 지금 이 시기에 아기를 갖는 것이 맞을지 고민이 되었다. 번아웃으로 퇴사한 지 반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앞으로는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방법과 회사를 알아보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출산과 육아를 시작하면 복직이 쉽지 않으리라는 현실적인 우려 때문에.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지금처럼 건강하고 평온한 시기에 아기를 맞이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조심스레 들기 시작했다.
의사로부터 <임신> 사실을 확인받고 나니, 그동안의 고민이 모두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저 고맙고, 감사했으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행복한 내 미래의 모습이 더욱 선명해졌다.
32살 생일,
내 생에 최고로 벅찬 선물을 받았다. 화려한 음주생활로 장식했던 생일 월간은, 잠시 안녕.
아가야,
지금 우리에게 찾아와 줘서 고마워.
엄마랑 아빠랑
할머니할아버지 이모삼촌과 함께 행복하게 살자.
온 우주가 널 환영해.
2025.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