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삶과 산삼차
죽음의 이면에는 당연하게도 삶이 있다
오늘은 ‘죽기 전의 삶’이 아닌 ‘죽음 이후의 남은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장례식장을 다녀오는 횟수도 늘고 있다. 가족, 친지, 지인들의 슬픔을 대면하면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형태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보다 익숙해진 것이 아니라, 아픔을 겪은 사람들과 더 크게 공감하고 슬퍼했다.
어렸을 땐 그저 남의 일인 줄로만 알았는데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고 나만 몰랐을 뿐이었다. 5살이었던 나는 부모님을 여읜 어머니의 슬픔을 알지 못했다. 어렴풋한 기억에는 어린 나와 동생을 데리고 차도 안 다니는 새벽에 길을 나서던 어머니가 있었다. 그렇게까지 한걸음에 내달려야 했던 이유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였던 것 같다. 어떤 모르는 사람의 트럭을 잡아타고 길을 달리면서 어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체 그저 졸린 눈을 비볐다. 그때 내 머리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조금이라도 어머니를 위로해 드릴 수 있었을까.
죽음다운 죽음을 경험한 것은 친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이다. 중학생 정도 되었던 것 같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아버지께서 우시는 모습이 뇌리에 강하게 박혀있다. 부모님을 보내는 마음이 어떨지 가늠할 수 조차 없었다. 시골의 전통장례 형식으로 치러졌는데 조문객이 오실 때마다 '아이고'를 외쳤다. 드라마에서나 듣던 소리였다. 동네 어르신들도 오셨는데 작은 시골마을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삼베옷을 입고 지낸 3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마냥 보고 계시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여러 번 봤지만 위로는 해드리지 못했다.
상을 치르는 3일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정말 힘들다. 본인을 찾아오는 지인들이 오히려 단비와 같다. 그저 아는 사람이 와준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이 앉아있는 곳은 작은 쉼터가 되기도 한다. 나는 장례식장에 가면 일부러 말을 많이 걸어주는 편이다. 잠깐이라도 정신을 딴데 돌려놓기 위함이다. 경험상 조용하게 있으면 마음이 가라앉고 가라앉다 너무 깊은 곳까지 내려가 이내 슬퍼지기 때문이다. 내가 뭐라 한들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음을 알기에 잠깐이라도 슬픈 생각을 안 하게 해주는 것. 그게 나만의 위로 방식이다.
얼마 전 가까운 친지분께서 상을 당하셔서 다녀온 적이 있다. 집에서는 대략 2시간 반 거리였는데 평소에 가깝게 지내기도 했고 워낙 잘 챙겨주시는 분이셔서 피곤을 무릅쓰고 길을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이 먼 곳까지 굳이 왜 왔냐며 미안함과 반가움을 동시에 보이셨다. 나는 그분의 충혈된 눈을 보며 내 눈물을 꾹 참고 애써 당연하다 말했다. 얼마나 우셨을지 짐작이 갔다. 나만의 방식으로 위로를 전하고 있을 때였다. 그분께서는 다시 먼 길을 가야 할 나를 위해 혹여나 가는 길이 피곤할까 걱정이 되셨는지 선뜻 냉장고에 있던 산삼차를 꺼내오시는 것이었다. 장례식장에는 자양강장제나 피로회복제가 정말 많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들은 조문객에게 드리기 위한게 아니라 3일간 버텨내야 하는 가족들을 위한 것이였던 듯하다. 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그분께 걱정을 끼쳐드리기 싫어 단숨에 입에 털어 넣었다. 본인의 안위보다 나를 더 걱정하시는 모습에 다시 한번 코끝이 찡해짐을 느낀 나는 조금 서둘러 자리를 일어났다.
올라가는 길이 꽤 길었지만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는 산삼차 덕분인지 다행히 한 번도 졸지 않고 올라왔다. 꼭 조심히 올라가라는 말씀과 함께 손에 쥐어주셨던 그 달큰 쌉싸름한 이름만 산삼차인 그 홍삼음료의 맛이 당분간은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언제나 그렇듯 죽음은 산 사람들을 남긴다. 그렇게 위로를 드리러 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서로 말하지 않아도 마음 한 구석에 남는 것. 산 사람들에게 남는 건 그런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