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인생은 수많은 간이역과 같다. 그곳에서 만나고, 떠나고, 다시 만난다. 그런 순간들이 쌓여 우리의 관계와 삶이 만들어진다.
<서도역에서>
남원 서도역으로 향했다. 서도역은 자그마한 간이역이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서도역은 남원을 배경으로 한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에도 등장하고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김화숙& 사포 현대무용단”의 창립 40주년 기념 작품 공연이 열리는 서도역 방문이 이번 여행의 메인 이벤트이다. 공연 제목은 <다시 간이역에서>. 이번 공연에서 무엇보다도 특기할 점은 공연장이 밖으로 나왔다는 것이다. 철길과 역 앞 광장이 무대로 쓰였다.
간이역.
잠깐 머무는 인생의 간이역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잠깐 멈추고 다시 만나고 떠나기도 한다.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간이역은 애틋하다. 우리 인생의 간이역은 어디였을까. 우리는 반짝이는 큰 기차역만 보느라 우리의 간이역을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간이역에서 우리는 만나고 다시 떠나며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영혼을 재정비한다.
팸플릿에 보면 공연은 무언가를 이야기하고자 하고 있었다. “프롤로그-떠나다 이미지 1: 시간의 기억. 어디에도 없고, 마음 어디에도 있는 내 기억의 그림자. 이미지 2: 보이지 않는 그곳에. 다들 어디로 갔을까. 만남과 떠남이 엇갈리는 그곳. 이미지 3: 돌아올 수 있을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나. 그리움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에필로그: 텅 빈 이곳.”
처음에는 나도 그들의 무용이 이야기하려는 바를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내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야기하려는 것보다 몸 움직임 그 자체임을 곧 깨달았다. 긴 바바리코트 같은 겉옷을 걸치고 좀비처럼 한 줄로 등장해 긴 옷을 휘젓고 휘날리며 춤추는 그들. 회한도, 질곡도, 그리움도 다 벗어 버리고 훨훨 나르고자 하는 몸짓. 흰색 천을 뒤로 끌며 긴 철로를 따라 앞으로 달려 나가는 무용수는 그렇게 달리며 날아오른다.
만남도 떠남도 뒤로 하고 위로 날아오른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들의 무용을 이야기가 담긴 무용보다 움직임으로만 이루어진 순수무용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들의 몸동작이 더욱 선명하고 아름답게 눈에 비쳤다. 비상하려는 새들의 몸의 움직임. 황인숙 시인의 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가 생각났다.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보라, 하늘을/아무에게도 엿보이지/않고/아무도 엿보지/않는다./새는 코를 막고/솟아오른다/얏호, 함성을 지르며/자유의 섬뜩한 덫을/끌며/팅! 팅! 팅!/시퍼런 용수철을 튕긴다
간이역에서 그들은 회환과 질곡과 그리움을 떠나버리고 천을 날개 삼아 솟아오르며 자유와 만난다.
공연이 끝나고 늘 호기심이 많은 것이 장점인 친구가 한 무용수에게 그 바바리 같은 코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보았다. 짐이 될 수도 있고 꿈이 될 수도 있고 각자마다 다르게 읽히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지, 이 무용에서 정답이 정해져 있을 수는 없다. 우리는 이 예술 공동체 앞날의 발전을 기원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촐한 후원을 결정하고 기뻐했다.
<허브농장, 다시 남원역>
라벤더의 보랏빛이 우리를 맞았던 너른 허브 농장, 해물칼국수, 팥죽 칼국수와 빈대떡의 저녁을 마치고 12시간 만에 다시 도착한 남원역. 정갈한 남원역을 떠나는 KTX에 몸을 실었다. 남원의 하루에서 문화와 예술로 우리의 감각이 확장되고 자연--햇빛, 바람, 물소리, 나무 색깔과 냄새에서 생기가 다시금 차올랐다.
그런데 이 중심에 가장 좋은 것은 같이 소풍 한 사람들, 친구들이다.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생의 간이역에서처럼 소중한 만남이 이루어지셨기를.
다음 글은 이번 연재 <관계와 연결>의 마지막 에세이, "아름다운 사람 김민기를 보내며”입니다.
예술과 삶에서 뜻깊은 관계를 맺고, 맺어 주시고 떠난 고인을 애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