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의 기온에도 포기할 수 없는 것
'살아남기' 만화 시리즈물 아시나요. '사막에서 살아남기', '밀림에서 살아남기', '심해에서 살아남기' 등의 극한 상황에서 주인공이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그렸지요. 일종의 학습만화고요. 'AI로봇세계에서 살아남기'도 있는 것을 보니 최근까지 시리즈물이 계속되고 있나 봐요. 딸의 초등학교시절 책꽂이에 전권이 가지런히 꽂혀있었지요. 새로운 시리즈를 기다리다 바로 구매할 정도로 즐겨 보았답니다.
졸업식은 1월 8일, 하필 요크에는 한파가 몰아닥쳤네요. 영국의 위도가 북위 50도를 넘으니 사실 매우 추운 지역이지요. 멕시코만류가 몰고 온 따뜻한 바닷물 덕분에 겨울도 영상의 기온을 유지하지만요. 대신 어마어마하게 습해요. 습기가 체감 온도에 영향을 끼치잖아요. 한국의 여름이 힘든 이유가 습도 때문이듯이 영국 겨울이 그래요. 습기로 무거워진 추위는 몸을 짓누르며 뼛속까지 스며듭니다.
영국 졸업식은 학교마다 다 달라요. 여름에 학기가 끝나도 졸업은 겨울에 하더군요. 논문 심사 때문이라는데 이해는 잘 안 가요. 여하튼 졸업을 추운 12월과 1월에 많이 하고요. 졸업식도 3일에 걸쳐서 단과대별로 하루에 3번으로 나눠서 하더군요. 우리나라 예식장 시스템 같았어요.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4시. 마지막 식은 거의 밤에 하는 수준이지요. 4시면 해가 지기 시작하니까요.
그래서 졸업식 당일 날씨는 매우 중요합니다. 비만 오지 않으면 운이 좋은 거지요. 그날은 해가 떴습니다. 대신 영하의 추운 날씨였고, 며칠 전에 내린 눈보라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지요. 그 정도 기온에 뭐 '살아남기' 운운이냐 하시겠지만, 그 기온에 민소매 드레스를 입고 정장 구두를 신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
몇 년 전에 졸업한, 아는 언니한테 물려받은 아이보리 드레스는 '다행히' 무릎을 덮는 길이의 민소매 파티용이고, 신발은 같은 색으로 뒤꿈치가 보입니다. 그 위에 졸업 가운을 입을 건데 굳이 얇은 드레스를 입어야 하나 싶지만 그것이 여학생들의 정장인가 봐요. 미니스커트를 입은 학생들도 있더군요. 누가 말리겠어요.
형식과 격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국이다 보니 졸업식도 엄숙하고 세련되게 진행하더군요. 가족도 두 명까지만 초대장을 주고 그 이상은 꽤나 비싼 돈을 받고 초대장을 팔더라고요. 딸은 저와 가장 친한 영국 친구를 초대했어요. 실내는 그래도 견딜만했지만 바깥은 두꺼운 외투와 목도리가 필요했지요.
사각모를 던지고, 이 친구 저 친구와 환한 표정으로 추억을 남깁니다. 포즈도 다양하게. 사시나무처럼 떨 줄 알았는데 꿋꿋하게 해내더군요. 추위도 정신력으로 이길 수 있나 봐요. 깡마른 딸이 혹시 얼어 죽을까 연신 외투를 덮어주었지요. 저는 히트택 내복을 입고 털 목도리도 두르고 있었지만 스산한 기운이 뼈까지 전달되었거든요. 어렵게 공부했는데 졸업식에서 동사(凍死)할 수는 없잖아요.
나중에 사진을 보니 이쁘긴 하더라고요. 그래도 얼굴은 추운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런 경우는 또 보정을 하더군요. 아무리 영하의 날씨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있나 봐요. 그날의 '디바'가 되는 것이지요.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기'에 성공한 그날의 '디바'들에게 앞날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그리고 자기 인생의 '디바'가 되기를 계속 응원합니다. 춥고 힘들어도 결국 살아남아서!!
(*디바 : 이탈리아어로 여신, 오페라에서 가장 출중한 주인공을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