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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방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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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즈 Apr 18. 2020

열여덟, 세상을 학교로 삼다 - 베트남 사파(2)

1-08 열여덟 자퇴생의 동남아 배낭여행

<시즈의 방랑 일기 ; 동남아편 >

       190511~190512 : 베트남 사파 (Sapa, Vietnam)



#이 글 전의 이야기

사파에 도착해 소수 민족인 '흐몽족' 마을에 위치한 마마 무네 집까지 7시간 트래킹. 찌는 듯한 더위 속에 간신히 도착해 샤워를 마친 다음 친구들과 함께 마마 무가 준비한 저녁 식사를 먹음.




마마 무의 집.

 채식주의자인 친구들이 있어 우리의 저녁은 고기반찬이 들어가지 않은 흐몽족 전통 식단으로 준비되었다. 돌아오자마자 금세 이 많은 음식을 정성 들여 준비하는 게 여간 쉽지 않았을 텐데, 마마 무는 힘들긴커녕 오히려 기운이 넘쳐 보였다. 신기함에 힘들지 않냐고 묻자 돌아온 마마 무의 대답은 진짜 멋졌다. "난 맨날 이 길을 다니는 걸요. 그 험한 길이 내 삶이에요." 그 얘기를 듣고 트래킹 멤버 중 막내임에도 체력은 제일 글러먹었음을(?) 오늘 하루 여실히 증명한 나 자신이 얼마나 창피했는지 모른다….


사파 트래킹이 다 끝나고. 마마 무가 트래킹 출발 전 선물해준 팔찌가 보인다.

 어쨌든 저녁밥은 진짜 꿀맛! 오늘의 여정이 고되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겠지만, 그걸 떠나서도 건강하고 담백한 상차림 덕분에 부담스럽지 않고 깨끗한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특히 튀긴 스프링롤은 바삭한 식감과 안을 꽉 채운 신선한 채소들 덕분인지 유난히 손이 가서 숨도 안 돌리고 흡입했다.


 그러나 저녁 식사의 하이라이트는 마마 무가 꺼내온 유리병이었다. 특이한 유리병에 눈이 휘둥그레진 우리가 "이게 뭔가요?"하고 마마 무를 바라보자, 마마 무는 우리에게 작은 잔을 하나 씩 나눠주며 유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이건 쌀로 만든 우리 부족 고유의  술이에요. 손님들이 오면 이 술을 함께 마시는데, 그 날 저녁 식사에 한 병을 다 마시는 게 전통이죠. 한 잔을 따르면 무조건 한 번에 다 마셔야 해요." 설명부터가 심상치 않았는데, 그 뒤에 덧붙여진 말은 더 충격이었다. 전통주의 도수가 무려 40도였다! 마마 무는 이 술의 별명이 '해피 워터(Happy water)'라며, 한 병을 다 마시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호탕하게 웃었다. 한 번도 독주를 마셔본 적 없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 역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특히 나는 아직 음주가 불가능한 대한민국의 바르고 파릇한 청소년이기에 준법정신을 발휘하려고 했지만… 마마 무가 특별히 가져온 이 귀한 술을 안 마시는 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법적 성인들의 보호 아래 융통성 있게 몇 잔 깔짝(?)였다. 목구멍을 타고 들어오던 그 강력하고 알싸한 맛…! 한 잔으로도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던 우리의 해피 워터는 정말 충격적이고 맛났다….


사파 트래킹 중 만난 풍경들.

 하지만 내가 그 시간을 선명하고 소중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나무를 깎아 만든 낮은 의자에 앉아 마마 무와 나눴던 대화들 때문이었다. 우리 같은 트래킹 초보들을 케어하고 위험한 구간에서 한 명 한 명 손을 잡아줘야 하는 상황이 무척 귀찮았을 법도 한데, 본인의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쉽게 생각하기엔 마마 무는 걷는 내내 힘든 기색도 없이 편안해 보였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아주 특이하고 신비로웠다.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형태의 깊은 아우라가 느껴졌다. 친구들 역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마마 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내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바로 마마 무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결혼 전 열일곱 살 때부터 이미 남편과 동거했다는 마마 무는, 본인 이름의 뜻이 '꿀벌(무)'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또한 놀랍게도 살면서 단 한 번도 사파 이외의 곳을 가본 적이 없으며 부족 고유의 언어와 문화가 존재해 베트남어 역시 모른다고 말했다. 사실 사파의 소수 민족 마을들은 어찌 보면 베트남 내에서도 손꼽히는 오지이기에 더욱 놀라웠다. 그 얘기에 나는 "다른 도시에 가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으세요?" 하고 물었다. 마마 무가 싱긋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마마 무. 둘째 날 트래킹 중 만난 폭포에서 숨을 돌리며.


 "가보고 싶어요. 굉장히 멋진 곳들이 많을 테니까요. 하지만 가지 못해도 괜찮아요. 나는 이 작고 아름다운 마을을 사랑하거든요.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들도요. 이 마을 밖으로 나가본 적은 없지만 전 세계를 상상해볼 수도 있으니까요. 여러분들처럼 멋진 여행자들 덕분에 말이죠."


 머릿속이 , 하고 울렸다. 대단한 말은 아니었지만 듣는 순간 가슴 한 편이 뜨거워졌다. 갖지 못한 것에 대한 호기심은 품되 아쉬워하지 않고 본인이 누리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과,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곁에 있는 것들에 충실하는 태도는 정말 멋졌다. 그건 그 당시의 나에게 가장 필요하지만 아직 갖지 못한 생각이기도 했다. 남들보다 더 많이 누리고 경험하면서도 그다음의 것을 갈망하는 욕심. 그 욕심을 버리면 훨씬 넓은 시야로 바라볼 수 있을 게 분명한데 그게 참 어려웠다. 그리고 마마 무는 그런 사실을 부정하던 나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어줬다.


마마 무와 뉴뉴가 만든 핸드메이드 팔찌. 이 팔찌는 여행이 끝난 후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그런 사실들 때문일까? 다음 날 새로운 도시로 떠나기 위해 걷던 중 만난 폭포에서, 옷이 흠뻑 젖든 말든 까르르 웃으며 수영하던 아이들을 잔잔하게 바라보던 마마 무의 얼굴이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마지막 인사 도중 우리에게 여행자들에게 판매하는 핸드메이드 팔찌 여분 전부를 선물이라며 주던 마마 무… 함께한 시간은 고작 이틀밖에 되지 않는데도 그를 끌어안고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던 이유는 아마 그런 현명하고 따스한 마음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파는 나에게 그저 '지금까지 가보았던 모든 도시들 중 가장 좋았던 곳'이 아니다. 그곳은 떠올리기만 해도 나를 기쁘게 만드는 존재들이 숨 쉬는 곳이다. 새까만 밤 침대에 누웠을 때 쉬지 않고 울던 벌레들과 푸른 산 위에 고요히 내려앉은 물안개가 그 자리에 있어준다는 사실 자체로 고마웠던, 잊고 있던 귀한 긍정을 다시 깨닫게 해 준 사파. 꼭 그 험하지만 경이롭던 길 위에 다시 설 수 있기를.


 나의 특별한 스승 마마 무, 또 만나요!


트래킹 가이드를 해줬던 현지인 두 분. 왼쪽이 뉴뉴, 오른쪽이 마마 무다. 보고 싶어요! 잘 지내시죠?


 나는 사파에서 <내가 가진 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웠다.



To be continued…

*모든 사진은 직접 촬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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