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만드는 요소
셰익스피어 생가가 있는 Stratford-upon-Avon에서 '십이야'를 관람한 이야기입니다.
RSC는 Royal Shakespeare Company(왕립 셰익스피어 극단)의 줄임말입니다. 스트랫퍼드어폰에이본을 런던에서 가자면 버밍엄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습니다. 이곳을 특별히 방문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셰익스피어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들이겠지요. 그래서 갔어요. 30년쯤 전, 어느 여름밤, 연극을 보고 혼자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던 기억이 아련한 향수로 남아, 다시 그곳으로 이끌려갔습니다. 그날도 유쾌한 희극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한 여름밤의 꿈'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제목이 왜 '십이야'인가?
십이야는 12번째 밤이라는 뜻이지요. 내용을 봐도 제목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도무지 짐작이 안 갑니다. 교회에서 예수탄생 후 매일 축제를 즐기다가 12일째 되는 날은 주현절이라는 명칭으로 기념을 한대요. 이 날은 '아주 즐겁고 유쾌하게 즐기는 축일로 흔히 악의 없는 장난과 농담을 하는 날'이라고 합니다. 서로 장난치고 농담하며 즐거웠을 16세기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보니 미소가 지어지네요.
한창 유명세를 타던 셰익스피어가 흥을 돋우기 위해 그날 공연할 작품을 하나 썼다지요. 제목을 못 정하고 있던 참에 공연일을 제목으로 해버렸다는 설이 있습니다. 황당하고 성의 없어 보이는데 한편 제목으로는 신박하기도 하네요. 그래서 RSC는 매년 1월 6일에 '십이야'를 무대에 올린답니다. 일정을 맞추다 마침 그날 예매를 했는데, 매우 특별한 연극을 특별한 날 보게 된 행운을 잡았더라고요.
극장 풍경
스트랫퍼드어폰에이본은 손바닥만한 마을입니다. 백조가 노니는 에이본강옆에 RSC극장이 있고 조금만 걸어가면 시내중심부에 닿습니다. 그곳에 셰익스피어의 생가를 비롯한 여러 기념관과 상점이 늘어서 있어요. 타이 음식점에서 팟타이와 맥주를 한잔씩 마시고 딸과 함께 밤거리를 걸어 극장으로 갔답니다. 머리가 하얀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걸어갑니다. 모두 극장으로 가고 있더군요. 극장에 들어서니 왁자지껄합니다. 우리 둘 이외에 까만 머리의 동양인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주변 지역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다 모인 것 같았어요.
예매를 늦게 했지만 운이 좋게도 1층 구석 기둥옆 자리의 표를 구했었네요. 극장은 사각형으로 무대는 ㄷ자형으로 배치된 관람석 중간에 있었어요. 고전적인 의상과 원형 그대로의 내용을 기대했으나 현대극으로 각색을 했더군요. 이점은 다소 실망스러웠습니다. 영국식 발음에다 현란한 대사라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내용을 숙지한 터라 줄거리는 잘 따라갔답니다.
중간 인터미션 시간에는 바깥 홀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 첼로가 재즈음악을 연주했고, 다들 유리잔에 포도주를 한 잔씩 들고 담소를 나누더군요. 여유 있고 즐거운 풍경이었어요.
작품 내용
간단히 소개하면, 남녀 쌍둥이 비올라와 세바스찬이 타고 가던 배가 침몰되면서 시작된 유쾌한 코미디입니다. 비올라는 난파선에서 살아 나와 남장을 하고 올리노 공작의 하인으로 들어갑니다. 올리노 공작은 올리비아라는 여인을 사랑하는데 비올라를 시켜 구애를 합니다. 올리비아는 죽은 오빠생각으로 깊은 슬픔에 빠져 있던 참이지요. 여기서 일이 삼각으로 꼬이기 시작해요. 올리노 공작은 올리비아를 사랑하는데, 올리비아는 심부름 온 비올라를 좋아하게 되고, 비올라는 올리노 공작을 몰래 마음에 둡니다.
그러다 쌍둥이 오빠 세바스찬이 뒤늦게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돌아와요. 때마침 올리비아가 길에서 만난 그를 자기가 연모하던 남장한 비올라로 착각하고 사랑을 고백해요. 이게 웬 떡이냐며, 둘이 결혼을 합니다. 졸지에 자기 하인에게 애인을 뺏겼다 생각한 올리노 공작이 분노를 폭발할 때, 비올라가 남장을 벗고 숨겨온 마음을 고백해요. 사랑에 목마르던 올리노 공작은 앞뒤 돌아보지도 않고 그녀의 받아줘요. 그렇게 둘이 맺어지며 해피엔딩이 됩니다. 사랑과 결혼이 이렇게 쉬울 수 가요.
가장 요절복통하는 희극적 장면은 올리비아의 점잔 빼는 하인 말볼리오가 토비와 앤드류 일당의 음모에 말려 주인인 올리비아에게 고백하는 부분입니다. 관객들이 배꼽이 빠지도록 웃었습니다. 대사를 하나도 못 알아들어도 말투와 몸짓과 표정만으로 박장대소를 했답니다. 대단한 배우였어요. 그가 입었던 노란 스타킹은 기념품 가게에서도 팔고 있더군요. (매우 상업적이죠) 옛날 사람들은 매년 1월 6일이 되면 그들처럼 장난치며 놀았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매우 적당한 제목이네요.
'십이야'가 가르쳐준 것
비극과 희극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저는 '집착'이 아닐까 해요. 비극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쌍둥이 남매의 삶이 행복으로 끝나는 데는 올리노공작과 올리비아의 역할이 매우 큰 것 같아요. 만약 올리노 공작이 좋아하는 여자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면, 혹은 올리비아가 죽은 오빠에 대한 '집착'이 강해 어떤 사랑도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이야기는 즐거운 희극이 되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다면, 희극의 요소는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는 easygoing 한 (편한, 원만한, 수월한) 사람들이 아닐까 해요.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비극의 주인공들을 보면 이해가 쉽지요. 햄릿, 맥베드, 오셀로, 리어왕, 어느 한 사람도 easygoing 한 사람이 없잖아요. 심각하고, 무겁고, 욕망과 질투에 눈이 멀고, 오만과 거만함은 어리석음으로 드러나지요. 결국 삶을 행복으로 이끌던가 불행으로 이끄는 것은 사람의 성격이네요.
오랜만에 셰익스피어의 희극을 보면서, 마음에 잡고 있는 작은 집착도 내려놓으며 살아야겠구나, 생각했어요. 한바탕 즐겁게 웃자고 만든 연극이겠지만 우리 인생도 어차피 한 편의 연극인데 기왕이면 희극이면 좋잖아요. '악의 없는 장난과 농담'이 통하는 관계 속에서 매사 수월하게 넘어가는 하루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바라봅니다. 요즘 사람들의 관계가 팍팍하고 조심스러워 희극적 요소들이 더욱 그리워지나 봐요. 아! 누군가에게 장난치고 싶어라.